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산오는 분명히 이연에게 은혜를 갚는다는 되도 않은 핑계를 대며, 모르포의 인분을 찾을 때까지 함께할 거라고 했다. 그리고 그 말을 지켰다. 그는 이연의 집에 눌러앉은 후부터—같이 놀러 간 휴가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외박한 적이 없었다.
‘하긴, 언제는 이유를 알았나…….’
돌이켜보면 산오의 행동은 늘 종잡을 수가 없었다. 초면에 죽일 것처럼 위협하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은혜를 갚는다고 하고, 안 그런 척하면서도 은근히 맞춰 주고, 의외로 일도 성실하게 도와주고, 정체를 고백한 후로는 다소 친절해지기까지 했다. 마치 10년 전의 시절로 되돌아간 것처럼.
그러다가 전전날에는 사귄다느니 뭐니 하는 사기극을 연출하고, 어제는 갑자기 사람을 내내 무시하더니 오늘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움직이는 건지 짐작하지도 못하겠다. 그나마 종희에게 연락은 했다니 다행이지만…….
“집에 언제 들어온다든가, 그런 건 말했어요?”
“그런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생각도 않는 것이 산오답다면 답다고 할 수 있었다. 놀라게 하고 있어. 이연이 입술을 삐죽댔다. 그럼 뭐, 오늘 내로는 오겠거니 싶었다. 산오가 밤새 어딘가를 쏘다닌 적은 없었지만, 보통 24시간 내에는 얼굴을 보이곤 했으니까.
오면 연락 좀 하고 다니라고 해야지. 무단결근이 얼마나 큰 사회의 해악인지 상사로서 설교도 좀 하고……. 초조하던 마음이 풀림에 따라 태도도 급격히 설렁설렁해졌다.
급기야 산오의 휴대폰 케이스를 묻는 질문에 큐빅 하트가 박혀 있다는 대답을 하자 사람들도 이연이 귀찮아졌다는 사실을 눈치챈 듯했다. 인상을 찌푸리며 불만을 토해 내는 사람들에게 이연은 주눅 드는 대신 나중에 한번 확인해 보세요, 따위의 대꾸로 상대방을 열받게 했다.
점점 분위기가 험악해지던 회의실은 서현이 손을 들어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어영부영 진정된 장내의 주목이 서현에게 향했다.
“얼추 궁금증이 풀리셨을 것 같으니, 정이연 씨를 괴롭히는 건 이만하십시다.”
“괴롭히다니…….”
“크흠, 그 정도는…….”
“저쪽이 대답을 제대로 하지 않잖아요. 세상에, 큐빅이라니.”
드디어 스토커 무리는 정신을 차렸는지 헛기침을 연발하며 근엄한 분위기로 변했다. 그것을 본 후에야 이연은 여기 모인 인간들이 그냥 사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일하러들 가시죠.”
서현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렇게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일어나 회의실을 나갔다. 널찍한 공간엔 금세 이연과 서현, 그리고 종찬과 종희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서현은 이연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뇨, 뭐……. 이미 겪어 본 일이라서요.”
이연이 종찬을 흘끗이며 대답하자 종찬이 발끈했다.
“뭐야? 날 왜 봐?”
서현은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들 산오 님에 대해 관심이 지대하셔서요. 소식 못 들은 지도 한참 됐고…….”
“그, 원래 다들 제산오를 이런 식으로…… 존경하나요?”
아무리 회사의 실세라고 해도 기이할 정도의 인기였다. 상사라기보다는 마치 아이돌 같았다. 아니, 대하는 모습만 보면 그것보다 좀 더 음습한 것 같기도 하고…….
“김종찬 씨와 김종희 씨가 어떻게 제산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알고 있습니까?”
“아, 네. 대충 들었어요.”
초능력 관리청이 한창 불법 연구소 소탕에 열을 올릴 시기에 산오가 앞장섰다고 했다. 그러던 중에 구출된 사람들이라고 했고.
산오의 어릴 적을 생각하면 불법 연구소에 대한 증오가 깊기도 할 것이다. 그것 때문에 산오 역시 죽을 뻔하지 않았는가.
“저도 피해자입니다.”
“……네?”
“산오 님이 구한 사람 중에, 저도 있습니다.”
아마 제가 처음일 겁니다, 하고 덧붙이는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가벼운 무게는 아니었다. 서현이 있던 연구소는 불법 연구소 소탕에 참가한 산오의 첫 번째 임무지였다.
“하지만 문서현…… 사장님은 무궁화 3단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
이해가 되지 않아 묻자, 서현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언제나 돈이 문제죠.”
한숨이 나올 정도로 흔한 이야기였다. 어느 날, 집에 들이닥친 불량배가 몇 년 전에 사라진 아버지의 차용증을 들고 왔다. 남부럽지 않을 생활을 할 정도로 강한 헌터인 서현에게도 버거울 정도의 금액이었다.
말도 안 된다고 항의하는 서현에게, 그들은 그렇다면 서현의 능력을 일정 기간 빌리는 것으로 금액을 변제해 주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일이었지만, 가솔들을 붙잡고 협박하는 데야 장사 없었다.
그렇게 끌려간 곳이 불법 연구소였다.
“정말 끝도 없이 사람을 부려 먹더군요.”
연구원들은 서현에게 늘 한계까지 초능력을 사용할 것을 요구하며 가혹한 일정으로 사람을 굴렸다. 휴식을 제대로 취하지 못해 기력이 제대로 충전되지 않으니 나중에는 1단이나 2단 수준의 아주 약한 능력밖에 쓸 수 없었고, 그걸로는 벽에 흠집을 조금 내는 것이 다였다.
