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아니……. 이게 왜 비슷하지?”
혜강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수아는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가는 얼굴로 혜성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문의영광굴비와 혜강은 별로 닮지 않았다. 굳이 분류를 따지면 이목구비가 섬세하다는 점이 비슷한 정도. 가문의영광굴비는 선이 가늘고 우아한 커스터마이징이었지, 혜강처럼 귀여운 면이 강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 미묘한 격차를 혜성의 얼굴이 기가 막히게 채워 주었다.
“이거 무슨…… 이 굴비는 누구?”
수아가 문장도 제대로 끝맺지 못하며 인사했다. 목소리가 어째 좀 몽롱하기까지 했다. 이연이 큼, 하고 헛기침을 하며 소개했다.
“이쪽은 이혜성 씨예요. 혜강이 형. 유명한 헌터인데 모르세요?”
“제가 헌터 쪽은 관심 없어서…… 혜강이 형이시라고요?”
반사적으로 대답하다 말고 고개를 휙 돌린 수아가 혜강을 바라보았다. 강렬한 시선에 움찔한 혜강이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왜 그러시죠?”
혜성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혜강이 껴 있지 않으면 보통은 멀쩡하게 구는 듯했다. 하긴, 거리에서 만났을 때도 처음에는 정중하게 말을 걸어오긴 했다.
그의 질문에 수아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곧 능숙하게 서비스직 가면을 뒤집어썼다.
“아, 여기 앉으세요. 제가 아는 분이랑 닮아서 오래 세워 뒀네요.”
영업적 미소를 띠고 고개를 까딱이는 모습이 평소처럼 살갑고 우아했다.
그러나 네 사람을 전부 바에 줄줄이 앉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저는 혜강이 친한 누나인 한수아라고 해요.”
……아니, 고의인가?
자리는 산오, 이연, 혜성, 혜강 순이었다. 혜성이 자리에 앉자 수아는 냉큼 웃으며 그 앞에 섰다. 여기 단골이 된 지 오래됐지만, 수아가 이렇게 적극적인 건 처음 봤다. 이연과 혜강이 어리벙벙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산오만 시큰둥하게 물을 들이켤 뿐이었다.
“그래서, 혜성 씨는 당분간은 쉬시려고요?”
“그렇죠. 5년을 꼬박 일했는데 그래도 일이 주 정도는 가만히 놔두지 않을까요.”
“꼴랑 그 정도요? 한 달은 쉬어야죠!”
“하하, 불러 줄 때 바짝 벌어 놔야죠.”
수아는 곧 혜성과 친해졌다. 그녀가 산오와는 아직도 크게 친해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면 대단한 속도였다.—산오의 경우는 본인 성격의 문제도 있긴 하다.—
“굴비가 뭐예요?”
그녀가 잠깐 음식을 하러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혜성이 이연에게 소곤대며 물어 왔다. 그를 보자마자 굴비라는 단어를 열 번은 넘게 말했으니 궁금할 만했다.
“수아 씨 이상형이에요.”
“어머, 이연 씨. 그게 나만의 이상형은 아니잖아요.”
몇 걸음 떨어져 있던 수아가 용케 듣고 야유했다.
“굴비는 따지자면 이연 씨가 만든 거니 이연 씨 이상형 아니에요? 저는 그냥 팬일 뿐이라고요.”
“아니, 뭐. 제 이상형일 것까지는…….”
이연이 떨떠름하게 부정하자 수아가 오히려 당연하지 않냐는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좋아하는 얼굴로 커마해서 굴비가 나온 거잖아요. 그때 혜성 씨 얼굴을 노리고 커마한 거예요?”
“아뇨, 그때야…… 그런 거 신경 안 썼죠.”
“거봐요, 이상형 맞네. 혜성 씨 보니까 정말 굴비가 현실에 나온 것 같지 않아요?”
“그거야…….”
