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10. 꿈같은 현실, 현실 같은 꿈
“제산오가 납치당한 것 같습니다.”
다크서클이 한껏 짙어진 얼굴이 엄숙하게 선언하자, 널찍한 회의실에 파문이 이는 것처럼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길쭉한 책상의 좁은 면에 홀로 거리를 두고 앉은 이연이 사람들을 심각하게 둘러보았다.
어둑하던 밤이 희미한 새벽을 지나 환한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현관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제야 부랴부랴 연락한 번호는 기계가 꺼져 있다는 알림 음성만 내뱉었다. 이런 적이 없는데. 혼란에 빠진 뇌는 극단적인 결론을 도출했다.
제산오에게 분명히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날이 밝자마자 종희에게 연락해 산오의 회사, <제산>으로 온 참이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이연에게 종희가 회사로 직접 와서 사정 설명을 해 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녀가 약속을 따로 잡고 기다리라고 했어도 회사로 직접 찾아갔을 것이다. 일 분 일 초가 아까웠다. 지금 이연이 꾸물대고 있는 동안에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후다닥 제산 건물의 로비에 들어선 이연이 데스크에 대고 “정이연입니다. 김종희 씨하고 약속이 되어 있는데요.”라고 말한 순간, 상황은 놀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안내해 준 것까지야 그러려니 했다. 비록 사장 직함은 다른 사람이 달고 있어도 제산은 산오의 회사였고, 영향력 역시 어마어마할 터였다. 그런 그의 직속 비서인 종희의 손님이니 당연히 언질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연이 안내받은 곳은 커다란 회의실이었다.
심지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뭐지?’
이연이 들어서자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묘한 압박감에 잠깐 당황한 이연이 멈칫하는 사이 자리에 안내되었다.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종찬도, 종희도 아니었지만 이연이 아는 사람이었다. 개인적으로 아는 건 아니지만, TV나 기사에서 많이 봤다. 공기 밀도 조절 능력을 가진 무궁화 3단 헌터.
제산의 사장, 문서현이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정이연 씨. 할 말이 있으시다고요.”
서현은 다소 피곤한 듯 보였으나 날카로운 분위기가 전신에 맴돌았다. 바지사장이라고는 해도 제산은 대기업이다. 산오 대신 이곳을 지금까지 굴려 온 남자라면 만만하게 볼 상대는 아닐 터였다.
그러나 이연 역시 온갖 애를 태우며 밤을 샜다. 드물게 초조하고 예민한 마음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냅다 제산오 납치설을 주장한 것이다.
솔직히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제산의 회의실에 사장까지 참석해 있는 것을 보면 산오와 관련이 있는 사람만 모아 뒀겠거니 싶기도 했고……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은 종찬과 종희까지 빨리 이야기해 보라는 듯 눈빛으로 재촉하는 데에야 장사 없었다.
“납치라고요.”
서현은 진중한 낯으로 되물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근거는?”
“어젯밤 집에 안 들어왔어요.”
“산오 님은 원래 한곳에 정착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원래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분명히 뭔가 일이 생겨서 못 들어오는 게 틀림없다고요.”
이연의 항변에도 회의실의 분위기는 영 미적지근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역시…….”
……역시? 별로 좋게 들리지 않는 뉘앙스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이연이 인상을 설핏 찌푸릴 때였다.
폭탄 발언이 회의실 안에 떨어졌다.
“당신과 산오 님이 교제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예?”
갑자기 튀어나오는 개소리에 이연이 얼빠진 얼굴로 반문했다.
“엊그제 저녁, 밤꼬치에서 산오 님과의 교제를 기념하여 가게 주인 한수아 씨가 한턱 쏘셨다고.”
“…….”
그, 그건 어떻게 알았지? 순간 멈칫한 이연은 곧 정신을 차리고 항변하기 위해 급히 말을 이었다.
“아니, 그건 다 사정이……”
“역시 그게 사실이었군!”
갑자기 종찬이 벌떡 일어섰다.
“정이연!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그럴 줄 알긴 뭐가?”
덩달아 당황한 이연의 말소리가 높아졌다. 비명이라도 지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아직도 할 변명이 있어!”
