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하얀 입김과 함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신음이 흘렀다. 어쩔 줄 모르고 움칫대던 정연이 산오에게 다가갔다.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스케이트화도, 빙판도 하얀 모래로 변해 흩어졌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황당할 정도로 당연한 사실이었다. 정연이 추우면, 산오도 추울 터였다.
얇은 옷 한 장으로 냉기에 한참 노출된 산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야, 괜, 괜찮아?”
당연히 산오를 얼려 죽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황급히 빙판을 모두 없애도 방 안의 온기는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가까이서 살펴본 후에야 정연은 산오의 몸이 조금씩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연은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는 말을 두서없이 중얼거리며 차가운 두 손에 장갑을 끼워 주고 외투를 벗어 덮어 주었다. 살짝 손을 대어 본 뺨은 얼음장이었다. 패닉에 빠진 정연은 어쩔 줄 모르고 주변을 한참 둘러본 후에야 간신히 작은 모닥불을 하나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타닥. 탁. 다행히도 타오르는 모닥불은 금세 산오의 몸을 녹였다. 입술 색이 조금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정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추우면 말을 하지.”
난 그것도 모르고……. 머쓱한 듯 토달토달 변명을 늘어놓는 정연을 산오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추웠을 뿐이지 기절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연의 원맨쇼를 줄곧 지켜볼 수 있었다.
아마 푹신한 장갑과 외투가 그의 마음 언저리도 아주 조금, 녹였을 것이다.
“그게 네 능력인가?”
“응. 뭐든 만들 수 있어.”
이런 것도 만들 수 있다, 하고 정연이 자랑하듯 이것저것 만들어 냈다. 바닥도 벽지도 새하얀 방은 곧 새하얀 잡동사니들로 가득 찼다. 장난감, 축구공, 농구 골대, 책들……. 제 방에 있던 물건들을 기억해 내 구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너도 초능력 있어?”
“……없어.”
빈손을 몇 번 움켜쥔 산오가 대답했다. 잠깐 망설이던 산오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치료를 받으면……”
그때였다.
삐이이이!
천장에서 강한 경보음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스프링클러가 작동했다.
순식간에 모닥불이 꺼지고 두 사람의 몸이 온통 젖었다.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정연이 맹하게 중얼거렸다.
“아, 화재경보기…….”
잠시 후 소리를 듣고 달려들어 온 삼촌은 방 꼬라지를 보고 기겁을 했다. 밀폐된 공간에서 불을 피우면 큰일 난다고 일장 연설을 한 후 산오와 정연을 각자의 방으로 돌려보내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다. 정연은 저녁 식사 때까지 삼촌에게 잔소리를 들었고, 시무룩하게 죄송하다는 사과를 열 번도 더 한 후에야 해방될 수 있었다.
그날의 만남은 그게 끝이었다. 제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르게 엉망진창이었다. 정연은 조금 울적해진 상태로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있잖아요, 삼촌.”
“응?”
“어떻게 하면 사람을 나비로 만들 수 있어요?”
정연의 물음에 삼촌이 아, 하고 감탄사를 흘렸다.
“3호에게서 들었나 보구나.”
“저보고 나비로 만들어 줄 수 있냐고 했는데, 전 그렇게 못하잖아요……. 그럼 걔를 도울 수 없는 거예요?”
기껏 왔는데 도움이 못 된다니, 기운이 빠졌다. 축 처진 정연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은 삼촌이 설명해 주었다.
“정연이, 학교에서 나비의 변태 과정 배웠지?”
“네.”
“그거랑 비슷한 거야. 3호는 말하자면…… 지금은 애벌레 상태인 거지.”
진짜 나비가 아니라 비유 같은 거구나. 이해한 정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나비가 될 수 있는데요?”
“치료를 열심히 받으면.”
그러고 보니 삼촌이 많이 나아졌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어제 봤을 때 아픈 곳은 없어 보였는데. 정연의 그런 의문이 얼굴에도 드러났는지, 삼촌이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몸이 아파서 치료를 받는 건 아니고, 발전을 위한 거야.”
“발전…….”
“나비가 되는 건 3호한테도 잘된 일이야. 나중에 삼촌에게 엄청 고마워할걸.”
“그렇구나.”
뭔지는 모르지만 나비가 되는 건 엄청 좋은 일인 모양이었다. 정연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그럼 저도 나비 만들어 주면 안 돼요?”
그 순수한 질문에 삼촌이 결국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넌 이미 아름답고 훌륭한 나비야.”
“삼촌이 내가 열심히 하면 너 나비로 만들어 줄 수 있대.”
문을 벌컥 연 정연이 전날과 똑같은 곳에서 앉아 있는 산오에게 소리쳤다. 등을 돌린 산오는 흘끗 시선을 주는가 싶더니 대답하지 않았다. 시간이 어제로 돌아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같은 반응이었다.
“그리고 내가 재밌는 거 생각해 왔어. 놀라지 마.”
의기양양하게 말한 정연이 하얀 모래들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순식간에 방 안 전체에 퍼진 모래들은 곧 유연하고 탄력 있는 매트로 바뀌어 바닥을 전부 감쌌다. 가장자리에 조롱조롱 매달린 스프링들은 얌전히 앙다물려 있었다.
거대한 트램펄린 장이었다.
“봐 봐. 여기 들어가서 뛰는 건데…….”
