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뭐지?”
종아리에 겨우 닿는 높이의 낮은 창이었기 때문에, 정연은 털썩 주저앉아 상체를 한껏 숙여서 들여다보았다. 고개를 빼꼼 내밀자 창 너머가 좁은 시야로 비쳤다.
정연 또래의 남자아이가 엎드려서 턱을 괴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을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이지만 그때 그 남자아이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와, 근데……. 정연은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이렇게 잘생긴 애는 처음 봤다. 연예인인가? 배우? 세상만사에 관심 없는 것처럼 무덤덤한 얼굴인데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삼촌은 애가 놀랄 수 있으니 만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하긴 했지만, 정연을 보고도 무덤덤한 것 같았다. 그럼 괜찮은 거 아닌가? 정연은 제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너 이름이 뭐야?”
건너편의 남자아이는 잘 들리지 않는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정연은 조금 더 크게 소리쳤다.
“너 이름이 뭐냐고.”
남자아이의 입술이 뭐라 달싹였다. 유리창 때문에 흐릿한 초성밖에 들리지 않았다. 정연은 리스닝 시험이라도 보는 것처럼 잔뜩 집중해서 입 모양을 노려보았다. 산, 오. 산오? 독특한 이름이었다.
“산오구나. 난 정연이야. 이정연.”
산오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눈썹을 까딱였지만, 그 모습마저도 잘생겨서 정연은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산오와 조금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넌 몇 살이야?”
턱을 짚지 않고 있는 다른 손이 네 손가락을 폈다. 정말로 정연과 동갑이었다! 정연이 신나서 외쳤다.
“나랑 친구네. 나도 14살이야!”
산오가 또 뭐라 중얼거렸다. 그런데 잘 알아듣기가 힘들어서, 정연은 음, 하고 심각한 얼굴로 고민했다. 안에서는 못 만나려나?
“너 방이 거기야? 놀러 가도 돼?”
정연의 질문에 산오는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꾸욱 다물었다. 왜 저러지? 정연은 그가 입을 열 때까지 말똥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산오는 오히려 몸까지 일으켜 가 버렸다. 어, 어. 덩그러니 남겨져 당황한 눈동자가 빠르게 깜빡였다.
그 후로 정연은 산오의 방을 찾기 위해 돌아다녔다. 연구소를 탐험하겠답시고 이리저리 돌아다닌 전적이 있다 보니 구석구석을 헤매고 다녀도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들어가면 안 되는 구역을 빼고 돌아도 연구소는 충분히 넓었다. 정연은 새로운 방이 보면 슬쩍 열어 보았으나, 혼자서는 열리지 않거나 빈방일 때가 많았다.
결국 정연이 무언가를 찾는다는 것을 삼촌도 알게 되었다. 저녁 시간, 삼촌은 정연에게 물었다.
“요즘 뭘 하고 다니는 거니?”
정연은 조금 고민했지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전에 제가 도와줄 수 있다고 한 아이 있잖아요, 걔를 봤어요.”
“뭐? 어디서?”
“산책하다가…….”
우물쭈물 꺼낸 말에 삼촌은 난감하다는 듯 미간을 누르고는 깊게 고민이라도 하는지 말이 없었다. 정연은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걔랑 놀면 안 돼요? 삼촌 말 더 잘 들을게요. 조금만 놀고 잠도 일찍 잘게요.”
“음…….”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이리저리 생각하던 삼촌은 어렵게 입을 뗐다.
“원래는 안 되지만, 정연이가 도움이 많이 되고 있으니까 특별히 허락해 주는 거야.”
“와! 고맙습니다.”
정연이 신난 얼굴로 머리를 꾸벅였다. 삼촌은 그 대신 삼촌 말 정말 잘 들어야 한다며 신신당부하고는, 그 아이의 방으로 가는 건 안 되지만 다른 방에서 만날 수 있게 해 준다고 했다.
산오를 만날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 삼촌이 말할 때마다 고개를 연신 끄덕거린 정연은 그날 특별히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꿈에서 멋있게 생긴 얼굴이 아른거렸다.
“산오야!”
다음 날, 아침을 부리나케 먹고 삼촌을 졸라 드디어 산오와 만났다. 삼촌이 안내한 방은 엄청나게 커다란 공간이었다. 정연의 반 교실보다도 훨씬 컸다.
넓은 방의 입구에서 들뜬 얼굴로 손을 흔드는 정연을 발견한 산오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 뒤에 있는 삼촌을 보고서는 다시 표정이 가라앉았지만.
“3호. 오늘 기분은 어떻지?”
“나쁘지 않다.”
3호? 특이한 별명이었다. 정연이 산오에게 다가가자, 삼촌은 재미있게 놀라며 손을 흔들고는 문을 닫아 주었다. 냉큼 옆에 앉은 정연이 방금 든 궁금증부터 물었다.
“삼촌이 왜 널 3호라고 불러?”
“삼촌?”
