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102화 (101/250)

#102

“그러니까, 우리 혜강이는 관련이 없다?”

혜강이만 관련 없겠냐? 나도 관련 없어! 이연은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산오의 눈치를 보며 말을 삼켰다.

“그, 렇다니까.”

혜강 역시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눈치껏 대꾸하는 중이었다.

“아, 내가 오해를 했네! 미안합니다.”

개중에 가장 다행인 건 드디어 혜성이 고집을 거뒀다는 점이다. 그는 이연과 산오가 뽀뽀하는 것을 보자마자 급격하게 성질이 누그러졌다.

“풀렸으니 됐습니다…….”

오늘만큼 격렬하게 집에 가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초췌해진 이연이 흐릿하게 대답하자 혜성이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제가 혜강이랑 나이 터울이 많이 나서, 좀 예민하게 반응했나 봐요. 애가 얼굴이 너무 예쁘니까 그동안 이상한 사람도 많았고…….”

“예에…….”

떨떠름한 반응에 혜강이 나섰다.

“이제 됐지? 가.”

“아니, 이렇게 가면 나만 이상한 사람 되잖아.”

설마 아니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사과의 의미로 제가 간단하게 술이라도 사겠습니다.”

“아뇨, 저희는…….”

“조금 전엔 정말 죄송했습니다.”

아까 난동을 부리던 모습은 어디 가고 머쓱한 표정을 지은 혜성이 웃었다.

“우리 혜강이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라도 드릴 수 있게 해 주세요.”

인사는 개뿔……. 마음 같아서는 이 고집쟁이를 백번 쫓아내고도 남았다. 이연은 마뜩잖은 눈길로 혜성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아주 오래전에, 이연은 그런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그를 사랑한 사람들. 그가 사랑한 사람들. 가족의 얼굴.

그런 걸 이연이 거절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요.”

얼결에 승낙이 떨어지자 혜성은 크게 기뻐했다. 이따 퇴근 시간에 다시 오겠다며 사무실을 나가고 나니 헌터 인플루언서가 휩쓸고 간 자리는 침묵만 흘렀다.

“미안, 형.”

혜강이 컴퓨터 책상으로 다시 돌아가며 시무룩하게 사과했다. 이연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냐. 오랜만에 형 만나면 좋지.”

좀 당황스러운 인물상이긴 했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혜강을 아끼고 걱정하니까 그러는 게 아닌가.

“오랜만에 만나서 할 얘기도 많고 재미있겠다.”

이연이 빙긋 웃었다. 가족과 친구는 달랐다. 혜강은 혜성에게 잔뜩 짜증을 내긴 했지만, 정말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아니라면 혜강이 나서서 진작에 사무실에서 쫓아냈겠지.

혜강이 좋아하는 가족이면, 이연도 좋았다.

‘……그래도 사귄다는 거짓말은 좀.’

이연이 떫은 얼굴로 산오를 흘끗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산오가 냅다 그런 방법을 선택할 줄은 몰랐다. 이렇게 되면 최소한 혜성의 앞에서만은 산오와 사, 사, 사귀는 척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

둘이 애인처럼 붙어 있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얼굴이 조금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냥 같이 있기만 해도 안절부절못하겠는데 그런 척을 어떻게 해? 근데 내가 뭘 해야 하는 거지? 사귀면 뭘 하는 거지? 해 본 적이 없으니 알 리가 없었다.

“야……. 넌 괜찮아?”

“뭐가.”

참지 못하고 산오에게 소곤대자, 심드렁한 시선이 돌아왔다.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 듯한 얼굴이 기가 찼다.

“아니, 너랑 나랑 사귀는 걸로 해도 괜찮냐고.”

“안 괜찮을 건 뭐지.”

“그……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잖아.”

“별걸 다 걱정하는군.”

이리저리 고민하다 겨우 쥐어 짜낸 변명에 산오가 코웃음을 쳤다.

“그럼 이혜강과 계속 사귄다는 오해를 받고 그놈에게 멱살을 잡히는 게 나았나?”

“그건…….”

“아니면.”

산오의 입꼬리가 별안간 삐딱하게 올라갔다.

“오해가 아니라 사실인가?”

그 웃음이 이상하게 살벌해서, 이연은 조금 쫄았다.

“아, 아니. 당연히 아니지. 내가 무슨 혜강이랑 사귀어…….”

혜강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누군가와 사귄다는 상상 자체가 이연에게는 사치였다. ‘정이연’은 거짓말로 점철된 인생이었고, 그런 것을 받아들여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가족과 살고 싶다는 소망은 부모님이 죽으며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이연의 눈동자가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그 표정을 빤히 바라보던 산오가 툭 내뱉었다.