정연이 중간에 놓인 통로를 건너 어느 매트 안으로 폴짝 뛰어들어 갔다. 팡팡 뛰는 소리와 함께 금세 작은 몸이 높이 떴다.
“이거 엄청 재미있어. 너도 해 봐!”
산오는 흥미 없다는 듯 움직이지 않고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나 어제의 일로 나름대로 교훈을 얻은 정연은 산오의 몸을 밀어 트램펄린장 안으로 넣어 버렸다.
“죽고 싶나?”
얼결에 밀린 산오가 눈을 사납게 치켜뜨며 으르렁댔다. 정연보다 덩치가 좀 크긴 했으나, 그래 봤자 고만고만한 체격이었다. 무게를 싣고 미는 힘에 온전히 버틸 수는 없었다.
“빨리, 뛰어 봐!”
정연은 산오가 있는 매트 안에서 뛰었다. 강한 탄성을 계속 받은 산오의 몸이 들썩였다.
“하지, 말, 라고.”
휘청이는 몸을 가누지 못해 단호한 말투에 마구 호흡이 섞였다. 결국 짜증스레 일어선 산오가 힘을 줘서 뛰었다. 묘한 엇박자였다. 타이밍을 잘못 맞춰 균형을 잡지 못한 정연이 매트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잠깐, 나, 일어, 나고.”
“꼴 좋군.”
심술궂게 말하는 산오는 당연히 멈추지 않았다. 정연은 빨래 털리듯 한참을 휘둘리고 난 후에야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야, 다시 해. 그런 식으로 기습하는 게 어디 있어?”
“해 보든가.”
매트의 왕처럼 정가운데 버티고 선 산오가 거만하게 중얼거렸다. 정연이 매끈한 얼굴을 노려보았다. 방금은 갑자기 일어설 줄 몰라서 당했던 거지, 두 번 실수는 없었다. 이번에 털리는 것은 산오가 될 것이다. 동그란 눈동자가 의지로 불탔다.
그날, 몇 시간 내내 트램펄린을 뛰며 놀았다. 경쟁하듯 서로를 쓰러트리려다 공중제비까지 습득한 두 사람은 뛸수록 발전해 방 전체에 걸쳐 깔린 여러 개의 트램펄린을 점프로 한 번에 옮겨 다니는 경지까지 다다랐다.
승부 결과로 말할 것 같으면 산오가 이겼다. 산오가 총 53번, 정연이 55번 쓰러졌고, 둘 다 그날 저녁 침대에 눕자마자 기절했다.
그날 이후, 정연은 매일매일 산오를 찾아왔다. 정연은 늘 방에다 무언가를 만들었고, 산오는 귀찮아하는 듯하면서도 막상 만들면 잘 놀았다.
종류는 다양했다. 어린아이 백 명은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방이 선택지를 넓혀 주었다. 방 전체를 두르는 커다란 미끄럼틀을 만들 때도 있었고, 수영장을 만들 때도, 거대한 놀이터를 만들 때도, 농구장을 만들 때도 있었다. 카트를 만들어 타고 놀았을 때에는 속도를 줄이지 못해 벽에 자꾸 들이받느라 쿵쿵거리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삼촌에게 혼났다.
두 사람은 늘 경쟁했고, 투닥거렸으며, 이겼을 때에는 한껏 으스댔다. 산오의 틱틱거리는 말투는 여전했지만 말을 무시하지는 않게 되었고, 정연은 점차 간식 같은 것도 들고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 정도로 친해졌을 때에야 산오는 한 가지 사실을 실토했다.
“이름이 산오가 아니라고?”
“그래. 3호라고 했는데 네가 잘못 들은 거다.”
산오가 이름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정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치만…… 그건 이름이 아니잖아.”
숫자는 이름에 쓰는 게 아니다. 무슨 로봇한테나 붙일 법한 명칭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던 정연은 좋은 생각이 난 사람처럼 박수를 쳤다.
“내가 이름을 새로 지어 줄까?”
“……뭘로?”
“음……. 기다려 봐.”
정연이 곧 환한 얼굴로 물었다.
“칠칠이 어때?”
잘생긴 얼굴이 빙하에 비견될 만큼 싸늘해졌다.
“왜 그딴 생각을 하게 된 거지?”
“칠은 행운의 숫자잖아.”
부모님이 알려 준 사실인데 불경하게도 산오는 흥, 하고 비웃었다.
“3호나 칠칠이나.”
그리고는 관대한 척 말했다.
“산오가 훨씬 낫다.”
“그럼 산오라고 부를까?”
“그러든지.”
사실 산오에게는 칠칠이보다는 산오가 더 잘 어울리긴 했다. 정연이 빙긋 웃었다.
“그럼 성은 뭐야?”
“없는데.”
성 같은 게 왜 필요하지? 산오는 눈으로 그렇게 묻고 있었다. 정연이 심각하게 팔짱을 꼈다.
“이름이 있으면 성도 있어야지. 이산오? 윤산오? 박산오? 안 어울리는데. 뭐 기억나는 거 없어?”
“……연구원들이 제3호라고 부르긴 하는데.”
“제산오? 괜찮은데?”
“…….”
1초 만에 정해진 성씨에 산오의 눈썹이 마뜩잖다는 듯 구부러졌다. 그러나 제산오, 제산오, 하고 읊조리며 하루 종일 불러 대는 정연을 말리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