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얘네 좀 데려가.’
용건은 간결했다.
‘예?’
‘내 이름 도용했으니까 이 정도 처리는 해.’
산오가 짜증스레 제 뒤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사람을 노려보았다. 서현은 얼떨떨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중후한 여인과 삼십 대 정도의 젊은 남자. 산오와의 접점은커녕 공통분모도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은 산오가 구세주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곁에 꼭 붙어 서 있었다.
서현은 면담을 통해 그들이 산오가 불법 연구소에서 구한 또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제산이라는 회사, 그리고 그곳의 사장인 서현이 자신들과 같은 입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두 사람은 흔쾌히 입사에 지원했다. ‘산오 님’이라는 호칭도 금세 옮겨붙었다.
“그 작전에 참가한 사람이 제산오 혼자는 아니지 않아요?”
이연이 의아하게 물었다. 당시 그는 뉴스로만 소식을 접해서 정확히는 몰랐지만, 초능력 관리청에서 대대적으로 인력을 모아 한 일이라고 들었다. 산오 말고도 많은 헌터가 참여했을 텐데, 산오에게만 그런 사람이 줄줄이 나타났다는 게 희한했다.
“산오 님이 참여하지 않으신 건도 많다고 듣긴 했습니다만, 다른 분들의 사정은 잘 모릅니다.”
서현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저는 그냥 산오 님을 만났을 뿐이에요.”
그런 일이 이후에도 한 번, 두 번……. 잊을 만하면 계속 이어졌다. 산오는 한참을 잠잠하다가 대뜸 제산 앞에 사람을 버리고 갔고, 서현은 그 사람들을 열심히 주웠다. 종찬과 종희 역시 그런 사례였다.
산오가 구한 사람 중에는 초능력자도, 비초능력자도, 남자도, 여자도, 어린아이도, 노인도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가리지 않았고, 평등하게 모두를 귀찮아했다. 감사 인사를 받을 때마다 그는 찡그린 얼굴로 무시했으며, 뭐라도 말을 붙이고 싶어 잡담이라도 할라치면 방해하지 말라고 짜증을 냈다.
그리고 왜 구했냐는 물음에는 언제나 같은 답을 했다.
‘그냥.’
회사는 점점 덩치를 불렸다. 서현의 경영 능력이 초능력보다 우수했다는 기적적인 우연으로, 제산은 금세 도시 제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회사가 안정적인 궤도로 들어서자, 서현은 산오를 위한 전담팀을 만들었다. 박 터지는 경쟁 사이에서 가장 열렬한 지원자 둘이 선정되었다.
제 비서라고 소개한 사람들을 본 산오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심드렁했다.
‘필요 없어.’
‘편하실걸요. 귀찮아하시는 부분을 전부 처리해 줄 겁니다.’
그쯤, 서현은 산오와 그럭저럭 이야기가 가능한 수준으로 발전되어 있었다. 처음에 만났을 때와 달리 능구렁이처럼 변한 서현을 향해 인상을 찡그리던 산오는 곧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떠났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그러니까, 여기가 제산오 스토커 모임인 게……”
“스토커 모임이라뇨. 그냥 동경하는 겁니다.”
칼같이 돌아온 서현의 반박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지만, 이연은 대답 없이 멍하니 곱씹었다. 제산이 산오가 만든 회사가 아니라, 산오에게 구해진 사람들이 만든 회사였다니.
그건 정말, 정말로…… 대단했다.
같은 기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제 처지와 비교되어서, 그는 조금 창피해졌다. 비슷한 힘, 어쩌면 그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도 이연은 그저 세월을 허비했다. 이연이 거짓말투성이인 삶을 사는 동안, 산오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구하며 도시를 지키고 있었다.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제야 처음 만났을 때의 종찬이 왜 그렇게 적대적이었는지 이해했다. 그가 보기에는 산오의 행동반경을 이연이 제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을 테니까. 실제로 산오는 이연의 일을 도와준답시고 원래 해 오던 일정을 전부 소화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이연 씨.”
이연의 고개를 들게 한 건 나직한 서현의 목소리였다.
“저희는 산오 님을 몇 년 동안 알았습니다.”
자주 만나지는 않았지만, 서현은 그를 몇 번이나 봤다. 산오의 일상을 파악하는 데에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특히 열성적인 인간 둘 덕분에 산오가 직접 말해 준 것보다 더 많은 정보도 알고 있었고.
“그런데 산오 님이 그런 나날을 보내시는 건 처음 봤습니다.”
서현이 본 산오는 늘 기계적으로 살았다. 먹을 때가 되어서 먹고, 잘 때가 되어서 자고. 아니, 어쩔 때는 잠도 자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것보다는 살아야 하니까 마지못해 하는 느낌이 강했다. 아마 틀린 추측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연과 함께 있는 산오는 커피도 마시고, 요리도 하고, 휴가도, 산책도, 놀이공원도 갔다. 시종일관 심드렁한 얼굴로도 산오는 이연을 졸졸 따라다니며 모든 것을 같이 하려고 들었다. 그리고 가끔 웃었다.
