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그 후로는 전쟁통이 따로 없었다. 건물은 틈만 나면 우르릉대며 진동을 전달했고, 금이 간 벽과 천장이 위태하게 흔들렸다. 균형을 잡고 달리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두 사람은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으나 아슬아슬하게 몸을 지탱했다. 곧 정말로 무너진다. 그런 것을 체감하기에 충분했다. 위기를 감지한 본능이 젖 먹던 힘까지 짜냈다.
첫 번째 코너를 막 돌았을 때, 천장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쏟아지는 파편 더미에 정연은 하마터면 머리를 맞을 뻔했다.
“이정연!”
“보지 말고 달려!”
놀란 산오가 옆을 돌아보자, 정연이 버럭 외쳤다. 찰나의 시간 판단해 능력을 일으켜 파편을 흘려보낸 것은 생존 본능에 가까웠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긴 했지만 상처는 없었다. 발소리가 한층 더 다급해졌다.
그리고 두 번째 코너를 돌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
‘어?’
정연이 눈을 깜빡였다. 방금, 방금…….
반대쪽 복도에서, 부모님이 안쪽으로 달려들어 가는 것을 본 것 같았다.
스치듯이 본 거라 정확하지 않았다. 어쩌면 정연의 환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가능성을 따지자면 그쪽이 한없이 가깝긴 했다. 부모님은 이미 차를 타고 산을 내려갔을 텐데, 어떻게 연구소 안에 있겠는가. 허무맹랑한 망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정연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만약…….’
만약 진짜라면? 실낱같은 가능성이 그를 망설이게 했다. 그 마음은 뜀박질에 그대로 전해져, 속도가 아주 조금씩 느려졌다.
이대로 연구소를 빠져나가면 다시 들어올 수 없었다. 지금도 복도 여기저기가 무너진 파편들로 막히고 있는 형편이었다.
부모님이 차에 함께 탄 정연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챘다면? 그가 연구소에 남은 것을 알고 다시 돌아왔다면? ……그를 찾고 있다면?
“……안 돼.”
신음 같은 속삭임은 굉음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정연은 그가 잠시 속도를 늦춘 사이 벌써 몇 발자국이나 앞서가는 등을 바라보았다. 산오는 정연의 말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입구가 곧이었다. 정연이 없어도 무사히 빠져나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터였다.
혼란스럽게 흔들리던 동그란 눈이 질끈 감겼다. 이건 단순히 외면하며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선택지 같은 건 없었다.
소년은 단숨에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절반 이상은 허물어진 벽과 바닥을 피하며 길을 돌아가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훨씬 더 품이 많이 들었다. 부모님을 본 갈림길에 선 정연이 고개를 두리번댔다.
어디로 가신 거지?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다가 복도로 뛰어들었다. 한순간 봤던 부모님의 방향으로 한참은 달렸으나 부모님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어쩌면 정말로, 잘못 본 걸지도 몰라.
그런 희망이 슬그머니 피어났다. 그래. 그냥 다시 산오를 따라 밖으로……. 조금 환해진 얼굴로 돌아서려던 정연의 눈에 어떤 방 입구 하나가 들어왔다.
일반적으로 한 개의 문짝만 달려 있는 연구실의 문들과 달리 양문형이었다. 문은 열려 있지 않았지만, 다른 모든 부분과 마찬가지로 부서지는 중이라 금이 가고 파편들이 떨어져 나가 안쪽 풍경이 조금 보였다.
그 너머로, 몇 개나 되는 커다란 모니터를 찬찬히 살펴보고 있는 태진의 뒷모습이 보였다.
‘왜, 왜 안 나갔지?’
연구소는 무너지는 중이고, 여기 깔려 죽을 셈은 아닐 텐데. 당황한 정연이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때였다. 휙 뒤를 돌아본 태진과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그는 정연이 거기 있는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이리로 오라고 손짓했다.
“…….”
불안한 눈으로 태진을 보던 정연은 조금씩 그에게 다가갔다. 문 앞에 서자 방의 문이 삐걱대며 조금 벌어졌다. 부서지면서 문 부분에 파편이 걸린 모양인지 활짝 열리지는 않았다.
작은 소년이 하나 통과하기엔 충분한 너비였기 때문에, 정연은 무리 없이 방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방 안은 생각했던 것보다 멀쩡했다. 군데군데 금이 가고 파편이 조금씩 떨어지기는 했지만, 완전히 무너지기까지는 여유가 조금 있을 것 같았다.
“역시 있었구나.”
가벼운 어조에 정연이 경계하며 물었다.
“……알고 있었어요?”
“혹시 그러지 않을까 가정은 했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너무나 태평한 목소리가 오히려 섬찟했다. 정연은 선언하듯 내뱉었다.
“……산오는 이미 나갔어요. 이미 탈출했다고요.”
“뭐, 괜찮아.”
산뜻하게 대답한 태진이 입을 찢어 웃었다.
“내가 원하는 건 너거든.”
“제, 제가 순순히 말을 들을 것 같아요?”
정연이 반항하듯 외쳤다. 정연이 알기로 태진은 비초능력자였고, 아무리 작은 아이여도 초능력을 가진 정연을 강제로 휘두를 수는 없었다.
“나에게 미안해한다고 생각했는데.”
태진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네 덕분에 난 크게 한 소리 들을 거야. 불쌍하지도 않니?”