“어차피 오래갈 것도 아니야.”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긴 하다. 두 사람은 애인같이 보이지도 않고, 그만큼 친하지도 않으니 금방 들킬 게 빤했다. 그럼 뭐, 그때 헤어졌다고 하면 될 것이다. 산오의 말대로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그건, 그렇지.”

바라던 바인데도 어쩐지 기분이 처져서,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

두 사람이 붙어 앉아 연신 속삭이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혜강의 눈이 조금 짓궂어졌다.

“그런데 형이랑 산오 형 관계는 몰랐네.”

“어?”

깜짝 놀라 대답에 삑사리가 났다. 이연이 크게 당황하며 혜강 쪽으로 아예 몸까지 돌려 앉았다.

“그, 그런 거 아냐.”

“자연스럽던데?”

주어는 생략되었지만, 무엇을 말하는지는 모두가 알아들었다. 명백히 놀리는 어투인 걸 알아도 이연의 귀가 약하게 달아올랐다. 그도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제산오랑 뽀, 뽀뽀, 그런 걸…….

그러나 일을 친 당사자인 산오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전에도 해 봤다.”

“진짜야?”

혜강이 놀라 물었다. 이연도 덩달아 놀랐다.

“뭐? 우리가 언제?”

“그때, 놀이공원에서.”

“…….”

그……거야, 그건 그렇지. 근데 그걸 횟수로 치는 거야? 이연이 혼란에 빠지느라 어버버하는 사이 혜강이 놀랍다는 듯 이연과 산오를 번갈아 보았다.

“그랬구나.”

“그랬긴 뭐가 그래? 아니야! 그거 실수야!”

이번엔 다행히도 제때 부정했다. 이연은 다급하게 고개를 젓느라 뒤에 있던 산오의 얼굴이 삐딱해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심술궂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이 자는 사이 옷을 잘……”

문장이 끝나기 전에 산오의 주둥이를 막은 건 올해 이연이 한 것 중에 가장 잽싼 행동이었다. 두 손으로 단단히 하관을 틀어막은 이연이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제산오야, 피곤하면 오늘은 이르게 퇴근이나 할래?”

입이 막혀서 대답하지도 못하는 사람에 대고 주절거리는 폼은 충분히 수상했다. 게다가 손바닥을 가져다 대느라 산오에게 바싹 밀착한 모습은 퍽 익숙해 보였고. 단순한 장난이라고 생각했는데……. 혜강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 그래.”

“안 사귄다니까? 알겠지?”

염불이라도 외는 것처럼 이연은 그 말만 반복했다. 산오의 심사가 점점 비틀리는 게 외관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이연에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일이다.

그 후로도 하루 종일 산오의 입을 단속하느라 이연은 초능력 관리청에 가려던 계획을 취소했다. 뭐,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이연이 산오의 입술만 노려보며 그렇게 합리화했다. 도대체 방심할 수가 없는 놈이었다…….

평범한 하루가 지나가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갔다. 혜성은 정확히 오후 6시에 맞춰 재방문했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우렁찼다.

“갑시다.”

호쾌한 말투는 섬세한 얼굴과 안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그런대로 수긍하게 되는 분위기가 있었다. 역시 얼굴이 깡패야……. 이연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혜강이 컴퓨터를 종료했다. 이연과 산오는 할 일 없이 소파에서 노닥대고 있었으므로 준비할 것도 없었다.

“먼저 집에 들어가도 돼.”

“됐어.”

술을 먹지 않는 산오에게 술자리는 재미없을 터였다. 이연은 배려를 발휘해 산오에게 그렇게 제안했으나, 산오는 단칼에 고개를 저었다. ……괜찮겠지? 이 인간은 폭탄 발언 당사자였다. 이연이 미심쩍은 눈으로 산오를 한참 훑었으나, 그는 뭘 꼬나보냐는 듯 마주 노려볼 뿐이었다.

사무실을 나온 네 사람은 밤꼬치로 향했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저녁 시간인데 아직도 한참 밝았다. 기운차게 가게 문을 연 이연이 살갑게 인사했다.

“사장님! 저희 왔어요.”

“아, 어서……”

탕!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식기가 바닥에 나뒹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수아가 떨어트린 스테인리스 쟁반이었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이연과 일행은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떨어트린 당사자는 주울 생각도 없는 듯 가만히 굳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혜성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뚫어져라 혜성을 바라보던 수아가 한참 후에야 홀린 듯 중얼거렸다.

“……가문의영광굴비?”

그 말에 혜강과 이연이 혜성을 휙 돌아보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혜성은 그 와중에도 사회인의 얼굴로 가볍게 웃어 주었다. 누가 내뱉은 건지 모를 탄성이 툭 튀어나왔다.

“대박.”

그랬다. 비슷했다. 혜성의 얼굴은 가문의영광굴비와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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