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100화 (99/250)

#100

“같이 가.”

일어서려는 산오를 이연이 만류했다.

“임무도 아니고 초관청인데 뭘 같이 가. 여기 있어.”

엘리베이터 보이가 있으면 몸은 편하겠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을 게 빤했다. 괜히 둘만 있으면 또 긴장이나 하겠지. 목각인형 같은 모습을 보여 줘 봐야 수상하기만 할 뿐이다. 게다가 지하 엘리베이터는 공간도 좁, 좁고…….

“후딱 갔다 올게.”

미적거리면 누구에게 잡히기라도 할까 이연이 후다닥 사무실을 나섰다. 문이 열리면서 울리는 방울 소리마저 다급했다.

후다닥 뛰어 내려간 이연은 금세 건물을 벗어나 거리로 걸음을 재촉했다.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경보하듯 발걸음을 바삐 옮기던 이연이 어느 순간 멈추고는 하, 하고 한숨을 쉬었다.

평소하고 크게 다른 일상도 아닌데 모든 게 고역이다. 출퇴근 같이 해서 사무실에 하루 종일 붙어 있는 것도 신경 쓰이는 판에, 집에서 같이 지내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심지어 침대도 하나다!

당분간 따로 살자고 하면 좀 이상한가? 제산오를 쫓아낼 순 없으니까, 그냥 내가 외박을 좀 하면……. 아무말 같은 계획이었으나 이연은 진심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차려 준 식사를 하는 내내 제산오 훔쳐보다가 눈 마주치고 사레들릴 뻔했다. 좀 의식해서 외면하려고 해도 정신만 차리면 흘끔대는 게 습관이 된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종찬과 종희와 어깨를 나란히 할 날이 머지않았다. 물론 전혀 반갑지 않다. 요즘 옷장에 있는 검은 정장 볼 때마다 심란했다.

“정신 좀 차리자, 정이연.”

중얼중얼대며 지하철을 향해 발걸음을 뗄 때였다.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정이연 씨?”

“네…….”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돌리던 이연의 말끝이 저도 모르게 흐려졌다. 눈동자가 천천히 깜빡였다. 순간적으로 꿈이라도 꾸나 싶었던 것이다.

웬 조각상이 거기 있었다.

섬세한 이목구비는 신이 몇 날 며칠 동안 빚어낸 것 같았다. 올올이 가지런한 눈썹과 선명하게 선이 보이는 눈꺼풀은 누가 만들어 낸 것처럼 완벽한 선을 그렸고, 기다랗고 촘촘한 속눈썹 사이에는 실핏줄 하나도 보이지 않는 깨끗한 눈이 있었다. 단단한 콧대는 조화롭게 서 있었고,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이 유독 붉었다. 고동색의 머리카락은 세팅한 것처럼 구불거리며 목을 덮고 있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미인. 산오와 혜강에게 익숙해진 이연조차도 놀랄 정도의 얼굴이었다.

벌써 역사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난데없이 출몰한 미인의 존재감에 흘끔대며 수군거렸다. 이연과 미인을 향한 시선이 점점 늘었다. 그러나 관심이 모이는 이유는 단순히 그의 얼굴이 잘생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혜성 씨?”

초호시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유명인이다. 근력 강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무궁화 4단. 랭킹은 200위권 안쪽으로 4단 상위권에 속할 뿐만 아니라, 보이는 바와 같은 이 압도적인 얼굴이 그에게 유명세를 가져다주었다.

젊고 강하고 아름다운 헌터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팬클럽이 생긴 건 물론이고 그 규모가 헌터로서는 이례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쏟아지는 관심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다며 미디어 출연 제의도 모두 거절했다. 그저 헌터 일에 집중하고 싶다고 했다. 미에 관대한 대중은 그것마저도 그의 장점으로 받아들였다.

쏟아지는 러브콜을 피하기 위해 다니고 있던 변이종 전담 회사를 퇴사하고 무소속 헌터, 그것도 장기 출장 의뢰를 주로 다닌다는 이야기는 헌터 관련 방송에서 잊을 만하면 계속 언급되는 아주 유명한 일화였다. 혜성이 아주 가끔 남기는 SNS 게시글은 늘 좋아요 개수가 미어터졌다. 아무리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해도, 그는 명실공히 헌터 인플루언서의 대표 주자였다.

그러나 현재, 혜성의 최신 소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5년 전 장기 임무를 떠난 후 소식이 두절되었다.

혜성이 주로 맡는 장기 출장 임무는 쉽게 말해 초호시 바깥에서 이뤄지는 업무들이었다. 적공의 범위 밖으로 도망가 국내를 활보하는 변이종을 탐색해 처치하거나, 다른 나라에서 초능력자 교류를 위해 변이종 처치에 인력 협조를 요청하는 등의 임무.

원래도 활발하게 소식을 올리거나 하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5년간 단 한 번도 SNS가 업데이트되지 않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적어도 사람이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지지는 않았을 텐데 이렇게까지 연락이 갑작스레 뚝 끊길 수가 있냐고 수군거릴 정도는 됐다.

이연도 몇 번인가 임무를 하면서 혜성의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같은 헌터 사이에서도 혜성의 팬은 아주 많았다.

