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여기거든. 형 고글 아직 못 받았지?”
“응. 공방이 개판이 나서……. 며칠은 더 있어야 할 거야.”
D.S에게 연락이 없는 것을 보니 맡겨 둔 고글을 받는 것은 조금 기다려야 할 듯했다. 산오가 없으니 태블릿 통신기를 쓸 수도 없고……. 조금 불편하기야 하겠지만, 별다른 걸 발견하지 못했다는 혜강의 말을 생각하면 그의 힘이 미치지 않는 영역인 듯하니 큰 상관은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자료는 휴대폰으로 전송할게.”
“응.”
고개를 끄덕인 이연이 의자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혜강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조심해. 산오 형 없으니까 무리하지 말고.”
“나 원래 걔 없이도 잘했잖아.”
“이런 의뢰는 없었잖아.”
전에 김 박사에게 칼 맞은 전적이 있어서 그런가, 혜강은 이연의 의사에 따라 주면서도 영 못 미더워하는 눈치였다. 거기다 대고 나만 믿으라는 수상한 말을 할 수도 없고……. 대강 얼버무리며 가방에 미리 그려 둔 그림도 많으니 조심하겠다는 말을 거듭하자 그제야 혜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창고 부지는 아슬아슬하게 도시의 경계에 벗어나지 않을 정도의 외곽에 있었다. 오는 데에만 한참 걸렸다. 엘리베이터 보이만 있었어도…… 아니, 이제 걔 생각은 그만하자. 이연이 무의식적인 생각을 삼키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통화기 너머 혜강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거기. 보이지?]
이연이 시선을 돌려 전방을 바라보았다. 이연의 키보다 두세 배는 될 것 같은 높이의 펜스 너머, 커다란 창고가 띄엄띄엄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어찌나 넓고 창고가 많은지 바깥에서는 반대쪽 끝이 보이지도 않았다. 이연이 펜스에 바짝 붙어 조용한 내부를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사람은 없어 보이는데. 김철재 씨는 어디 있어?”
[거기 안에 있다고 나와. 내부에 CCTV가 있긴 한데, 많지는 않아. 전에 봤을 땐 보이는 게 없었는데…… 아니, 생각해 보니까 말이 안 되는데. 설마 연막인가? 권한 다시 따 볼게. 잠깐만.]
“그럼 난 일단 김철재 씨 있는 쪽으로 갈게. 위치 말해 줘.”
[71번 창고인데, 형 있는 데서 좀 멀어. 창고 외벽에 숫자 표시되어 있는 거 보이지?]
“아, 알겠다. 숫자 따라가면 되지?”
[응. 가서 없으면 다시 연락해.]
혜강과의 통화를 종료한 이연이 다시 펜스 근처를 둘러보았다. 정면 돌파를 하면 너무 요란할 테니 입구로 당당하게 들어가기는 좀 그렇고, 개구멍 같은 게 없으려나? 심각한 낯으로 두리번대는데, 등 뒤로 나직한 음성이 떨어졌다.
“정이연.”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리인데. 움찔한 이연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영 씨?”
이연이 입을 크게 벌렸다. 초전력에서 같이 협력했던 무궁화 1단, 서영이었다. 그녀는 초전력 때와 마찬가지로 천에 싼 기다란 봉을 등에 메고 있었다.
느닷없는 만남이었다. 근방은 이 창고 부지만 덜렁 떨어져 있는 허허벌판이었으니 우연히 만날 수 있을 만한 곳도 아니다. 당연히 창고 부지와 관련이 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강한 의심이 일었지만, 이연은 내색하지 않았다.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이연이 반갑다는 듯 건넨 인사에 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영 역시 수상함을 느끼고 있을 테니까.
“네가 왜 여기 있어?”
“아, 임무 할 일이 있어서 근처에 왔다가 길을 잃어서요…….”
“정연?”
“네.”
정부 연계 사업 임무를 하러 왔다는 태연한 거짓말에 그녀가 속아 넘어갔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통했기를 비는 수밖에.
“영 씨는 여기 웬일이에요? 승단 심사는 받았고요?”
“아니.”
“어, 왜요?”
이연이 의아하게 묻자, 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초전력이 끝나기 직전, 점수가 부족하다며 허망하게 중얼거리던 그녀의 모습이 뇌 한편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때 성적으로 승단 심사 받을 자격은 충분히 되었을 텐데. 당시에 든 의문이 의심과 함께 재점화되었다.
영은 헌터가 되길 원했다. 그런데 왜 아직 1단인 채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그녀가 아직 심사를 받지 않은 이유와 이곳이 강한 관련이 있을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그녀를 떠보기 위해 다시 입술을 벌린 순간, 싸늘한 목소리가 먼저 흘러나왔다.
“이 근방에서 할 만한 정연은 없어.”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이연이 경계심을 세웠다. 영이 무력으로 덤벼든다면 능력을 숨긴 상태에서는 오래 못 버틴다. 그렇다면. 이연이 가방에 있는 종이를 빠르게 가늠했다. 다행히 영의 전투 스타일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녀를 상대하는 게 큰 문제는…….
그게 이연의 패인이었다. 불시의 공격은 뒤에서 들어왔다.
등 뒤에서 짜릿한 통증과 함께 몸이 경련했다. 그의 앞에 서 있던 영의 상이 크게 휘청였으나, 이연의 시야가 흐려진 것일 뿐 그녀 자체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영이 한 것이 아니었다.
동료가 있었다니, 초전력 때도 그렇고 노상 혼자 다니는 이미지라 미처 생각을 못 했다. 누구지? 창고 부지 관련자인가? 아니면 원래 알던 동료? 습격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추측이 분분했으나, 덮쳐든 공격의 정체는 명확했다.
