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8. 나비 실격
이정연이라는 이름을 받게 된 것은 열두 살 무렵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아이는 어른들의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이런 일이 흔하지 않다는 것도, 정말 운이 좋았다는 것도. 눈치를 남들보다 더 봐야 한다는 태생적 환경 탓도 있었지만, 그냥 그런 걸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나이기도 했다.
입양이 결정된 날, 보육원 원장은 아이를 불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개중 대부분은 쓸모없었으나 아주 가끔은 그럴듯한 말이 나왔다. 이를테면 하얗고 순하게 생겨서 좋게 보신 것 같다는 정보 같은 거.
마지막으로 원장은 부모님이 있는 건 정말로 다른 느낌일 테니까, 마음껏 사랑받고 자라라고 했다. 그 말은 기묘하게도 뻐기는 것처럼 들렸다.
낯선 집으로 온 아이에게 새로운 부모님이 가장 처음 알려 준 것은 아이의 이름이었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정연이야. 내 성이 이 씨니까, 이정연.”
새로운 아버지는 제가 말해 놓고 조금 눈치를 보며, 혹시 이름이 마음에 안 들면 원하는 이름으로 바꿔도 된다고 했다. 새로운 어머니는 이름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깨끗할 정(淨), 연꽃 연(蓮).
이정연. 입 안에서 아주아주 부드럽게 굴러가는 이름이었다. 깨끗한 연꽃이라는 뜻도 좋았다. 언젠가 사진으로 연꽃을 본 적 있었다. 예쁜 꽃이었다.
이 이름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정연은 고개를 저었다.
“이정연이 좋아요.”
부모님은 다행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그들은 정연에게 좋은 옷도 주고, 맛있는 음식도 주고, 커다란 방도 주었다. 방에는 커다란 침대와 널찍한 책상, 여러 가지 장난감과 책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처음에 정연은 부모님에게 의사 표시를 하는 것도 조금 낯설어했다. 그러나 부모님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연이 부르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고, 대화할 때에는 눈을 보고, 식사할 때에는 맛있는 반찬을 집어 주었으며, 잘 때에는 머리를 쓰다듬고 뽀뽀해 주었다.
그러나 정말로 부모자식지간인 것처럼 행동할 수는 없었다.
정연은 부모님의 행동에 대체로 고분고분했지만, 본인이 나서서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 해도 괜찮은 건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단지 그런 걸 알고 싶다는 이유로 선을 넘고 싶지도 않았다.
부모님이 어려웠을 뿐이지, 싫은 게 아니었다. 소년은 부모님이 저를 좋아해 줬으면 하고 바랐다.
어느 날인가부터, 부모님은 정연에게 용돈을 조금씩 주기 시작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군것질도 하고, 친구들이랑 놀러도 다니라고 주는 돈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정말 이걸 써도 되는지 아닌지 헷갈려서 받은 돈을 차곡차곡 모아 두기만 하다가, 지독하게 더운 여름 하굣길에 참지 못하고 하드를 하나 사서 먹었다. 달고 시원한 군것질에 행복해졌지만 왠지 이 모습을 부모님에게 보여 드리면 안 될 것 같았다. 정연은 일부러 평소에 다니던 길보다 먼 길로 접어들었다.
도시에서 보기 힘든 한적한 흙길은 목가적인 느낌이 났다. 하드를 할짝대며 걷기 딱 좋은 길이었다. 정연이 팔을 흔들대며 걷고 있는데, 저 멀리서 언뜻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컹……. 철컥, 철컥! 짤랑!
날카로운 금속 소리 사이에 사나운 짐승 울음이 들렸다. 심상치 않은 소리에 정연은 우뚝 멈추어 섰다가, 조심스레 길을 벗어나 소리가 난 쪽으로 다가갔다. 들키지 않을 정도로 살금살금 다가간 소년은 몸을 숨기고 상황을 살펴보았다.
성인 남자의 덩치만 한 커다란 변이종과 자그마한 고양이가 대치하고 있었다.
사자를 닮았으나 사슴의 뿔이 달리고 눈이 다섯 개인 변이종의 목에는 굵은 쇠사슬이 아무렇게나 묶여 있었다. 목이 졸릴 정도로 강한 강도였지만, 변이종이라 그런지 엄청나게 아파하거나 큰 상처가 나지는 않았다.
반면에 새까만 털을 온몸에 두른 아기 고양이는 정연의 품에 쏙 들어올 만큼 작았다. 등을 잔뜩 부풀리고 하악질을 하는 등 나름대로 기세를 세우려는 것 같았으나, 누가 봐도 변이종에게 한 입 거리였다.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지 않은 걸 보니 변이종이 조금만 움직여도 고양이에게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지, 하고 초조하게 그 상황을 지켜보던 정연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길거리에서 변이종을 만났을 때에는 반드시 신고를 할 것. 유치원 때부터 배우는 상식이었다.
