#114
“…….”
“…….”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얼음땡 하다 얼음이라도 외친 사람처럼 발을 내딛은 자세 그대로 굳은 이연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유정헌 역시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말이 없었다. 정적이 점점 무거워지자 당황한 뇌가 뒤늦게 굴렀다. 아니, 유정헌이 왜 여기…….
적인가?
동작은 빨랐다. 삽시간에 커다란 새장이 튀어나와 유정헌을 감금했다.
“영 씨랑 한 패예요?”
매서운 추궁에도 정헌은 딴소리만 했다.
“나 봤는데.”
“유정헌 씨 <오른> 소속 아니에요? 왜 이런 데에 가담한 겁니까?”
“분명히 그림 없이 능력 썼지?”
“대낮에 사람을 납치하다니, 부끄러운 줄 아세요.”
“등급 심사 사기치면 처벌받지 않나?”
“그건 낮은 등급이 높은 등급으로 속였을 때죠.”
“아, 넌 그 반대 경우니까 괜찮다?”
“…….”
아 씨, 계속 무시했어야 했는데……. 반사적으로 대답해 버린 이연이 인상을 썼다.
“오른에 항의 넣을 겁니다.”
드디어 이연의 진정성이 전달되었는지, 정헌이 항복하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아, 잠깐만. 나도 여기랑 관련 없어.”
“그걸 어떻게 믿어요?”
“내가 여기 사람이면 뒤에서 훔쳐보고 있었겠어? 대놓고 의자에 앉아서 네가 묶인 걸 구경했겠지.”
“도와 달라고 할 때는 왜 안 나왔어요?”
“나가려고 했는데 네가 뭘 하길래 궁금해서 가만히 있었어.”
대답은 그럴듯한데 묘하게 재수가 없었다.
“……여긴 어딘데요?”
이연은 속는 셈 치고 믿어 보기로 했다. 정헌이 어깨를 으쓱이며 설명했다.
“나도 정확히는 모르는데, 추측으로는 불법 공장 같아.”
“공장? 뭘 만드는 건데요?”
그때까지만 해도 이연은 별생각 없었다. 김 박사는 변이종 실험을 했던 사람이니, 여기서도 비슷하려니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초능력자.”
“……뭐, 진짜예요?”
변이종이 아니라 사람?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한 질문에도 정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을 가지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가 이 공장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정헌의 회사인 <오른>은 규모가 크지는 않았으나 내실 있는 기업이었다. 원래라면 하급 변이종을 잡는 D급 임무 같은 건 거의 취급하지 않았지만, 내부 시스템이 꼬인 탓에 하나를 맡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어려운 임무도 아니었으므로 사내 유일한 하급 헌터인 정헌이 혼자 하겠다고 했고.
그렇게 간 임무 지역에서 영을 보았다.
“그 여자 생긴 게 좀 특징적이긴 하잖아? 그래서 바로 알아봤지.”
높이 올려 묶은 긴 머리에 나무 봉. 정헌은 그녀를 보자마자 얼마 전 초전력에서 만났던 초능력자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영은 정헌이 잡아야 하는 변이종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투를 잠깐 지켜보던 정헌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2단치고 초능력이 너무 강했어.”
“……2단치고요?”
영은 무궁화 1단이다. 승단 심사를 받지 않았다고 했으니 여전히 1단일 터였다. 게다가 이연과 초전력에서 합을 맞췄을 때에는 딱 무궁화 1단 같은 초능력 세기였는데…….
아무튼 그녀는 몇 번 봉을 휘두르고는 가뿐하게 변이종을 없애 버렸다. 쓰러진 변이종이 가루로 변해 전부 흩날리기도 전에 영은 자리를 떴다. 두 눈 뜨고 선수를 빼앗긴 정헌은 허탈하게 웃으며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다른 2단들과 이야기를 나눠 본 결과, 포니테일을 한 여자가 하급 변이종을 무작위로 잡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유명했다. 제가 할 일을 남이 대신 해 주는 거니 일견으로는 좋아 보였지만, 문제는 영이 변이종을 반드시 처치해 버린다는 데에 있었다.
D급 임무는 보통 변이종 생포다. 그걸 전부 한발 앞서 죽여 버리니 당연히 임무를 받은 헌터들 입장은 곤란해졌다.
헌터들의 불평불만을 들어 주던 정헌은 얼결에 초전력에서 그녀를 한 번 본 적 있다는 실토를 했고, 그녀에게 이야기 좀 해 보라며 떠밀렸다. 이름도 모르는데 뭔 이야기를 해……. 황당했으나 막무가내에는 장사 없었다. 결국 회사에 D급 임무를 두어 개를 요청하는 정도로 예의를 다하기로 했다.