산오의 눈이 순식간에 스산해졌다. 눈에 띄게 팽배한 적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정연이 움찔했다.
“너도 똑같은 놈이군.”
“뭐, 뭐가?”
“저리 꺼져.”
그 말과 함께 산오는 아예 등을 돌리고 앉았다. 이전에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냉대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정연이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댔다.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산오의 얼굴을 보려고 돌아가 봐도 산오는 고개를 돌려 가며 고집스레 시선을 피했다. 정연은 결국 포기하고 산오와 조금 떨어진 곳에 다시 앉았다.
“내 이름은 이정연이야. 열네 살.”
“…….”
“네 이름은 산오지?”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 등에 대고, 정연은 열심히도 떠들었다.
“방학 동안 삼촌이 좀 도와 달라고 해서 온 거야. 너 아프다며. 내가 너를 도울 수 있다고 하셨어. 열심히 채, 협조도 하고 있고.”
“…….”
“여기 나랑 동갑은 너뿐인데, 우리 친구 하면 안 돼?”
“…….”
“……싫어?”
정연의 어조는 점점 시무룩해졌다. 벌써 내가 입양아라는 걸 알아차렸나? 그런 말은 한마디도 안 했는데. 왜 아무도 저와 친구를 해 주지 않는지 조금 억울했다. 새 부모님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해서 전혀 후회가 없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네가 날 돕는다고?”
그때, 산오에게서 사나운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느닷없이 기대도 않던 대답이 돌아와 정연이 바짝 긴장했다.
“응. 삼촌이…….”
“네가 날 나비로 만들어 준다는 건가?”
“……나비? 난 그런 건 못하는데…….”
정연이 당황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의 능력으로는 나비를 만들 수는 있었지만, 사람을 나비로 바꾸지는 못했다. 맹한 반응에 산오가 코웃음을 쳤다. 그 소리가 어찌나 거했는지 아이 두 명이 있기엔 지나치게 넓은 방에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
정연의 눈썹이 가파르게 치켜 올라갔다. 슬슬 그의 성질도 한계였다. 얼마 전 창문을 두드리며 저를 불렀을 때와는 너무 다른 태도가 아닌가.
이런 놈인 줄 알았으면 삼촌에게 조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꼭 산오가 아니더라도 정연이 연구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산더미만큼 많았다!
나라고 뭐, 네가 엄청 좋아서 친구 하고 싶은 줄 알아? 그냥 친구가 있으면 부모님이 좋아하니까 그런 건데. 정연이 속으로 씩씩댔다. 일부러 엄선한 얄미운 말들을 되뇌고 나니 조금 침착해졌다.
정연은 고집스레 저를 등진 뒤통수를 빤히 노려보았다. 이렇게 넓은 곳이라면 그 혼자서도 잘 놀 수 있었다. 전혀 문제없었다. 작은 손이 움찔거리자, 바닥이 하얗게 빛났다.
곧 두 사람이 닿은 곳을 제외한 모든 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왔다.
햇볕을 받은 빙판이 반짝였다. 정연은 제 신발 사이즈의 스케이트화까지 만들어 신었다. 갑작스레 바뀐 바닥과 뒤에서 한껏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산오 역시 궁금하지 않을 수는 없었는지, 시선이 흘끗 돌아왔다. 정연은 제가 화가 났다는 것을 표현하듯 고개를 홱 돌렸다.
아이스 링크장은 부모님과 작년 겨울 한 번 가 본 게 다였다. 함께 빙판을 달린 게 재미있었다는 사실이 불현듯 기억나서 충동적으로 만들어 본 거였다. 선천적인 운동 신경 덕에, 매끄러운 얼음을 따라 몇 바퀴를 돌자 금세 균형 잡는 것에 익숙해졌다.
속도를 붙여 미끄러지는 것에 재미가 들려 정연은 산오를 내버려 두고 신나게 달렸다. 가끔 중앙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산오를 흘끗 쳐다보긴 했지만, 절대 그를 신경 쓰는 건 아니었다.
산오의 스케이트화는 일부러 만들어 주지 않았다. 정연은 산오랑 별로 놀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이게 뭐냐고 물어보면 그때 만들어 줘야지.’
유치한 생각이 제가 밟고 있는 얼음처럼 마음을 꽁꽁 둘러쌌다.
빙판을 뱅글뱅글 도는 사이 바닥에서 올라온 냉기가 몸에 스며들었다. 몸을 부르르 떤 정연은 털 외투와 장갑도 만들어 입었다. 창밖은 해가 쨍쨍한 여름인데 안은 이렇게 시원한 공간이라는 점도 재미있었다.
그런데도 산오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스케이트화를 신는 정연을 잠깐 본 이후로 산오의 시선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게 왠지 억울하고 서운했다. 앉아서 조는 거 아냐? 정연이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오도카니 앉아 있는 산오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리고 끼긱, 하는 소리와 함께 정연이 멈춰 섰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