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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95화 (94/250)

#95

그렇게 굳은 부모님의 얼굴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더럭 무서워진 정연이 더듬더듬 설명했다. 화를 내는 것 같은 부모님의 얼굴을 마주하니 머리가 새하얘져서 연구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삼촌의 당부 같은 건 기억도 안 났다.

그간의 나날이 횡설수설 흘러나왔다. 삼촌이 며칠에 한 번씩 채취실에 정연을 데려가 팔에 기계를 연결했다는 것, 삼촌의 부탁에 응해 채취를 조금 더 늘린 후로는 채취를 하고 나면 조금 기운이 빠졌다는 것, 그래서 잠이 많아졌다는 것…….

아버지도 어머니도 정연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그러나 정연은 부모님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다. 내가 뭘 잘못했나? 뭘 더 했어야 하나? 내가 싫어졌을까? 무슨 상황인 줄도 모르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울먹였다.

“죄송해요…….”

“아냐, 아냐. 넌 아무것도 잘못 없어, 정연아.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는 적잖게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뺨과 목을 한참 문지르던 손은 이내 정연을 꼭 껴안았다. 정연이 뭔가 잘못한 건 아닌 모양이다. 정말 다행이다……. 정연은 어머니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미안하다. 전혀…… 전혀 몰랐어.”

그 옆에서 아버지가 등을 쓰다듬었다. 삼촌한테 자세한 이야기를 못 들었거든. 그래서 조금 놀란 거야.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단다. 다정한 목소리가 조곤조곤 쏟아졌다. 정연은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뭔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제 잘못은 없다고 하니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정연을 달래고 불을 꺼 준 부모님이 방에서 나가자, 정적이 찾아들었다.

컴컴한 방 안에서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쓴 채로 한참 생각하던 정연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산오가 눈에 걸렸다. 이대로 떠나기 전까지 마냥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었다.

연구소 복도를 살금살금 오가는 것은 정연에게 어느덧 익숙해진 일이었다. 정연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몇 번이나 꺾었을까, 삼촌의 사무실이 보였다.

문틈으로 사무실의 환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초능력 시연만 몇 번 하는 거라고 했잖아!”

두꺼운 방문의 작은 틈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몇 배는 작아진 채로 흘러나왔다.

“감히 내 아들의 기력을 갈취해?”

“내 아들?”

처음에 정연은 그가 모르는 다른 사람이 함께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곧, 그게 삼촌의 목소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입양아인데?”

그 목소리는 정연이 이제껏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종류의 음성이었다.

“인형 놀이 아니고?”

“말조심해!”

“하하, 형. 진심이야?”

웃는 것 같기도, 놀리는 것 같기도 한 날카로운 톤이 너무 낯설어서, 정연은 숨도 쉬지 못했다. 삼촌이 하는 말이 심장을 깊숙이 찔렀다.

“걔는 어마어마한 기력 덩어리야. 아마 스무 살이 되면 단번에 무궁화 5단을 받을걸.”

네가 있어서 큰 도움이 됐다는 삼촌. 즐겁게 놀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삼촌. 다정하고 친절한 삼촌.

“모처럼 그런 게 굴러들어 왔는데, 잘 써 주는 게 당연한 거 아냐? 내가 뭐, 걔를 죽이려는 것도 아니잖아. 그나마 형을 생각해서 살살 하고 있었다고.”

“이태진!”

노성이 문을 뚫고 울렸다. 정연은 문에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차가운 손끝을 매만지던 소년은 곧 비틀거리며 사무실이 있는 복도를 벗어났다.

한여름 밤이었는데 이상하게 공기가 서늘했다. 정연은 몸을 움츠리고 걸었다.

삼촌은 저를 별로 안 좋아한 거였다. 정연도 기력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제 몸 안에 있는 초능력. 잘은 몰라도 정연은 그게 많았고, 삼촌은 그걸 원했던 거였다.

정연과 함께 지내는 것이 좋아 연구소에 불러들인 게 아니었다.

소년은 몇 번이고 방금 들은 이야기를 곱씹었다. 처음에는 생각할 때마다 심장 한편이 서늘해졌지만, 점차 무뎌졌다. 입양아. 인형 놀이.

삼촌의 말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나자 정신이 좀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정연은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삼촌은 날 안 좋아해. 삼촌은 그냥 날 이용한 거야.

“난 좋아하는데…….”

조그마한 목소리는 금세 흩어졌다.

정처 없이 걷던 정연은 익숙한 문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채취실. 부모님이 도착하기 전날 이래로는 처음이었다.

채취실의 문은 연구원의 지문 인식이 필요했기 때문에, 늘 삼촌이 먼저 다가가 열어 주었다.

“…….”

새하얀 모래들이 정연의 옆에 모였다. 곧 정연보다 한참은 크고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이 만들어졌다. 삼촌의 모습을 한 남자가 패드에 손을 찍자, 문이 열렸다. 남자는 문이 열리자마자 다시 모래로 변해 사라졌다.

자박. 작은 발소리가 채취실 내에 울렸다. 어두운 내부는 문 옆의 스위치를 누르자 금방 환해졌다.