“여보세요? 저기, 제가 변이종을 봤는데요…….”
신고 담당자는 아이가 위험하지 않은지 확인 후, 곧 헌터를 배치하겠다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어물어물 통화를 마친 정연은 다시 변이종과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헌터가 오기 전까지는 꼼짝 말고 지켜보며 그들을 감시할 요량이었다. 변이종이 안 움직이면 좋겠는데…… 정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도망칠 생각을 않는 고양이를 초조한 눈으로 훑었다.
안타깝게도 정연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으르릉…….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변이종에게서 흘러나왔다. 상황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전개되었다.
먼저 달려든 것이 변이종인지 고양이인지 정연은 알아채지도 못했다. 순식간에 두 짐승이 엉켰다. 뒤늦게야 짧은 비명이 터졌다.
“어……!”
당연하게도, 크기부터 차이 나는 고양이가 변이종의 상대가 될 리가 없다. 고양이는 곧 강하게 후려쳐져 맥없이 날아갔다. 축 늘어진 고양이를 향해 변이종이 느긋하게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상대에게 승산이 없다는 것을 넘치도록 아는 포식자의 움직임이었다.
정연의 손에 순간 힘이 들어갔다. 그 직후 벌어진 상황은 계산된 행동이 아니었다.
탁. 가벼운 마찰음이 변이종에게서 났다. 거대한 뿔이 흔들리며 변이종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 아래로 떨어진 것은 다 먹은 하드의 나무 막대기였다.
변이종이 상황을 파악하는 찰나, 작은 아이의 몸이 날쌔게 뛰어나갔다. 변이종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마주 들이받기 위해 자세를 낮추었으나, 정연은 변이종에게로 돌진하지 않았다. 그는 멀리 날아간 고양이에게 그대로 달려가 작은 동물을 잡아챘다.
캬악……! 정연이 검은 고양이를 품에 안는 것과 동시에, 기절한 줄 알았던 고양이가 거세게 몸부림을 쳤다. 팔에 선명한 생채기가 여러 줄 나고, 발을 구르면서 난 흙먼지에 옷이 엉망이 되었다. 하지만 정연은 오히려 팔에 힘을 주었다. 아기 고양이의 공격 때문에 제가 죽을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놔두면 고양이는 변이종에게 죽을 것이다.
그런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알싸한 고통을 애써 참으며 걸음을 옮겨 나가자, 상황을 파악한 변이종이 으르렁거리며 정연에게 다가왔다. 거대한 짐승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정연과 변이종의 거리는 단숨에 가까워졌다. 금세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긴장하며 재게 놀리던 발끝이 한순간 무뎌졌다.
발이 꼬인 몸이 비틀거리는 듯싶더니 풀썩 넘어졌다. 정연은 균형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고양이에게 충격이 가지 않도록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변이종에게 등을 보였다. 발버둥 치던 고양이가 어느새 조용해졌다는 건 알 겨를도 없었다.
변이종이 조그만 등을 향해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철컹! 철컹! 철컹!
“…….”
한참이 지나도 요란한 소리만 들릴 뿐 아픔이 느껴지지 않자, 정연이 질끈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실눈으로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니, 눈앞에서 변이종이 으르렁대며 몸을 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변이종이 정연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매여 있던 목줄 덕분에 아슬아슬한 거리가 유지되었다. 간신히 범위 밖을 넘어온 것이다.
“……하아아…….”
힘이 풀린 정연은 일어나지도 못하고 엎드린 채로 긴 숨을 내쉬었다. 미친 듯이 두근거리던 심장이 조금 진정이 된 후, 고양이가 무사한지 보기 위해 고개를 막 내리려고 할 때였다.
“꼬마야! 괜찮니?”
허공에서 두엇 정도의 사람이 나타나더니 엉망이 된 정연을 발견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게 순간 이동 능력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헌터들은 곧 정연을 위협하던 변이종을 빠르게 제압했다. 정연에게는 그토록 무섭고 대단한 짐승이었는데, 헌터 아저씨에게는 별것도 아닌 것 같았다. 멋있다……. 어딘가와 통화하며 분주히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정연이 문득 고양이를 다시 생각해 내고 품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고양이가 없었다.
“어?”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 정연이 고개까지 이리저리 돌려 가며 구석구석 살폈으나, 역시 없었다. 난리통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뒤늦게 상처를 입은 팔과 가슴, 배가 따끔따끔하게 아파 왔다.
그 사실들이 묘하게 서운하고 서글펐다.
“……으…….”
동그란 눈동자가 순식간에 젖었다. 방금까지 잘 있다가 난데없이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를 발견한 헌터들이 깜짝 놀라 정연에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