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클럽 건과 연결된 건지는 모르겠고, 하급 초능력자 다수가 드나든다는 보고가 있어. 아무래도 초능력자들을 상대로 하는 것 같다.”
몇 년 전의 불법 연구소 소탕에 앞장섰던 희수와 산오는 그 후로도 가끔 이런 식으로 공조하곤 했다. 대부분의 일에 비협조적인 산오도 불법 연구소 건에 한해서는 순순했다.
최근 들어서는 방심하고 있었지만, 클럽 연구소 사건으로 희수는 다시 이쪽을 예의 주시하는 중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놈들은 잘라 내도 잘라 내도 뿌리 뽑히지가 않는다. 진저리가 났지만 당연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부수는 건 상관없지만, 주동자는 이쪽으로 보내.”
그 말로 마무리하려던 희수는 잠깐 망설이다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쪽이 초관청이랑 관련되었다는 자료가 있다면 그것도.”
*
희수와의 면담이 끝난 후, 이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초능력 관리청을 나왔다. 생각해 보면 별일도 아닌데 워낙 오래 애를 태우다 만나니 마치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마음이 시원했다. 이게 만약 희수가 의도한 거라면 밀당의 고수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밖에 나온 김에 D.S에게 들러 보석까지 받아 갈 생각이다. 클럽 연구소에서 망가트린 고글도 아직 안 고쳤고……. 고글을 만질 때마다 거칠게 뜯긴 연결잭 부분이 걸리던 참이었다. 하필 인장 부분이 노출된 걸 알면 좀 혼나겠지만 어쩔 수 없지. 몇 주가 넘어서야 굳게 마음을 먹은 이연이 발걸음을 돌렸다.
D.S의 공방은 초능력 관리청에서 조금 거리가 있었다. 지하철만 탔을 뿐인데 벌써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도착하면 저녁 시간이 다 될 것 같아, 이연은 D.S에게 전화를 걸었다. 뇌물도 줄 겸, 저녁 거리를 좀 사 들고 갈 심산이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D.S 씨?”
D.S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심드렁했다. 그런데 전화기 너머로 바람 소리가 조금 들려서, 이연이 조금 당황해 물었다.
“밖이에요?”
[어. 지금 공방 들어가는 중.]
“아, 다행이다. 저도 지금 공방 좀 가려고요.”
[어딘데?]
“거의 다 왔어요. 편의점 방금 지났어요. 저녁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사 갈게요.”
[그냥 가서 시켜. 근처에 먹을 거 없어.]
쿨한 태도였다. 배달이 편하면 배달이 낫지. 문명의 이기에 길들여진 이연이 냉큼 고개를 주억였다.
[나도 거기 근처인데. 아……. 보인다.]
보인다고? 이연이 시선을 들어 주변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곧 훤칠한 키의 여자가 기력 없이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D.S 씨!”
전화를 끊고 달려갔다. D.S는 가방도 없이 간편한 차림새였다. 가볍게 나갔다 돌아오는 길인 듯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합류해 공방으로 함께 향했다.
“웬일이야?”
“아, 전에 맡긴 보석 있죠? 수빈 누나 쓰러졌을 때 제가 드렸던 거.”
“어어.”
“그거 국장님이 분석해 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그래, 그럼.”
D.S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였다. 죄를 고백하기에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저 고글 수리 좀 맡기려고요.”
“고장 났어?”
“아뇨, 전에 의뢰하다가 좀 뭐가 뜯겨서…….”
“뜯겼다고?”
D.S의 눈매가 금세 날카로워졌다. 아직 적절한 때가 아닌가 보다. 이연이 우물쭈물하며 고글을 돌려 연결잭이 뜯긴 부분을 D.S의 시야에서 슬쩍 가렸다.
“그…… 그런 게 있어요. 공방 가서 보여 드릴게요.”
“할 말은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데.”
예리한 지적에도 이연은 꿋꿋하게 모르쇠로 일관했다. D.S는 어차피 들통날 헛된 반항이라고 여겼는지 가소롭다는 듯 웃고는 순순히 넘어갔다.
“웬일로 걔가 없냐?”
D.S가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는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요즘 내내 같이 다녔으니 주변인들에게 세트로 인식된 것 같았다.
그녀는 산오의 이름을 알게 된 후에도 직접적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다. 나름대로의 비밀 유지 방법이었다.
“걔랑 저랑 한 몸도 아닌데 따로 다닐 수도 있죠…….”
“싸웠어?”
대뜸 나오는 물음에 이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만나는 사람마다 전부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차라리 싸웠으면 이야기가 쉬웠을 것이다. 적어도 이연이 한 말에 화가 났다는 거니까.
그런데 이건 뭐가 문제인 건지 알 수도 없고…… 볼 수가 없으니 물을 수도 없고……. 내내 얹힌 듯 답답했던 속은 얼결에 하소연처럼 흘러나왔다.