전기 충격기였다.
아파 죽겠네, 영화냐고……. 얼얼한 감각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힘이 빠졌다. 강렬한 고통에 소리조차 내지 못한 이연이 잠시 비틀대다 쓰러졌다. 털썩. 휴대폰이 힘없이 추락하는 것과 함께 호리호리한 몸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가물가물해지는 시야를 회복하기 위해 눈을 열심히 깜빡였으나 소용없었다.
의식이 끊기기 직전의 찰나, 이연은 고민했다. 날붙이 같은 흉기를 쓴 게 아니라 전기 충격기인 걸 보아하니 단순 기절을 의도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장 죽일 생각까지는 없을 터였다.
어차피 이연은 펜스 안쪽으로 접근해야 했다. 이렇게 아플 예정은 없었지만, 운이라면 운이다.
기절한 이연을 여기서 멀리 떨어진 곳에 버려도 원점이고, 혹시 조사나 심문을 위해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면 잘된 일이었다. 밑져야 본전이지. 이연은 손에 힘을 풀었다. 의식이 급속도로 멀어졌다. 길바닥으로 떨어진 시야에 영이 신은 운동화가 보였다.
“내가 전부 확인했거든.”
전부 확인했다니, 무슨 뜻이지? 이연은 그런 의문을 떠올렸지만, 온몸으로 경직이 퍼져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이연을 전기 충격기로 찌른 자의 손길에 의해 메고 있던 가방이 차례로 바닥에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아, 내 가방 버리면 안 되는데……. 그 말도 물론 실제로 할 수는 없었다. 곧이어 어깨를 짚는 손길과 함께 익숙하다면 익숙한 부유감이 몸을 덮쳤다.
그 후로는 암전이었다.
똑…… 똑…… 똑…….
아주 작은 소리가 간격을 두고 반복해서 들린다는 사실을 인식한 건 어느 순간부터였다.
꿈이라도 헤매는 것처럼 멍하던 감각이 서서히 또렷해졌다. 끊일 듯 끊이지 않던 소리가 물방울이 떨어져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라는 것까지 깨달은 찰나, 이연은 정신을 차렸다.
‘야……. 여기 준법 국가 맞아?’
아무리 외진 곳이라고 해도 그렇지 전기 충격기로 기절시켜 납치라니, 무법 지대와 다를 게 없었다. 이연은 아직도 쓰라림이 느껴지는 등을 이리저리 비틀다가 제가 두 팔이 뒤로 돌려져 묶인 상태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어찌나 꽁꽁 묶어 놨는지 얼얼하기까지 했다.
휴대폰은 남아 있나? 이연은 주머니를 확인하기 위해 열심히 몸을 꿈틀댔지만 묵직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 할부금. 망했네……. 하얀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어슴푸레한 빛에 익숙해진 눈이 점점 시야를 밝혔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철로 된 벽이었다. 아마도 부지에 있던 창고 중 하나일 터였다. 다행히 일이 잘 풀렸다. 영이 창고 부지에 드나들 수 있는 어떤 조직의 소속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아니, 다행이라고 할 수는 없지.’
영 씨는 왜 하필 이런 곳에. 이연이 인상을 찡그렸다. 김 박사가 여기에 있는 것이 맞다면, 건실한 행위가 벌어지는 장소는 아닐 터였다. 무뚝뚝하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간 영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궁금증이 절로 들었다.
그를 납치한 사람은 최소 두 명. 나머지 한 사람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기절 직전 느껴진 부유감의 정체는 모를 수가 없었다. 순간 이동 시의 감각이다.
‘잠깐만……. 순간 이동 능력자와 영 씨?’
D.S의 공방을 습격했던 괴한들의 능력 조합과 그가 방금 마주한 능력 조합이 같다는 사실이 제발 우연이기를 바랐다. 영의 능력은 3단 이상이라고 하기엔 큰 무리가 있긴 했으니 아직까지 희망의 여지는 있지만……. 이연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마저 둘러보았다.
뭔지 모를 박스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사이, 제법 널찍한 빈공간에 진료 침대 같은 것을 놓고 이연의 팔다리를 묶어 놓았다. 주변에 여러 개의 트롤리와 모니터, 서류들이 즐비했다.
‘아, 잠깐만…….’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이다. 설마 여기에 모르포가 있지는 않겠지만, 상황을 지켜보려던 계획이 싹 지워졌다.
창고 내의 사람이라곤 이연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납치까지 해 놓고는 버려둔 거야? 푸대접에 어이가 없었다. 이연은 눈알을 굴리다가 대뜸 소리쳤다.
“살려 주세요! 누구 없어요?”
외침이 웅웅대며 울렸다. 몇 초인가 지나도 인기척이 없었다. 진짜 아무도 없는 모양이다.
곧이어 하얀 알갱이가 모이며 묶인 손 옆 공간에 날붙이가 박혔다. 평범한 가죽끈으로 만들어진 밧줄은 금세 끊겼다.
이런 악몽은 몇 번이나 꿨다. 그때마다 온갖 발악을 했던 게 도움이 됐다.
“별일을 다 겪네.”
이연이 몸을 일으켜 손목을 문질렀다. 날붙이를 뽑아내 발을 구속하고 있던 끈까지 자른 후 침대 근처의 서류들을 살펴보니 죄다 빈칸이었다. 아마 이연의 정보를 적기 위해 가져다 둔 듯했다.
헛수고하시겠네. 이연은 몸을 돌렸다. 창고 입구로 향하는 발걸음이 경쾌했다.
그리고 박스 사이에서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던 유정헌과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