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우리 약속했잖아, 포기하지 마. 이어지는 말은 마치 어리광 같았다. 그러나 정연은 그 말이 이뤄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씩씩한 다짐이 무색하게도, 산오의 치료에 큰 차도는 없는 듯 보였다. 산오가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정연은 종종 연구원들이 회의하는 곳 근처에 숨어 이야기를 들었다. 거기서 나오는 말은 늘 비슷했다. 성과 없음. 가망 불명. 차후 계획 변경…….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정연은 말없이 산오의 방으로 가서 창문 앞에 앉아 있는 그의 곁에 앉아 볕을 쬐다가 잠들곤 했다. 그즈음의 정연은 잠이 특히 많아졌다. 산오는 굳이 깨우지 않고 가만히 같이 있어 주었다.
한적한 나날이 흘러갔다. 방학 초반부와 달리 시무룩해진 정연의 태도에 삼촌은 조금 의아해했으나, 채취의 부작용이라고 판단한 듯했다. 삼촌은 정연을 볼 때마다 홍삼 캔디를 쥐여 주었다. 얼결에 그걸 먹다 보니 두 배로 우울해졌다.
그래도 성과는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워들으며, 정연은 산오가 받는 치료가 ‘초능력’을 만들어 주는 과정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산오의 초능력을 발현하는 데에 정연의 초능력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나랑 같은 초능력이 생기는 건가? 그럼 쌍둥이 같겠다. 나란히 서서 같은 초능력을 쓰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정연이 악동처럼 웃었다.
그런데 연구소 이야기를 염탐하고 다니는 과정에서, 정연은 무언가 이상한 점을 하나 알아챌 수 있었다. 연구소에 사람이 점점 줄고 있었다.
원래도 많은 인원이 상주하는 곳은 아니었지만, 자주 보던 연구원들의 얼굴이 하나둘 사라졌다. 다른 연구원에게 물으니 휴가를 갔다고 했다. 사람은 줄고 줄어 정연이 자주 엿듣던 회의는 이제 열리지도 않았다. 회의실을 아무리 기웃거려 봐도 어느 순간부터 텅 비어 있었다.
훨씬 적막해진 연구소는 정말로 산오와 삼촌, 그리고 정연밖에 남아 있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중, 정연이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 왔다.
“아빠, 엄마!”
정연의 부모님이 연구소에 방문한 것이다. 삼촌과 함께 마중 나온 정연이 멀리서부터 부모님의 차를 알아보고 방방 뛰었다.
“형, 잘 왔어. 쉬다 가.”
“어. 정연이도 잘 있었지? 숙제도 열심히 했고?”
“네!”
아버지의 넉넉한 손이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어머니가 꼭 안아 주는 품이 너무 좋아서, 정연은 맹하게 웃음을 흘렸다.
“잘 지냈어요? 저는 잘 지냈어요! 와, 엄마 옷 너무 예뻐요.”
오랜만에 싱글벙글해진 얼굴이 와글와글 떠들었다. 전화로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에도 부모님은 성실하게 응, 그랬구나, 따위의 맞장구를 계속 쳐 주었다.
사실은 산오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삼촌이 안 된다고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저 친구 생겼어요. 여기서 치료받고 있는 아이인데요, 엄청 잘생겼거든요. 정연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들을 꾹 삼켰다.
“형, 이따 이야기 좀 했으면 하는데.”
삼촌이 아버지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아버지와 붙어 있던 정연 역시 듣기는 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어른들끼리는 늘 그런 이야기를 나누니까. 큰 관심 없었다.
밥을 먹고 난 이후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삼촌을 잘 돕고 있다는 말, 끝나면 홍삼 캔디를 주는데 그게 정말 맛이 없다는 말, 그래도 삼촌도 칭찬을 많이 해 줬다는 말…….
“정연이가 정말 잘해 주고 있지.”
삼촌이 웃으며 정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홍삼 캔디 맛없었어? 장난스레 묻는 질문에 악의라곤 없어서, 정연은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정연은 그 후로도 조잘조잘 떠들었다. 연구소 구경을 구석구석 시켜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자, 아버지가 오늘은 삼촌하고 이야기를 하기로 했으니 내일 가자고 했다. 정연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은 부모님이 온 게 너무 신나서 그런지 잠이 도통 오지 않았다. 내일 연구소 투어를 해야 하는데. 한참을 뒤척거리던 정연은 결국 일어나서 방을 나섰다. 주스라도 한 잔 마시고 자야지 싶었다.
밤의 연구소 복도는 불이 전부 꺼져 달빛만 희미하게 비쳤다. 정연은 다른 사람들을 깨우기 싫어 살금살금 복도를 걸었다.
“……해야 할 것 같아.”
“그렇…… 알겠…….”
‘응?’
정연의 귀가 쫑긋 섰다. 삼촌과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늦은 밤인데 아직까지 대화하시는 모양이었다.