결국 그는 탈출하고 싶어도 탈출할 힘이 없게 되었다. 완전히 무력해진 것이다.
“그때는 정말로 제 초능력이 다 사라진 줄 알았습니다.”
절망에 빠지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늘이 며칠인지,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감옥 같은 곳에서 하루하루 말라비틀어져 갔다. 평생 여기서 썩어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런 체념이 그를 죽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영웅이 나타났다.
그가 아무리 애써도 부술 수 없었던 축축하고 단단한 벽을 단번에 깨부숴 버리고 성큼성큼 들어온 남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서현은 꿈을 꾸는 줄 알았다. 남자가 비현실적으로 잘생겨서 더 공상처럼 느껴졌다. 잘생긴 눈매가 슬쩍 일그러지는 걸 무기력한 정신으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별안간 몸이 밧줄 같은 걸로 감싸이더니 번쩍 들렸다.
“그리고 구조되었죠.”
뒤이어 도착한 구조대원들에게 보살핌을 받으며, 서현은 간신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초능력 관리청에서 그가 갇혀 있던 불법 연구소를 적발해 소탕했다. 그 과정에서 서현은 구조되었고. 그를 구해 준 미남의 이름도 여기저기 물어봐서 겨우 알 수 있었다. 제산오. 국내 랭킹 1위인 무궁화 5단.
서현은 몸을 추스를 수 있게 되자마자 산오를 찾았다. 사실 산오의 소재를 알아내는 것도 애를 꽤 먹었다. 그의 명성에 비해 대외적 정보량은 극히 적었고, 아는 사람도 몇 없었다.
온갖 연줄을 동원해 수소문하다 간신히 당시 초능력 관리청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고, 그 길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구내식당은 넓었지만 자신을 구해 냈던 사람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은인의 앞에 선 서현은 떨리는 몸을 다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구해 줘서 고맙다고, 덕분에 살아났다고. 그러나 진심을 다해 건넨 인사에 돌아온 대꾸는 심드렁했다.
‘그딴 걸로 밥 먹는 데 방해하지 마라.’
지나치게 건성이다 못해 건방졌다. 저 덕분에 사람이 살아나든 말든 전혀 관심 없다는 태도에 서현은 당황했다. 다시 만난 산오는 도저히 당시에 서현을 구한 영웅과 동일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자기가 구한 게 서현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혹시 쌍둥이가 있는 거 아냐? 그런 얼빠진 생각을 할 정도로 괴리감이 컸다.
물론 불법 연구소 소탕은 정부에서 주관한 프로젝트였으니 단순한 선의가 아니라 임무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서현이 느끼기에 산오는 그런 수준을 넘어섰다. 그는 진심으로 서현이 죽든 말든 상관없었던 사람처럼 보였다.
아무리 자신을 구했어도 태도가 그 정도로 나쁘면 울컥하기 마련이다. 서현은 높아진 언성으로 그럼 죽어 가게 두지 왜 살렸냐고 따지듯 소리쳤다. 산오는 그런 서현을 흘끗 바라보고는 처음과 한 치도 달라지지 않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냥.’
‘…….’
‘그냥 구했다.’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 산오는 눈으로 그렇게 묻고 있었다. 짙은 색의 눈동자는 아주 고요하고 선명했다. 서현은 화가 났던 것도 잊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걔는 몇 년 전에도 똑같았네요…….”
이연이 이야기를 듣다 말고 혀를 내둘렀다. 죽다 살아난 사람 앞에서 한다는 말이 그냥이라니, 놀리는 것도 아니고……. 등짝을 한 대 맞아도 할 말 없었다. 그런 이연의 험담에 서현이 슬쩍 웃었다.
“저는 오히려 그 대답이 좋았습니다.”
“왜요?”
“그게 산오 님의 본질 같아서요.”
아무런 이유도, 대가도 없이 그냥. 그 대답은 서현의 마음속에 깊이 남았다.
“사실 저는 헌터를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감금된 이후 이제까지 자유롭게 쓰던 초능력이 막혀 버린 감각이 그에게는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더 이상 초능력을 쓰는 직업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그런데 산오를 보니 괜찮을 것 같았다.
산오처럼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말이 쉽지, 실제로 그처럼 되기는 어려웠다. 서현은 강하긴 했지만, 산오만큼 강한 건 아니었다. 산오가 하는 방식과 완전히 똑같이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서현은 회사를 세우기로 했다.
“그게 제산입니다.”
사업자 등록이 완료된 날, 서현은 산오에게 찾아가 서류를 내밀었다. ‘제산’이라고 쓰인 상호명을 본 산오의 눈매가 살벌하게 굳었다.
‘뭐야.’
서현은 이제 사나운 목소리에도 굴하지 않게 되었다. 자신만만하게 웃은 다음 선언했다.
‘두고 보십시오. 산오 님 같은 회사를 만들어 낼 테니까.’
‘이름을 냅다 도용해 놓고 별 핑계를 다 대는군.’
‘두고 보시라니까요.’
서현이 헌터 활동을 하면서 다져 놓은 인맥에 더해서, 회사 이름이 너무나 제산오를 닮아 있었기 때문에 번듯한 회사를 꾸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소규모 회사를 굴리기 시작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산오가 회사에 찾아왔다.
사람 두엇을 뒤에 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