그런가? 혜성의 얼굴은 기본적으로 혜강과 많이 닮았기 때문에 척 보자마자 가문의영광굴비가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수아의 이야기를 듣고 찬찬히 살펴보니 혜성과 가문의영광굴비는 전체적인 느낌이 흡사했다. 수아가 혜성을 보자마자 돌처럼 굳어서 멍하니 넋을 놓았던 게 이해가 됐다.
그냥 게임 캐릭터 커스터마이징 했는데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현실에 있다니 좀 신기하기도 하고. 아니, 굳이 따지면 혜성 씨가 가문의영광굴비보다 먼저 태어나시긴 했지만…….
“……굴비?”
그때, 어딘지 음산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옆을 돌아보니 산오가 이연을 노려보고 있었다.
“왜, 왜?”
이유도 모르고 기세에 눌린 이연이 말을 더듬었다.
“굴비가 뭔데.”
“이연이 형이 만든 게임 캐릭터예요. 전에 같이 게임했거든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혜강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대답을 들었음에도 산오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이연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여차하면 시선으로 뚫어 버릴 기세였다.
“자, 혜성 씨가 무사히 귀환한 기념으로 제가 한잔 쏠게요.”
적절한 타이밍에 수아가 분위기를 환기했다. 눈치가 없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차르르 놓이는 맥주잔에 다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탄산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술을 받은 혜성이 감사하다며 인사하자, 수아가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때쯤 다른 손님이 가게에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수아가 인사하는 소리를 배경으로 짠, 하고 경쾌한 음이 울렸다.
“제가 이상형이라고요?”
대화가 끊겨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 혜성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얼굴에 장난기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이연이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아니, 이상형까진 아니고요…….”
“이해해요. 저 정도의 얼굴은 흔한 건 아니니까.”
“여기 엄청 많거든요.”
혜강과 산오를 턱짓했지만 혜성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세 가지 타입 중에 제가 제일이라는 거군요.”
미친 사람인가? 한국말로 대화하는데 말이 안 통했다.
“좀 의외네요. 저 같은 얼굴을 좋아하는데 막상 사귀는 것은 저쪽이라니.”
혜성이 산오를 눈짓했다. 왜, 저 얼굴이 더 잘생겼는데……. 이연은 별생각 없이 그렇게 대답하려다가 제 입을 황급히 다물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이상한 소리를 할 뻔했다.
“……이상이랑 현실은 다르죠.”
고르고 골라 나온 대답은 그런 말이 고작이었다.
“어머, 두 분이 사귄다고요?”
심지어 안주를 만들고 있던 수아가 그 말을 들었다. 그녀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박수를 쳤다.
“정말 축하드려요! 잘 어울려요.”
“예?”
“기분이다. 제가 골든벨 울립니다! 맥주 한 잔씩 쏠게요~.”
“네?”
“이분들이 사귀신대요! 모두 축하해 주세요.”
“와, 축하합니다!”
“축하드려요~.”
이연이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가게 안이 훈훈한 박수 소리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둘러봐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혜강조차도 공짜 맥주에 열광 중이었다.
“저……. 그런데 혹시 이혜성 헌터 아닌가요?”
“아, 네.”
“와, 팬입니다! 너무 잘생기셨어요.”
“감사합니다.”
떠들썩한 분위기를 타고 혜성의 주변으로 사람이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역시 인플루언서……. 이연의 주변에 이렇게 유명한 사람은 처음이라 이런 광경이 신기하기만 했다. 혜성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사진을 찍어 주고 사인을 해 주었다. 카드용 사인이니 도용하면 안 된다며 장난스럽게 웃는 그는 이 상황이 매우 익숙해 보였다.
혜성의 팬들은 혜성에게 열띤 응원과 칭찬을 보내고는 마무리로 산오와 이연을 돌아보며 축하드린다는 말을 꼭 덧붙였다. 처음에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대강 숙이기만 했는데, 한 세 번쯤 같은 과정을 반복하니 마음이 한층 무거워졌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이렇게 많은 사람한테 구라를 치는 건 예정에 없었다. 아무래도 눈치가 좀 보여서, 이연이 산오에게 시무룩하게 속삭였다. 산오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아직도 그 소리인가?”