서현은 처음으로 산오가 제 나이처럼 보였다.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서현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종희 역시 함께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니. 저도 한 게 없으니 이럴 필요는……. 정중한 감사에 놀란 이연이 손을 내젓다가 멀뚱히 앉아 있던 종찬과 눈이 마주쳤다.
“……뭐. 난 저렇게까지 안 할 거거든? 그냥, 그냥 고맙다고만 하면 되잖아.”
종찬은 금세 고개를 돌리고 웅얼거렸다. 툴툴대는 것처럼 보였지만, 머쓱함으로 포장되어 있는 인사의 알맹이는 틀림없이 진심이었다.
산오가 잘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었다. 그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무겁게 밀려와 이연에게 닿았다.
그래서 차마 말하지 못했다.
이 사람들은 이연과 산오가 함께 다니는 것이 산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솔직히 기계처럼 살았다는 것도 별로 상상이 안 되고……. 뭐, 도시의 영웅이니 열심히 일하긴 했을 터였다.
어쩌다 보니 같이 지내게 됐고, 생각보다 친해져서, 생각보다 더 좋아지기는 했으나, 그건 이연의 사정이고. 산오에게 이연은 불쾌한 과거의 열쇠에 불과했다.
이연은 산오에게 가해진 학대 같은 실험을 도와준 핵심 조력자인 데다 심지어 주동자는 그의 삼촌이다. 당시에 아무리 몰랐다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연이 얄팍한 영웅심에 취해 놀이처럼 연구소를 쏘다닐 동안 산오는 재앙에 가까운 고통을 겪었다.
그에게는 차고 넘치는 악몽이다.
이연은 처음부터 제 행동이 날씨가 궂은 날 비를 피하게 해 준 어느 행인의 선의 정도로만 스쳐 지나갔으면 했다. 산오가 저와 다시 엮이지 않기를 바랐다. 그 시절의 끔찍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기를 바랐다. 과거는 잊고 현재를 살아가기를 바랐다.
설령 그런 과거가 없었더라도, 두 사람의 현재 위치가 다른 것은 마찬가지였다.
탄탄하게 자리를 잡은 산오의 입장에서 보면 이연이 얼마나 한심했을까. 그토록 강한 힘을 가지고도 그저 하루하루 사는 것에만 급급해하는 모습이 보잘것없어 보였을 터였다. 그 사실 역시 이연을 움츠러들게 했다. 이연은 산오처럼 될 수 없었다. 언제고 굳건하게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말로 방해가 되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서현의 이야기를 들으니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무궁화 5단에, 랭킹 1위에, 산오가 구해 낸 사람들이 만든 번듯한 회사. 산오에게는 이미 찬란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구질구질한 과거는 털어 낼 수 있으면 당연히 털어 내야 했다.
“…….”
이해는 하지만 입맛이 썼다. 이연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쳐졌다. 혼자 남겨지는 것은 익숙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문득 심장 안쪽이 찌릿하게 아팠다.
서현은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며 필요하면 제산의 이름으로 지원도 약속하겠다고 했다. 아마 이연이 그런 걸 쓸 일은 없겠지만……. 그러고 보니 슬슬 카드도 돌려줘야겠지. 마무리 준비 할 생각 하니 괜히 쓸쓸해졌다. 제산을 나온 이연은 터덜터덜 차금으로 향했다.
“나 왔어.”
딸랑. 혹시나 하며 들어선 차금의 사무실에는 혜강만 덩그러니 있었다. 산오가 온 지 몇 달이나 됐다고 벌써 그가 없는 자리가 허전한지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산오가 있었던 기간보다 없었던 기간이 훨씬 길다. 사실은 이게 평범한 상태였다.
“어, 형. 산오 형은?”
“몰라. 어제부터 안 들어왔어.”
“그래?”
기분이 우중충한 이연과 달리 혜강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대화를 굳이 잇지 않고 소파에 주저앉은 이연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제 와서 무언가를 해 볼 생각은 없었다. 이건 그냥 기적적인 교차점이다. 잠깐 만났던 두 개의 선이 각자의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앞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날 미래였다. 산오는 임시 아르바이트생이었을 뿐이니 이게 원래의 일상이다. 알아, 아는데.
그래도 지금 얼굴이 보고 싶었다.
이연이 주머니에 얌전히 들어가 있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이 와중에도 다짜고짜 그냥 전화하기는 어딘지 민망했다. 뭔가 용건이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제산오가 무시할 수 없는…….
‘잠깐만. 김철재 씨.’
이연의 눈이 반짝 떠졌다.
“혜강아. 우리 김철재 씨 행적 조사하기로 했지?”
“응. 근데 산오 형 있을 때 하는 게 낫지 않아?”
“아냐.”
이연이 고개를 재빨리 내저었다. 김 박사는 모르포를 알고 있었다. 그를 잡아서 모르포에 대한 정보를 얻으면, 산오와 대화할 핑계가 생긴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우리끼리 하지, 뭐.”
“뭐……. 그래.”
혜강은 곧 키보드를 두드리더니 거대한 물류 창고 부지의 지도를 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