그리고 운 좋게도, 그 후로 얼마 되지 않아 하급 변이종을 처치하는 영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에 정헌은 영과 대화를 하려고 했다. 망나니처럼 남의 영업 방해하지 말고 네 임무를 하라고. 정헌이 보기에 그 정도 초능력이면 크게 어려울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전에, 그는 소매에 가려져 있던 영의 손목 아래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뭐가 있었는지 알아?”
“왜요, 뭔데요?”
“까만 반점.”
“……예?”
영의 팔에는 검은 반점이 얼룩덜룩하게 퍼져 있었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멍 같았기 때문에, 정헌은 영이 어떤 폭력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변이종을 처치하고 다니는 것이 그녀의 의지가 아닐 수도 있었다. 본인을 붙들고 이야기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터였다.
그래서 정헌은 영의 뒤를 밟았다.
“의외로…… 정의롭네요?”
“말이 심하다?”
그녀가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면 도와줄 생각이었다. 그런 그녀가 향한 곳이 이곳.
이연과 정헌이 있는 물류 창고 부지였다.
“자주 드나들더라고. 거의 여기서 사는 것 같던데.”
외진 곳에 있는 거대한 창고 부지. 그리고 거기에 수시로 드나드는 초능력자. 너무 수상한 상황이었다. 정헌은 휴일마다 조심스레 드나들며 이곳을 탐색했다.
평범한 물류 창고처럼 보였던 곳엔 영 같은 초능력자들이 몇 명 더 있었다. 그들은 수시로 이곳에 와서 뭔지 모를 검사를 받는 듯했고, 초능력 훈련 같은 것도 했다.
그리고 가끔 수술을 받는 것도 같았다.
“수술이요?”
“응. 피 묻은 거즈 같은 걸 버리는 걸 봤거든.”
“무슨 수술인지도 알아요?”
“음, 확실하지는 않은데 추측한 건 있어. 1단들 사이에서 수상한 소문이 도는 걸 들은 적 있거든.”
정헌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혹시 초능력 강화 실험이라고 들어 봤어?”
설마……. 이연의 낯이 굳었다.
“초전력에서 성적 좋은 1단들한테만 암암리에 해 준다는 그거요?”
“어, 알고 있네?”
“아는 1단이 말해 줬어요.”
정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래도 그게 여기와 관계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여길 드나드는 영의 초능력이 기준보다 훨씬 세진 게 가장 유력한 근거였다.
“회사에다 보고는 왜 안 했어요?”
명백하게 정헌 혼자서 처리할 수 없는 안건이다. 하지만 오른의 헌터 전력은 괜찮은 편이었고, 그쪽이 발견해서 소탕하게 된다면 회사의 큰 공이 될 텐데. 이연의 물음에 내내 태평하게 웃고 있던 정헌이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하려고 했어. 하려고 했는데…….”
여기 드나드는 초능력자들은 대부분 1단. 그들이 왜 초능력을 강화하고 싶어 하는지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본인을 제외하면 다치는 사람도 없는 것 같고, 그냥 자기 능력만 세지는 거면 굳이 신고해서 없앨 필요가 있나 싶어서…….”
강한 초능력자가 많아져서 나쁠 것은 없었다. 힘을 원하는 사람이 힘을 가지게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불법 실험이라고 하지만, 피해 보는 사람만 없다면.
그래, 피해 보는 사람만 없다면.
“아……. 진짜. 유정헌 씨 의외로 너무 착한 거 아니에요?”
이연이 제 뒷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정헌의 얼굴이 금세 삐딱해졌다.
“왜 욕하는 거 같지?”
“그렇게 희망적인 실험이면 진작에 국립 연구소로 갔겠죠. 왜 이런 허름한 데에서 이러고 있겠어요?”
누구보다도 초능력자 양성에 진심인 초능력 관리청이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이 창고의 주인이 초능력 관리청으로 가지 않은 이유에는 구린 구석이 있다고 보는 게 타당했다. 그 말에 정헌이 반박했다.
“국립 연구소가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 아마 실제로 쓸 수 있기까지는 한참 걸릴걸.”
“그래도 불법인 것보다 합법인 게 낫죠.”
“네 말은 너무 이상론이야.”
“맞아. 그건 너무 이상론이지.”
익숙한 목소리. 투닥거리며 언쟁을 벌이던 이연과 정헌의 입이 딱 다물렸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고개를 돌아보는 두 사람의 시야에 긴 머리를 묶은 여자가 비쳤다.
“……영 씨.”
이연이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한발 늦게 영의 뒤에 조용히 서 있는 조그마한 체구의 여자아이가 보였다. 초연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소녀는 마치 인형 같았다.
이연과 정헌을 바라보는 영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는데, 정헌의 말대로 긴 소매 사이로 흘끗 보이는 영의 손목 안쪽에 검은 반점 같은 게 얼핏 보였다.
“팔은 왜 그래요?”
이연의 말에 영이 감흥 없이 제 팔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가벼운 부작용.”
그녀는 원래도 덤덤한 성격이긴 했지만, 무언가 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초전력에서 만났을 때와는 다른 사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