“아니, 일이 너무 커졌잖아.”
“더 좋은 방법 있으면 거짓말이라고 하든지.”
“…….”
더 좋은 방법도 이제 와서 거짓말이라고 해명할 배짱도 없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응원에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혜성의 존재가 너무 컸다. 이연이 부정하려고 들자마자 사무실의 난장판이 다시 재림할 것이다. 밥은…… 밥만큼은 평화롭게 먹고 싶었다.
“정말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왜 이렇게 된 거지? 결국 아무 해명도 하지 못한 이연이 패잔병처럼 쓸쓸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오늘따라 맥주가 달았다.
사람이 몇 없는 작은 가게였던 터라, 깜짝 팬미팅은 금방 마무리되었다. 다시 도란도란한 분위기가 되자 이연이 머쓱하게 말을 건넸다.
“사람들이 엄청 알아보네요.”
“뭐, 그렇더라고요.”
“불편하진 않아요?”
“에이, 다들 착하신 분들이에요.”
하긴, 수틀리면 사람 열 명도 가뿐하게 맨손으로 집어 던질 수 있는 초능력자 앞에서 무례하게 굴 만큼 무모한 사람은 없을 터였다.
혜강은 첫인상이 별로였던 제 형이 다른 사람들과 좀 친해지길 바라며 일부러 대화에 많이 참여하지 않았다. 간혹 한두 마디 거드는 정도. 산오는 원래 말을 많이 하지 않았으니,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도하는 것은 혜성과 이연이었다.
“5년이나 걸린 걸 보면 이번 임무는 어려웠나 봐요.”
“엄청 어려운 건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사람 문제가 좀 끼니까 절차가 길더라고요. 솔직히 장기 임무는 거의 다 그런 식이에요. 실제로 능력 써서 뭐 하는 건 얼마 안 걸리고 전부 대기 기간이지.”
“그렇구나.”
“덕분에 관광 많이 하고 좋았죠. 거기서 가이드도 붙여 줬거든요. 신뢰 운운하면서 4년 째에야 개인 휴대폰 사용 허가가 떨어지긴 했지만……. 근데 의외로 한번 안 써 버릇하니까 계속 잘 안 쓰게 되더라고. 역시 습관이 문제인가 봐요.”
술이 좀 들어가고 분위기가 풀리면서, 이연에게 혜성의 인상은 점점 정상인의 범주로 들어섰다. 혜성은 성격이 급하고, 귀가 어둡고, 눈치가 없고, 나르시시즘도 조금 있는 것 같았지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이 평가엔 혜강이의 형이라는 가산점이 매우 크게 들어갔다.
물론 초면에 사람 멱살을 잡은 건 이상했지만…… 뒷조사를 하는 건 정말 이상했지만……. 이연은 혜강을 좋은 동생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혈육과 잘 지내고 싶은 마음 역시 당연히 있었다.
그리고 의외의 공통점도 있었다.
“와, 정말 거길 다 가 봤어요?”
“그럼요. 임무 미팅을 보통 식사로 잡거든. 서울이랑 초호 호텔 F&B는 다 꿰고 있어요.”
“오…….”
혜성은 맛있는 걸 먹는 것을 좋아했다. 이연처럼 대식가는 아니었지만 일로도, 취미로도 다양한 식당에 가서 식사하는 미식가였다. 혜성 역시 먹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는 오랜만에 만난다며 들떠서 이것저것 이야기했다.
“초호시에도 괜찮은 데 많은데. 이 근방에도 있고. 나중에 시간 나면 같이 먹으러 갈래요? 제가 살게요.”
이연의 눈이 번쩍 빛났다.
장기 의뢰는 수요가 극히 적고, 고위급으로 갈수록 더 그렇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혜성은 틀림없는 부자였다. 부자가 사 주는 밥. 대단히 흥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