“그렇, 다고 사람을 죽이면 안 돼요!”
정연이 매섭게 소리쳐도 태진은 마냥 태연했다.
“아, 우리 정연이. 잘 컸네.”
마치 믿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그럼 이건 어때?”
태진이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뒤에 가려져 있던 모니터에서, 영상 하나가 비쳤다. 정연의 눈이 커졌다.
부모님이 그 안에 있었다.
금이 간 바닥, 어지럽게 널린 집기, 커다란 콘크리트 파편들……. 장담하건대, 분명히 연구소 안이다.
정연이 본 것이 착각이 아니었다.
“저, 저기가 어디…… 빨리 탈출시켜 줘요!”
사색이 된 정연이 태진에게 매달렸다. 부모님은 방에 갇힌 것 같았다. 부모님 역시 비초능력자에다 연구소 지리도 몰랐다. 자력으로 이런 곳을 무사히 탈출하기 힘들 거라는 사실은 정연 역시 뼈저리게 알았다.
“빨리, 제발……. 아버지는 삼촌 형이잖아요. 왜, 왜 죽이려고 해요?”
순식간에 울음 섞인 목소리가 터졌다.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정연의 머리를 태진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죽이지 않아. 아무리 나라도 형인데, 죽일 리가 없잖아.”
“그럼 빨리, 어떻게든…….”
“혹시 이게 뭔지 알아?”
삼촌이 가볍게 등 뒤에 있는 것을 가리켰다. 시선을 돌린 정연의 눈이 커졌다. 교과서에서 본 적 있는 기계였다.
포탈이다.
“저 방은 사실 이 방으로 통하거든. 네 부모님이 여기로 올 수 있다는 뜻이지.”
물기로 얼룩진 눈동자가 커졌다. 포탈을 타기만 하면, 그럼 괜찮았다. 부모님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태진은 느긋하게 웃고만 있을 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왜 저러지? 정연이 참지 못하고 뭐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려던 순간.
“정연이가 말만 잘 들으면 당연히 열어 줄 거야.”
“……네?”
“안심해. 죽이는 건 아니니까.”
태진의 얼굴에 걸려 있는 미소는 정연과 놀아 줄 때의 표정 그대로였다.
“내가 귀여운 조카를 죽일 리가 없잖아. 그렇지?”
울음으로 흐려진 눈동자에 남자의 웃는 얼굴이 비쳤다. 정연은 흔들리는 시선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태진이 한 것은 정연에게 아주 익숙한 행위였다.
“쉬……. 얼마 안 걸릴 거야.”
기력 채취.
다만 조금 달랐다. 원래는 양팔에만 감던 천은 허리와 허벅지에도 모두 감겼다. 저를 어디선가 가져온 침대에 눕히고 무언가를 바쁘게 연결하는 태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연이 바짝 마른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어머니랑 아버지……. 정말 무사히 탈출시켜 주셔야 해요.”
“당연하지.”
가볍게 대답한 등은 이내 모든 조작을 마쳤는지 허리를 폈다. 태연하게 돌아보는 얼굴이 너무 무서워서, 정연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조금 아프겠지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지?”
“……네?”
그 말의 끝 음을 미처 마무리하기도 전에, 엄청난 격통이 정연의 전신을 달렸다.
눈을 부릅뜬 정연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꿈틀거렸다. 침대에 단단히 구속된 사지 덕에 도망갈 곳도 없었다. 소리 없이 내지르는 비명을 태진 역시 똑똑히 봤을 텐데도, 웃는 얼굴엔 미동조차 없었다.
전신에 너무나 충만하게 감돌고 있어 존재도 느끼지 못했던 무언가가 순식간에 비워지고 있었다. 심한 감기에라도 걸린 것처럼 온몸에 힘이 빠졌다. 고통에 발버둥 치던 몸이 축 늘어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기계는 끊임없이 기력을 빨아들였다. 이전에 채취하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정연이 가지고 있는 기력을 전부 뽑아낼 기세였다. 천둥이 피를 타고 제 몸을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처음 겪어 보는 극통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 금세 몸이 온통 젖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은 물을 먹어 늘어지고, 눈꼬리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다.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지독한 감각이었다.
정연의 머리 색과 눈 색이 서서히, 서서히 옅어졌다. 새까맣던 색은 물이 빠지는 것처럼 밝은색으로 변했다. 끊임없는 통증에 정연의 눈이 뒤로 넘어갔다. 짧은 시간 새 기력을 과도하게 방출한 탓에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깜빡이던 눈꺼풀이 서서히 닫혔다.
“이 정도나 뽑았는데도 살아 있다고?”
모니터를 바라본 태진이 황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연이 움직여지지 않는 안면을 필사적으로 꿈틀거렸다.
“부모, 님…….”
“알았다니까.”
계속되는 재촉에 짜증스레 대답한 태진이 무언가를 주섬주섬 챙기고는 포탈로 다가갔다. 그는 포탈에 타기 전, 무언가를 눌렀다. 됐지? 하고 건성으로 흔드는 손길에 정연이 희미하게 웃었다. 어디선가 삐걱이며 문이 열리는 소리와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도 들렸다. 됐다. 제 할 일을 다 한 정신이 급격하게 흐려졌다.
이걸로 다 괜찮았다.
*
정연이 눈을 다시 뜬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였다.
그러나 정신을 차렸을 때, 그가 구하려던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