“싸운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무시당하는 거예요. 완전 투명인간 취급이라고요.”
“짐작 가는 거 없어?”
“……전날 술을 마시긴 했는데……. 그래도 큰 실수는 안 했을걸요.”
실수했으면 혜강이 슬쩍 말해 줬을 터였다. 그러나 그가 아무 말 없는 걸로 봐서 그런 종류도 아니었다.
“말을 해 줘야 알지…….”
낮게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부루퉁했다. D.S는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 걔 좋아하냐?”
“예?”
이연이 고개를 휙 돌려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무 놀라서 삑사리가 다 났다.
“무, 무슨 소리예요?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봐요?”
“아니, 연애 고민같이 말했잖아.”
“D.S 씨, 많이 피곤하면 오늘은 일찍 공방 닫아요.”
“까불지.”
D.S가 쓰읍, 하고 눈을 부라리자 이연은 손까지 내저어 가며 극구 부인했다. 제산오를 좋아하다니? 제가? 꿈에 나올까 두려운 상상이었다.
“이게 왜 연애 고민이에요? D.S 씨는 친구한테 갑자기 무시당한 경험 없어요?”
“보통 내가 무시하는 역할이었어.”
“뭐! 왜요?”
이연이 걸음까지 멈춰 서며 물었다. 마치 D.S에게 무시당한 게 저인 것처럼 격렬한 반응이었다.
“왜긴……. 상대하기 짜증 나니까 그렇지.”
“……짜증 나요?”
D.S에게 친구랍시고 접근한 사람의 대다수는 그녀의 집안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슬금슬금 다가왔다. 말끝마다 가문을 들먹이는 것에 신물이 날 정도였다.
그렇지 않은 소수의 인물 역시 집안 교류로 맺어진 것은 마찬가지고 사적인 이야기를 할 정도로 친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집을 나온 이후로는 연락할 이유도 사라졌다. D.S가 제대로 인간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공방을 차리고 난 이후였다.
D.S는 그런 것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대신, 한마디로 압축했다.
“그냥 뭐, 어느 순간 환멸이 나더라고.”
“그럴 수도 있어요?”
이연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딘지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사람 마음이 늘 네가 이해되는 방향으로 흐르는 건 아니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마지못해 대답하면서도 수긍하기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D.S는 확신하며 다시 발걸음을 뗐다.
“야, 그냥 고백해.”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요!”
“퍽이나.”
아무래도 D.S의 화법에 말려든 것 같았다. 이대로는 가는 내내 비슷한 이야기만 듣게 될 것이라는 본능이 머리를 쳐들어서, 이연은 억지로 화제를 돌렸다.
“저녁으로는 뭐 먹을래요? 제가 살게요.”
잔뜩 호들갑을 떨자, D.S는 뜸 들이듯 이연을 잠깐 훑다가 휴대폰을 켰다. 관대하게 넘어가 주겠다는 태도였다. 그렇게 시작된 메뉴 토론은 점점 열기를 띠고 공방 바로 앞에 도달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럼 막창은 시키지 마?”
“아, 그건 또 아쉬운데…….”
“곱창에 국수에 염통까지 넣었잖아. 순대볶음이랑 막창 둘 중 하나 골라.”
“둘 다 시키면 안 돼요? 제가 다 먹을게요.”
“넌 어디서 온 돼지야?”
투덜대며 내려 두었던 공방의 셔터를 잡은 손이 움칠 떨렸다. 의아하다는 D.S의 기색에 함께 대화하던 이연의 시선 역시 그녀가 잡고 있던 셔터를 향했다.
“왜 그래요?”
“……차가워.”
입구를 전부 막고 있던 셔터가 얼음장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차가웠다.
날이 어두워져서 기온이 조금 내려갔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여름밤이다. 쇠가 차가워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부자연스러운 현상은 불길한 직감을 불러왔다. D.S가 급히 셔터를 올렸다. 드르륵,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공방의 문이 열렸다. 나가기 전에 켜 두었던 등이 공방 안을 희미하게 밝힌 덕에,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불빛이 보여 주는 광경은 처참했다.
서랍장과 캐비닛은 죄다 열려 있었고, 급하게 안을 뒤진 흔적이 역력했다. 안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을 부품과 도구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구르고 있었다. 정비 중이었던 기계들 역시 엉망으로 뒤섞여 책상 위에 널브러졌다.
명백한 무단 침입이었다.
그녀가 자리를 비운 것은 고작 10분 정도. 그사이에 이렇게까지 뒤졌다면 멀리 가지는 못했을 터였다. 공방 내부를 확인한 이연이 심각한 낯으로 다가와 모니터를 함께 들여다보았다.
“짐작 가는 사람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