“네, 맞아요.”

그런 사람이었는데. 다행히도 별 탈 없이 귀국한 모양이다. 말끔한 모습은 예전에 다른 헌터가 보여 준 사진과 거의 비슷했다.

“그런데 저는 왜…… 어쩌다가 찾게 되셨는지…….”

맹하게 대답하는 이연을 바라보는 혜성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안 그래도 예쁜 사람이 환하게 웃고 있기까지 하니 정신이 좀 혼미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꿈인가……. 이연이 멍하니 그런 생각이나 할 때였다.

“이 협잡꾼!”

갑자기 멱살을 잡혔다.

“예, 예?”

이연이 놀라서 토끼 눈을 떴다. 외모와 괴리가 큰 우악스러운 손이 탈탈 털자, 이연의 몸이 종잇장처럼 흔들렸다.

백주 대낮에 길거리에서 벌어진 소란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기 충분한데 심지어 주체가 이혜성이다. 웅성거리던 사람 몇이 휴대폰을 슬그머니 꺼내 드는 것이 보였다. 느닷없이 협잡꾼으로 얼굴이 팔리게 생긴 이연의 낯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니, 왜,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저 아세요?”

그리고 동시에, 어딘지 낯이 익다는 사실 또한 알아챘다.

이연의 주변에 혜성 정도로 미모가 특출난 사람은 많이 없었다. 해 봤자 차금의 두 사람 정도. 그런데도 인상이 친숙하다면 당연하게도.

“이혜강 형이다, 이 자식아!”

두 사람 중 하나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다.

“혜강이 형이라, 고요? 아니, 잠깐, 이것 좀 놓고…….”

사정없이 흔들린 탓에 정신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이연은 혜성의 손을 떼어 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근력 강화 초능력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심지어 말하면서 혜성은 점점 더 흥분하는 것 같았다.

“내 순진한 동생을 꼬여 내 쥐똥만 한 회사에 취직시켜 착취하던데, 무슨 술수를 부린 거야? 당신 쓴맛을 보고 싶어?”

혜성이 이런 성격이라는 것에 놀라야 할지, 혜강에게 형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야 할지도 모르겠다. 상황이 정신없이 돌아갔다. 이연은 탈탈 털리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혜성이 부모님을 어린 나이에 여의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으나, 동생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하긴, 형제자매 관계까지 중요하게 보도하는 곳은 잘 없긴 하지만…….

‘우리 형 성격이 좀…… 귀찮거든. 종잡기도 힘들고, 다혈질이고…….’

혜강이 설명했던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성격이 독특해 봤자 상식선일 거라고 생각했던 예상이 산산조각 났다.

*

“산오 형, 이연이 형이랑 싸웠어요?”

이연이 나간 사무실은 조용했다. 가만히 소파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는 산오를 흘끔 바라본 혜강이 물었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산오 역시 이연의 이상 행동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셋 이상 모여 있을 때에는 큰 문제가 없는데, 산오와 이연, 둘만 있어야 하는 상황일 때는 유독 티가 났다. 느닷없이 부산스레 움직이기 시작한다든가, 정처 없는 시선이 이리저리 헤맨다든가 하는 꼴을 보고 있으려면 눈치를 못 채기도 힘들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지만,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이연은 정신을 잃은 산오를 제집까지 끌고 오는 성의까지 보였으면서 정작 산오에게 해야 할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마 산오가 먼저 말하지 않았으면, 그런 돌발 상황이 생기지 않았으면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10년 전의 정연은 산오에게 무엇이든 미주알고주알 다 말해 주었다. 긴 세월 동안 성격이 바뀐 건지, 아니면.

“…….”

산오는 제 주먹을 가만히 쥐었다 폈다. 이미 늦었다. 그는 이연을 찾아냈고, 절대로 놓칠 생각이 없었다.

“이연이 형은 단순하니까요. 내버려 두면 알아서 풀리겠죠.”

산오의 얼굴이 슬쩍 사나워지는 것을 기민하게 눈치챈 혜강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말에 산오가 반항적으로 팔짱을 꼈다.

“아니면?”

“물어봐요. 술 같은 거 마시면서 분위기를 좀 풀고…….”

이연이 형이 또 그런 데에 약하거든요. 뭐 먹으면서 이야기하고, 같은 풍경 보고, 이런 감성……. 특히 먹을 거 사 준다고 하면 환장하죠. 돈 못 버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짠돌이처럼 구는지는 모르겠지만. 혜강의 주절거림은 몇 년간 함께 고스란히 지낸 태가 났다. 이연 본인보다 이연을 더 잘 아는 듯했다.

“아무튼 산오 형도 알겠지만, 이연이 형은 사람 잘 안 싫어하잖아요. 형이 싫어서 그런 건 아닐 거예요.”

가볍게 말한 혜강이 농담을 던지며 웃었다.

“아마 본인이 멱살을 잡혀도 사정만 이해되면 얌전히 넘어갈걸요.”

그로부터 정확히 5분 후, 상의가 엉망으로 구겨진 이연이 혜강의 형을 데리고 사무실에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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