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107화 (106/250)

#107

“아, 나중에 김철재 씨 위치 좀 같이 봐 줘. 형이 직접 조사를 좀 해야 할 것 같아.”

“알았어.”

이연은 평소처럼 가방과 고글을 둘러메고 사무실을 나섰다. 이렇게 된 거 오늘에야말로 국장님을 만나고 말겠다. 쓸데없는 방향으로 의욕이 튀었다.

요즘 하도 초관청을 많이 갔더니 이제는 제집 같았다. 심지어 경비마저 이연의 얼굴을 외운 듯 익숙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맞인사를 하며 변이종대응국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거침없었다.

복도에 들어서자 국장실 앞에 붙은 비서 책상이 보였다. 이연을 발견한 비서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저 비서도 하도 자주 봐서 이제 낯이 익었다.

“국장님 계시죠? 오늘은 진짜 만나고 싶거든요.”

당황한 낯의 비서가 막 입을 열었다. 보류하기 위한 말을 하려는 게 뻔했다.

저 말에 열 번은 더 당했다. 이연이 선수 치듯 물었다.

“안에 손님 계세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공무가 바쁘셔서…….”

“비서님, 저도 바쁜 몸인데 자꾸 이러시면 곤란해요. 국장님이 저에 대해서 하신 말씀 없으세요?”

눈치로 보아 비서도 희수가 이연에게 비밀리에 의뢰를 맡겼다는 사실 정도는 아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강하게 쫓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겠지.

혼자서 일하고 있다면 잠깐 들어갔다 나와도 괜찮은 일 아니겠는가. 이연이 용건만 간단히 하고 나올게요, 하고 빙긋 웃고 몸을 돌렸다.

똑똑.

“국장님, 정이연입니다. 들어갈게요.”

비서가 미처 막을 새도 없이 달칵, 하고 문이 열렸다. 웃는 낯으로 문고리를 돌린 이연이 보이는 방 안 풍경에 눈을 깜빡였다.

희수는 책상이 아니라 응접용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커피잔이 놓여 있었고, 조금 마신 듯 반쯤 비어 있었다. 테이블에는 오만가지 서류가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그리고 희수의 앞에도 커피잔이 하나 더 놓여 있었다. 손도 대지 않은 것처럼 조금도 줄지 않은 새하얀 잔은 누가 봐도 주인이 따로 있었다.

그냥 보기에는 손님이 올 예정이라 준비를 해 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희수의 커피가 줄어 있는 것도 그렇고…… 맞은편 자리는 마치 누가 이미 앉았던 것처럼 움푹 패어 있었다.

“손님이 왔다 가셨나 봐요.”

“……정이연 씨.”

놀란 얼굴의 희수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이연이 눈매를 조금 좁혔다. 단순히 사람이 문을 막 열고 들어와서 놀란 게 아닌 것 같은데…….

“여긴 어쩐 일입니까?”

“진심으로 묻는 건 아니죠?”

기껏 한다는 질문이 그런 거라니, 기가 막혔다. 사람을 그렇게 수도 없이 바람맞혀 놓고! 어이없다는 기색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났는지 희수가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말씀하세요.”

“김철재 씨가 요즘 움직이고 있답니다. 아직 명확하게 목적이 드러난 건 아니라 조만간 쫓아가 보려고요.”

“김 박사가…….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의뢰에 필요한 부분인데.”

이연의 말에 희수가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이세미 씨가 팔찌의 보석을 어디서 얻었는지 알아내셨나요?”

“……그런 정보가 왜 필요합니까?”

희수의 눈에 희미한 경계가 드러났다. 이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조사 안 하셨어요?”

“진행 중에 있습니다. 다만 절차가…….”

흐지부지한 말을 단호한 목소리가 갈랐다.

“이세미 씨가 만든 팔찌의 보석은 김철재 씨가 있던 클럽 연구소에도 있던 겁니다.”

생각지도 못한 내용일 터였다. 내내 곤란한 기색을 띠던 눈이 한껏 벌어졌다.

“김철재 씨와 이세미 씨 사이에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걸 왜 이제…….”

“만나 줘야 말을 하죠.”

“…….”

희수의 입을 다물게 만든 이연이 씩 웃었다.

“국장님, 저는 이제 와서 조사를 접을 생각이 없어요.”

설령 희수가 의뢰를 취소하더라도, 이연은 이 불법 연구를 어떻게든 뿌리 뽑을 계획이었다. 클럽 연구소 하나로 깔끔하게 끝날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지만, 질이 나빠도 너무 나빴다.

게다가 모르포와 관련되어 있기까지.

산오는 모르포와 접촉하기를 원했다. 이연이 그것을 돕기로 한 이상, 이쪽을 계속 파고드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뭐, 공권력으로 안 되면 때려 부수기라도 하든가……. 방법은 많았다. 이연은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이 있었고, 굳이 쓰지 않을 이유도 없다.

