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여름 캠프는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활동이었다. 같은 반 친구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을 얼핏 들어 본 정도였다.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정연은 괜히 들떴다. 꼭 어른이 된 것 같았다.
부모님은 원하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정연은 참여하고 싶다고 고개를 저었다.
“형이랑 형수보다 정연이가 더 의젓한 것 같아.”
“하지만…… 이 귀여운 것을 방학 내내 못 본다니.”
어머니는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정연의 신나는 마음을 무겁게 만든 것도 그 부분이긴 했다. 긴 기간 부모님을 못 본다는 것.
이렇게 오래 떨어져서 지내는 건 처음이었다. 중간에 부모님이 보고 싶어지면 어쩌지. 그런 상상을 하니 조금 기분이 처졌다.
“엄마랑 아빠가 연구소로 놀러 오시는 건 안 돼요?”
정연이 삼촌에게 묻자, 삼촌은 조금 고민하는 듯했다.
“음……. 그 정도야 가능하지.”
“와!”
부모님은 뿌듯한 얼굴로 저희를 돌아보는 정연을 보고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밥 잘 챙겨 먹기, 일찍 자기, 매일매일 전화하기……. 여러 가지를 신신당부하는 얼굴에 대고 정연은 부모님이 안심할 수 있을 때까지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결국 떠나는 날에 조금 우셨다.
“……가지 말까요?”
마음이 약해진 정연이 열린 창문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뿌듯해하는 부모님을 보고 싶었던 거지, 우는 어머니를 보려고 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하고 싶은 거라면 뭐든 해도 돼.”
머리를 쓰다듬는 커다란 손길은 평소와 똑같았다. 그래서 정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삼촌의 연구소는 길이 울퉁불퉁한 산속에 있었는데, 엄청나게 컸다. 새하얀 건물은 정연이 심심풀이로 만들어 내던 것들과 비슷한 색깔이었다.
정연은 삼촌의 옆 방에 짐을 풀었다. 커다란 창문에는 푸른 숲이 잔뜩 비쳤다. 집에 있는 방보다는 조금 좁지만 의자와 책상, 침대까지 있을 건 다 있는 곳이었다. 보육원과는 당연히 비교할 바도 못 되었고.
삼촌은 연구소를 소개해 주겠다며 정연을 이끌었다. 넓은 연구소는 어디든 돌아다녀도 괜찮았지만, 몇 군데만큼은 들어가면 안 된다고 했다. 그곳에 보관된 중요한 자료들이 실수로 날아가면 그동안 했던 일들은 물거품이 될 거라고. 정연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잘 기억해 두었다. 혹시라도 잘못 들어가서 삼촌이 슬퍼하면 안 되니까.
“그리고 두 가지만 더.”
손가락을 두 개 치켜든 삼촌이 하나씩 꼽았다.
“휴대폰 촬영은 절대 하면 안 돼. 인터넷이 안 돼서 할 수 있는 게 없긴 하겠지만, 아무튼 휴대폰은 엄마 아빠한테 안부 전화 할 때만. 그리고 정연이는 예외지만, 원래 일반인에게 연구 내용이 공개되면 안 되거든. 그러니까 연구소에서 있었던 일은 엄마 아빠한테도 말하면 안 돼.”
“그럼 전화로는 무슨 대화를 해요?”
“네 일상은 괜찮아. 뭐 먹었는지, 오늘은 뭐 하고 놀았는지 같은 거. 연구소에서 하는 연구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으면 돼. 정연이는 똑똑하니까 무슨 소리인지 알지?”
그렇게 말하는 삼촌은 드물게 엄격한 얼굴이었다. 삼촌은 연구소가 굉장한 보안 레벨을 요구한다고 했고, 이것이 잘못되면 삼촌 자신도 큰일이 난다고 몇 번이고 당부했다. 당연히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았다. 정연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연이 할 일은 사흘에 한 번, 삼촌의 연구 분석을 도와주는 거였다. 삼촌의 표현을 빌리자면 ‘협조’.
“넌 그냥 얌전히 있기만 하면 돼. 나머지는 삼촌이 알아서 할게.”
“네에…….”
정연은 마냥 어린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협조가 대단히 두루뭉술한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삼촌은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려운 개념이라 쉬운 단어를 고른 거라고 했다.
아이를 직접 돌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조금 아쉬웠다. 다회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연은 정말 잘할 자신이 있었으므로……. 그래도 뭐든 간에 도움을 주는 거니 좋은 일일 것이다. 낙천적으로 생각하며 삼촌을 따라 복도를 돌다가, 문이 살짝 열린 방 하나를 발견했다.
정연은 삼촌에게 이끌려 가다 말고 멈춰서서 조그마한 틈에 시선을 고정했다. 곧 삼촌이 멈춰선 정연을 보고 함께 시선을 돌렸다.
“아, 문단속이 아직 조금 덜 됐구나.”
삼촌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문을 닫았다. 그러나 정연은 짧은 순간, 분명히 봤다. 커다란 모니터 여러 대가 그 안에 있었다. 방 하나를 각기 다른 각도에서 찍는 것 같은 영상들이었다.