이야기를 엄청 오래 하시네. 무슨 일이 생겼나? 정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문틈 사이로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오는 방이 있었다. 삼촌의 사무실이었다.
“다른 건 걱정할 거 없고?”
“그럼. 아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되겠지만, 큰 문제는 없어.”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괜찮아. 예상 못 한 문제도 아니야.”
삼촌의 목소리는 이내 걱정이 섞였다.
“형이야말로 정연이 조심해서 데려가고. 그동안 연구소에서 너무 잘 지내서 안 가려고 할지도 몰라.”
“네가 정말 잘 놀아 줬나 보네?”
“그러게 말이야. 재능이 무서워.”
삼촌의 가벼운 농담 다음에 난처한 것 같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그래……. 잘 달래야지.”
정연이 눈을 깜빡였다. 처음부터 다시? 뭘? 가? 어딜? 집에 간다고? ……왜?
산오는?
그가 기억하기로, 연구소에서 떠날 날은 일주일도 더 남았다. 아직 산오가 발현하지 못했으니까 제가 더 채취를 해서 줘야 하는데. 발현할 때까지 도와주기로 했는데. 벌써 가야 된다고?
언젠가 제가 연구소를 떠나 학교를 가야 한다는 사실 정도야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끝날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정리가 되지 않는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정연은 넋 나간 것처럼 문에서 물러섰다. 안, 안 되는데. 산오가 나비가 되어야 하는데.
나비가…….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는 정연의 모습은 눈에 띄게 얌전했다. 전날과 전혀 다른 태도에 부모님은 의아해하며 정연을 걱정했다.
“왜 그래?”
“잠을 잘 못 잤어?”
정연은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오늘은 연구소 구경시켜 주기로 했잖아. 기대되지 않아?”
그 말에 정연이 고개를 들었다.
“저, 혹시 소개 내일 시켜 줘도 돼요? 오늘은 쉬고 싶어요.”
“그럼, 물론 되지.”
부모님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연은 다시 밥 먹는 데에 집중했다. 부모님과 눈이 마주치면 당장이라도 연구소를 나가자고 할 것 같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아직은, 아직은 안 됐다.
그 후로는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삼촌과 부모님이 뭐라 뭐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대강 흘려들으며, 정연은 무작정 산오와 만나던 방으로 향했다.
달칵. 하얀 문을 열자 눈이 마주쳤다. 다행히도 산오는 늘 앉아 있던 자리에 있었다.
언제부터 산오가 등을 돌리지 않고 앉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정연은 그대로 문에 기대 아역 배우처럼 잘생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적이 흘렀다. 산오도, 정연도,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이렇게 무거운 침묵이 깔린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정연은 그냥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너는 모든 애벌레는 나비가 된다고 했지.”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그때였다.
“내가 만약 애벌레가 아니면?”
무덤덤한 얼굴 안에 절망이나 슬픔 같은 건 없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새까만 눈동자만 있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면 어떡해?”
그런 가정에 도달하기까지, 산오는 아주 많은 생각을 했을 터였다. 치료를 버텨 가면서, 혼자 웅크려 앉아서, 불안과 고민을 그대로 삼키고서. 정연에게 육성으로 내뱉어 실체로 만들기까지.
정연은 뭐라고 성급하게 말하려다가, 문득 울음이 날 것 같아서 이를 악물었다. 느리게 숨을 들이마셔 호흡을 삼킨 후에야 입을 뗐다.
“괜찮아.”
또박또박 말하는 목소리는 각인이라도 시킬 것처럼 분명한 발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어도, 괜찮아.”
나비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비가 아니어도 산오는 산오였다. 무뚝뚝하고, 지기 싫어하고, 툭 하면 남을 놀리고, 솔직하고, 그래도 아주 조금은 다정한 구석이 있는.
그 사실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그날 저녁, 부모님은 정연을 불러 놓고 내일 함께 집으로 가자고 했다. 부모님은 삼촌에게 사정이 생겨 더 이상 정연이 여기 있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주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어린 나이로도 이해하지 못할 여지가 없도록. 반박할 틈이 없도록.
그 사실이 더 막막했다.
“하지만, 저 정말 열심히 했는데요.”
울 것 같은 목소리는 따뜻한 품에 끌어안겼다.
“알아. 정연이가 정말 잘해 줬다고 삼촌도 칭찬 많이 했어.”
“연구는 괜찮은 거죠? 잘못된 게 아닌 거죠? 저 삼촌이 하라는 협조 다 했어요. 많이 필요하다고 해서 채취도 두 배로 했고, 또…….”
느리게 도닥이던 손이 뚝 멈추었다.
“채취?”
흔들리는 갈색 눈동자가 정연을 품에서 떼어 내 그와 눈을 맞추었다.
“그게 무슨 소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