“저도 그렇습니다.”

조금 전의 이연만큼이나 단호한 목소리였다. 결연한 눈동자가 부딪히듯이 마주했다.

“여기서 물러날 생각은 없습니다.”

팽팽한 공기가 흘렀다. 가볍게 한숨을 쉰 이연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안심이 되네요.”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긴 하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희수가 물었다.

“혹시 클럽 연구소의 보석, 저도 볼 수 있습니까?”

“D.S 씨 공방에 맡겨 뒀는데, 가져올게요.”

“네. 저희 쪽에서도 분석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D.S에게 맡기긴 했지만, 그녀의 전문 분야가 아니다 보니 보석에 관련한 정보를 세세히 알아낼 수는 없었다. 오히려 문외한에 가까웠을 부문—기력 강제 채취 및 정제—임에도 그렇게까지 알아낸 게 대단했다. D.S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이 희수 쪽에 있다면 환영이었다. 이연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이세미를 정식으로 심문할 수 있을 겁니다. 정보가 나온다면 다시 뵙죠.”

희수의 마무리로 대화가 끝났다. 여기까지 5분도 채 안 걸렸다.

“진작 이렇게 대화했으면 얼마나 좋아요?”

왜 그렇게 시간을 끈 건지도 모르겠다. 이연이 투덜거리자 희수가 조금 망설이다 대답했다.

“조금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요. 신중을 기하고 있었습니다.”

“뭐……. 그래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이연은 그럼 전 갈게요, 하고 고개를 까딱이고는 돌아섰다. 희수가 일어나며 문 너머로 사라지는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침묵이 흘렀다.

“……이제 나와.”

스륵. 그 말과 함께 소파 아래에서 까만 철심들이 솟아올랐다. 단단한 철심들은 촘촘하게 엮여 곧 앉아 있는 사람의 형체로 변했다. 조금 전에 가죽이 눌려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네가 다른 사람을 피할 때도 다 있군.”

의외롭다는 희수의 말에 산오가 허리를 젖혀 몸을 등받이에 깊게 기댔다.

“피하는 거 아니야.”

“아니긴.”

문밖에서 ‘정이연입니다’라는 소리 들리자마자 사라진 놈이 말은 잘한다. 희수가 뻔뻔한 주장을 고수하는 산오를 황당하게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아침부터 난데없이 남의 사무실에 쳐들어와서 시종일관 뚱한 얼굴로 입만 다물고 있길래 대체 뭔 일인가 싶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어, 커피까지 직접 내려서 마주 보고 사무를 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 이연이 방문했다는 걸 안 순간 산오는 순식간에 바닥 속으로 스며들었다. 능력 중 하나인 광물 동기화였다.

어디서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살던 놈이 무려 누군가를 피하다니. 희수에게 산오는 늘 무뚝뚝한 꼬맹이였기 때문에, 이런 새로운 면이 퍽 재밌었다. 살다 보니 별걸 다 본다는 기분에 가까웠다.

“싸워서 그래?”

말투가 미래를 대하는 것과 비슷해졌다는 걸 알아챈 산오가 짜증스레 희수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가 어렸을 때부터 무수히 비슷한 눈빛을 받아 왔던 희수는 눈썹 한 올도 까딱하지 않았다.

“같이 산다며. 평생 피할 순 없을 텐데.”

“평생 그럴 생각 없어.”

“그래, 피하는 거 맞네.”

산오의 눈빛에 살기가 섞여들었다. 희수는 그쯤에서 물러섰다.

“아니면 말고.”

희수가 읽고 있던 서류를 집어 들고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사무실은 곧 팔락거리며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침묵 속에 한참 잠겨 있어도 찌푸린 미간은 돌아올 줄을 몰랐다. 어제부터 솟은 짜증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정이연의 이상형이라는 짜증 나는 놈과 맹하게 웃던 멍청한 낯짝. 맛있는 밥만 사 주면 어디든 팔랑팔랑 따라갈 것 같은 허약한 몸뚱이. 그런 것들이 산오의 뇌에 깊게 박혀서 틈만 나면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연이 왜 그러는지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경질이 안 나는 건 아니었다.

그딴 게 감히.

정이연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안 후부터 산오는 다양한 계획을 세웠지만 그중 그따위 천인공노할 발상은 없었다. 산오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피부에 오돌토돌한 쇠 비늘이 돋는 걸 슬쩍 본 희수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뒤늦은 사춘기라도 겪고 있는 모양이다.

산오의 흉악한 시선이 풀릴 기미가 없자 희수는 보고 있던 서류를 건넸다.

“기운 남아돌면 여기나 다녀와.”

“내가 왜.”

“불법 연구소 제보가 하나 들어왔어.”

말없이 치켜든 눈썹이 종이를 받아 들었다. 희수의 말이 이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