그 안에 있는 것은 남자아이였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가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저건 누구예요?”
정연의 물음에 삼촌이 약하게 웃었다.
“정연이가 도와줄 수 있는 아이.”
아, 쟤가 걔구나. 생각보다 나이가 있었다. 아이라고 해서 막연히 유치원생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를 생각했는데, 얼핏 보기에는 정연과 또래로 보였다.
“여긴 저 아이뿐이에요?”
“지금은 그렇지.”
사실 정연은 또래여서 조금 더 좋았다. 여태껏 반에서 소외되어 친구가 한 명도 없었으므로, 이 아이와 친구가 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삼촌은 아이가 놀랄 수 있으니 그 아이를 되도록이면 찾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조금 아쉬웠지만 삼촌과 놀면 되니 괜찮았다. 그 후로 정연은 삼촌이 연구소 구경을 시켜 주면서 설명을 해 주는 것을 깊게 새겨듣느라 남자아이에 관해서는 빠르게 잊어버렸다.
연구소 생활은 평화로웠다. 내부는 대체적으로 조용했지만, 종종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긴 했다. 그들은 언질받은 것이 있는지 정연을 금방 알아보았고, 하나같이 친절했다.
기본적인 친화력이 나쁘지 않은 정연은 곧 연구원들을 형 누나라는 호칭으로 부르며 안부 인사를 건네는 정도까지 발전했다. 어떤 연구원은 숨어 있기 좋은 장소를 소곤거리며 알려 주곤 했다.
하지만 연구원들에게 정연과 놀아 줄 만한 시간은 없었다. 사실은 그럴 의향도 없어 보였고. 정연과 놀아 주는 건 삼촌의 담당이었다.
정연은 삼촌과 밥을 먹었고, 남는 시간에는 책을 읽거나 연구소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쉬는 시간을 받은 삼촌과 보드게임을 하고, 연구소 근처의 풀밭에서 낮잠을 자고, 햇살이 내리쬐는 커다란 창문 앞 책상에 앉아 숙제를 했다.
저녁을 먹고 난 다음에는 부모님께 꼬박꼬박 통화를 했다. 부모님은 하루 종일 정연이 뭘 하고 놀았는지에 대해 매일매일 궁금해했고, 정연은 어제와 같은 걸 했어도 성심성의껏 설명해 주었다. 통화는 늘 사랑한다는 말로 끝났다. 그러고 나면 정연은 휴대폰을 꼭 쥐고 행복하게 잠들었다.
삼촌은 최대한 노력해 주었지만, 그 역시 일을 해야 했으니 정연이 원할 만큼 놀아 주는 건 불가능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걸 아무리 많이 가져와도 조금 심심하긴 했다. 정연이 뚱한 얼굴로 책상에 엎드려 문제집 종이만 팔랑팔랑 넘기고 있을 무렵,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정연아, 가자.”
삼촌이었다. 벌써 ‘협조’할 시간인가 보다. 정연이 벌떡 일어섰다. 책상 상판에 눌린 뺨이 금세 통통하게 되돌아왔다.
삼촌이 말한 대로, 협조라는 건 몸에 무언가를 붙인 다음 몇 분 정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하고 나면 조금 힘이 빠지기는 했지만, 한숨 자고 나면 말짱해졌다. 간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번 협조도 금방 끝났다. 결과를 정리해야 하니 먼저 나가도 된다고 해서, 정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갈 때까지 삼촌은 모니터에 코를 박고 화면을 심각하게 바라보느라 정연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방을 나오다가, 정연은 무심코 위를 바라보았다. 눈높이보다 한참은 위에 있는 명패에 ‘채취실’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그는 단번에 자신이 하던 협조가 일종의 채취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헌혈이랑 비슷한 건가 보네. 정연은 가볍게 생각했다.
하지만 삼촌은 피를 뽑을 때처럼 몸을 찌르거나 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몸에 천을 붙이는 게 다였다. 이런 게 어떻게 채취인 건지 이해가 힘들었다. 궁금증이 생긴 정연은 다음 채취 때 슬쩍 삼촌에게 물어보았다.
“이걸로 진짜 걔를 도울 수가 있어요?”
“당연하지. 이미 많이 좋아졌어.”
삼촌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믿음직스럽게 말했기 때문에, 정연 역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스치듯 본 아이는 어딘지 모르지만 아픈 부분이 있고, 정연의 채취로 점점 나아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 나으면 나랑 놀 수도 있을까? 친구 하면 좋겠다.
정연은 제대로 된 친구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은 가끔 그에게 친구를 집으로 데려와도 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때마다 데려올 친구가 없다고 대답하는 것도 괜히 미안했다. 그 아이와 친구가 되면 부모님이 틀림없이 기뻐하실 것 같았다.
그러던 중의 날이었다. 사박. 사박. 햇볕에 마른 풀을 밟는 소리가 기분이 좋아 연구소 근처를 돌며 산책을 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발밑만 보며 걷던 정연은 무언가 두드리는 소리에 옆을 돌아보았다. 새하얀 연구소 외벽의 아래에는 가로로 좁고 길쭉한 창이 연속해서 나 있었는데, 정연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의 창에서 조그만 주먹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