버럭 소리친 종찬이 테이블을 밟고 올라가려던 순간, 그의 뒷덜미를 싸늘한 손길이 잡아챘다.
“김종찬. 진정해.”
“누나! 하지만 저 자식이!”
기시감이 느껴지는 대화로 종찬을 제압한 종희가 이연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종찬이 길길이 날뛰어서 가려졌을 뿐이지, 종희의 얼굴 역시 진지하다 못해 험악했다.
“죄송합니다만, 이에 대한 사정 설명을 먼저 들어야겠습니다.”
“꼭 여기서 해야 하나요?”
진실을 말하는 거야 전혀 상관없었으나—종찬과 종희가 혜성에게 입을 나불댈 것도 아닐 테고— 열 명은 넘는 사람들이 포진한 곳에서 밝힐 만한 주제는 아니었다. 이 사람들이 왜 여기 있는지는 몰라도 이런 게 궁금하지도 않을 거고……. 괜한 시간 낭비 시키는 건 아닌가 싶어 묻자, 종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부 관련자입니다.”
“……뭐에 관련됐는데요?”
여기 무슨 제산오 애인 모임이라도 되는 건가? 미심쩍게 좌중을 훑어보았으나 나이대가 다양한 것은 물론이고 이미 손에 결혼반지를 낀 사람도 있었다. 떨떠름한 물음에 차분한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한 걸 묻는군요.”
문득 이연은 그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한 명도 빠짐없이 올곧게 저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딴짓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종희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산오 님입니다.”
그렇게 제산의 꼭대기에서 느닷없이 정이연 청문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청문회는 ‘산오와 이연이 정말 사귀느냐’로 시작해 ‘산오는 요즘 뭘 제일 좋아하냐’에서 ‘산오의 일상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봐라’까지 흘러갔다. 이연의 답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산오에게 관심이 지대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어디서 겪어 본 상황이었다. 종찬과 종희를 한 다섯 쌍씩 복제해 놓은 것 같았다.
제산이 제산오 스토커 모임이었다니?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분위기는 점점 명절에 어르신들이 잔소리하는 것처럼 변질되기 시작했다.
“산오 님이 직접 요리를 하신다니. 손이라도 베이시면 큰일 날 텐데.”
“식칼보다 걔가 더 센데요.”
“전문 요리사를 붙여 드리는 게…….”
사람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것까지 똑같았다.
“산오 님에게 하드를 드렸다고? 그런 불량식품을!”
“침대 하나를 셋이서 쓴 건 너무하지 않나. 잠자리를 편하게 쓰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인데!”
우리 엄마 아빠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끝없는 팔불출 향연에 이연의 인내심이 드디어 끊어졌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고 제산오가 납치됐다니까요!”
산오가 식칼에 베일까 걱정하는 인간들이 납치되었다는 말에 태연하다니, 이상해도 한참 이상했다. 지금 내 앞이라고 연기하는 건가? 이연이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회의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면면히 노려보았다.
“산오 님을 납치했다고? 누가?”
“그건…….”
“그분을 납치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한가?”
“……그건…….”
이연도 산오를 해칠 만한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은 알았다. 부동의 랭킹 1위를 대체 누가 이기겠는가. 하지만 악의를 가진 인간은 늘 평범한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었고, 이연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사태로 치닫을 수 있는지 알았다.
“그 부분은 걱정 마십시오.”
이연이 우물쭈물하면서도 주장을 굽히지 않자, 청문회 내내 종찬과 함께 타자를 미친 듯이 치던 종희가 드디어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 새벽, 산오 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예?”
“산오 님께 문제는 없습니다.”
이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종희가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아는데, 믿기가 힘들었다. 동시에 묘한 배신감이 피어올랐다.
“걔가 그렇게 얘기했어요?”
“네.”
종희와는 연락을 한 것도 모자라, 안부까지 주고받았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도 잠시, 이연은 곧 이 상황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산오의 신변에 문제는 없다. 타인에게 연락할 여유도 있었다.
그럼 산오는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이 아니라 제 발로 안 들어온 것이다.
‘……그랬구나.’
산오가 무사하다니 분명히 다행인 일인데, 어쩐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별일이 없었다니, 그럼, 그럼, ……왜 안 들어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