정연이 연구소에서 가장 자주 드나들었던 방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이 채취실이었다. 크게 달라지지 않은 풍경은 사람이 없어 조금 휑한 분위기만 풍겼다. 방 중앙의 침대와 기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연은 다가가지 않고 벽에 몸을 기댔다.

그게 기력을 갈취하는 과정이었구나.

맞출 생각도 없던 퍼즐이 맞춰졌다. 솔직히 말하면 정연은 기력을 뽑는 게 왜 잘못된 것인지 몰랐다. ‘갈취’라고 표현하니까 조금 나쁜 느낌은 들었지만, 삼촌 말마따나 죽는 것도 아니고……. 계속 생각하다 보니 다른 사람 거라면 몰라도 내 건데 그깟 기력 좀 주면 어떠냐 싶은 마음이 슬그머니 드는 것이다.

난 괜찮은데. 괜찮다고 말했으면 좀 상황이 나아졌을까? 의미 없는 가정을 해 봤자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정연은 시무룩하게 벽을 타고 주저앉았다.

그 과정에서, 힘없이 떨궈진 손이 우연히 벽 어딘가를 눌렀다.

쿵.

“……응?”

기대고 있던 벽이 들썩였다. 정연이 놀란 눈으로 휙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전까지 벽이었던 곳에, 커다란 문이 하나 생겨 있었다.

“뭐야?”

정연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으며 생겨난 문을 쓸었다. 어떻게 들어가는 거지? 이리저리 기웃대던 정연은 곧 채취실 문 앞에 있는 것과 똑같은 패드를 발견했다. 실체화한 삼촌을 다시 불러내자 문은 금방 열렸다.

비밀 공간은 삼촌의 사무실과 비슷하게 생겼다. 커다란 책상과 칠판, 책장에 가지런하게 정리된 서류철들, 컴퓨터, 캐비닛과 서랍장.

칠판의 글은 복잡한 수식으로 가득 차 있어서 정연이 알아볼 수 없었다. 책상 쪽으로 다가가자, 두꺼운 보고서가 하나로 엮인 것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정연은 고개를 빼고 슬쩍 문서를 훔쳐보았다. 문서의 최상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Butterfly Project」

간단한 영단어라 금세 해석할 수 있었다. 정연은 단번에 이게 산오와 관련된 프로젝트라는 것을 알았다.

칠판의 글과 마찬가지로, 문서도 정연이 읽을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았다. 지루하고 어려운 단어들의 나열에 정연은 금세 지루해졌다. 일단 뭘 알아들어야 다음을 읽을 것 아닌가.

그러던 중 의미 모를 단어들 안에서 기적처럼 눈에 들어온 문장이 하나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3호의 경우 점진적 기력 방출을……」

제3호. 산오였다. 정연의 눈이 다시 또렷해졌다. 그 부분을 집중해서 읽어 보니, 산오에 대한 이야기를 더 찾을 수 있었다. 아는 이름 하나 나왔다고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이 갑자기 술술 풀려 나가진 않았지만, 끈기 있게 읽어 내리는 데에는 도움이 됐다.

정연은 꼼꼼하게 자신이 알 수 있는 문장들을 기억해 두었다. 아주 작고 느리게 정보가 하나씩 쌓여 갔다. 3호의 치료 과정, 관찰, 성과. 대략적인 내용이 얼기설기 이어졌다.

놀라울 것도 없이, 아이들의 추측이 맞았다. 연구소는 비초능력자인 산오를 초능력자로 발현하기 위한 실험을 하고 있었다. 산오에게 주기적으로 초능력자의 기력을 투여하여 내부 기력의 반발 작용을 관찰했다. 그 외에도 실험 과정을 설명하는 여러 보충이 있었지만, 너무 어려워서 정연은 이해하지 못했다.

「초능력 발현에 대해서는 진전 없음.」

「강한 두통과 근육통 및 실재하지 않는 증상에 대한 통증을 점점 강하게 호소.」

이런 문구들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정연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프면 하지 말아야지. 그까짓 초능력이 뭐라고. 묘한 반항심에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그 후로도 일지는 산오가 어느 정도로 고통스러워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정연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종이를 이리저리 훑던 시선은 어느 곳에 가서 멈췄다.

「기력 대량 확보로 제3호의 실험 강도 강화.」

……대량 확보?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부작용 호소. 격렬한 자해 시도로 전신 구속 후 진행.」

정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연이가 조금 더 도와주면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런데 그럼 정연이가 조금 힘들 수도 있어.’

과거의 대화가 뇌리를 스쳐 지나간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두근. 두근. 심장이 점점 크게 뛰기 시작했다. 못이라도 박힌 것처럼 검은 활자에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격렬한 자해 시도」

산오를 제일 아프게 한 것은 저였다.

정연이 멋모르고 기력을 너무 많이 줘서, 삼촌이 산오에게 그걸 전부 쓴 것이다.

산오는 제게 아픈 티를 내지 않았다. 늘 조용하고 얌전하게 그 자리에 있었다. 정연이 놀자고 하면 군말 없이 놀았고, 삐죽거리는 말은 해도 먼저 가 버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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