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86화 (85/250)

#86

앞뒤 없이 같이 가자고 땡깡을 부리는 게 그냥 사회성만 없어서 그런 줄 알았더니, 양심도 없어서 그런 거였다. 아마 상인은 이연이 원래라면 5급 변이종을 상대하기도 어려운, 무궁화 2단의 하급 헌터라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굳이 아르바이트의 형태로 동행한 것은 혹시 모를 비상사태가 생겼을 때 멀리 놀러 나가 있으면 곤란하니까…… 이 인간이 진짜. 이연이 노려보자 재경은 시선을 피하며 설명을 계속했다.

이연에게는 평범한 아르바이트라고, 의뢰인에게는 보험이라고 서로를 속인 재경은 계획대로 이연과 함께 호텔에 도착해 평범한 아르바이트를 하는 척하고, 매일 밤 상인과 모여 방독면을 끼고 악몽코끼리의 연기 주머니를 떼는 시늉을 했다.

아무리 죽일 의도가 없다고 해도 아예 상처를 입히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나마 재경의 힘 정도로는 악몽코끼리가 절대 죽지 않을 거란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독하게 마음을 먹고 악몽코끼리의 배를 힘껏 공격했다.

“그래서 배에 상처가…….”

제 배에 상처가 나는데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악몽코끼리는 가냘프게 울부짖으며 몸을 비틀었으나 그들의 손을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고통이 심했는지 낮 동안 방에 있을 때에도 우리 벽에 머리를 박는 자학을 했다고 한다.

“맞아요. 저도 쿵쿵 하는 소리 들은 적 있어요.”

“진짜?”

이연의 말에 혜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혜강은 해가 떠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수영장에서 뒹굴대고 있어 듣지 못한 듯했다.

그렇게 상인의 의뢰를 하는 시늉을 하던 재경은 숨죽여 적당한 타이밍을 기다렸다. 거사일은 모두가 불꽃놀이를 보느라 신경이 쏠렸을 밤. 마침 일기 예보에서는 비까지 온다고 했다.

산책로 근처의 숲으로 작업 장소를 정한 것은 당연히 계획적인 선정이었다. 비가 오는 어두운 숲속에 들어가 수색해서 무언가를 찾을 확률은 0%에 수렴했다. 악몽코끼리가 제대로 도망치는 데에만 성공한다면, 무사히 자유를 얻을 터였다.

재경은 상인의 독촉에 못 이겨 이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연이 불꽃놀이에 정신 팔려 연락을 받지 않았으면 금상첨화였겠지만, 그 정도로 운이 좋지는 못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재경의 예상 범위 내였다.

“그런데 여기서 변수가 있었지.”

“변수요?”

“너희.”

재경의 시선이 혜강과 산오, 그리고 뭉치를 둘러보았다. 이연 혼자 올 거라고 예상하고 계획을 짰던 것과 달리, 차금의 전 직원이 줄줄이 따라왔다.

이연 혼자만 있다면 모를까, 산오까지 있다면 도망친 변이종을 찾는 수색 난이도는 훨씬 내려간다. 재경에게는 좋지 않은 신호였다.

“저기요. 지금 저 무시하세요?”

“아니……. 휴가 왔는데 그림 그릴 도구를 들고 오진 않았을 거 아냐. 그리고 그 어두운 밤에 뭘 어떻게 그리겠어?”

확 산을 다 뒤엎어 버리고 악몽코끼리를 데려올 걸 그랬다. 이연이 불만스레 입을 다물자, 재경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뭉치가 문제였지.”

제 이름을 알아들은 뭉치가 고개를 치켜들고 재경을 노려보았다. 부정적인 소리를 귀신같이 알아채는 똑똑한 변이종은 이연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나서야 순순히 몸에서 힘을 뺐다.

재경은 뭉치가 숲속에 있다는 사실을 들은 순간 망했다고 생각했다. 잡아와 달라고 부탁하면 알아듣는 사람과는 다르게—그 사람이 말을 들을 거라는 생각은 둘째치고—, 짐승에 한없이 가까운 변이종이 상대를 가려 가면서 공격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악몽코끼리는 같은 변이종조차 꺼리는 존재 아니던가.

그래서 갑자기 다급해진 것이다. 청호와 악몽코끼리가 만나면 당연히, 악몽코끼리가 죽을 테니까.

“악몽코끼리 진짜 못 본 거 맞아? 죽은 거 아니지?”

그 와중에도 그게 궁금한 모양이다. 이연은 심술궂은 눈으로 재경을 바라보며 말해 줄까 말까 고민했으나, 이내 순순히 입을 열었다.

“봤어요.”

“뭐, 진짜?”

재경이 눈을 크게 떴다. 뭉치를 흘끔흘끔 바라보는 게 완전히 확신범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사실 이연은 재경이 바라는 것처럼 악몽코끼리를 순순히 포획해서 데려올 생각이 없었다. 특별히 호전적인 종이 아니라면 전투로 쫓아내기만 하는 것도 용인되는 추세긴 했지만, 악몽코끼리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위협이 됐다. 뿜어내는 연기를 필요할 때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같은 실수가 다음에 또 벌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하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그냥 처치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 이연의 생각을 바꾼 건 뭉치였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이연의 옆에서 튀어나와 악몽코끼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뭉치는 숨어 있는 변이종에게 위협하듯 으르렁거렸다. 변이종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그게 명백한 명령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악몽코끼리는 상처가 영 신경 쓰이는지 꿈질대며 움직이기 싫어했으나, 뭉치가 한번 짖자 순순히 숲속으로 몸을 옮겼다. 산오는 그 과정마저도 귀찮아하며 그냥 죽이고 싶다는 기색을 내비쳤지만, 무언가를 직감한 이연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뚱한 얼굴로 얌전히 있어 주었다.

“안심하세요. 소적공으로 들어갔으니까.”

적공의 조그만 버전처럼 생긴 소적공은 소형 변이종들이 튀어나오는 주통로였다. 통로라고 해도 몇 시간이고 열려 있는 건 아니지만, 한번 생기면 몇 분 정도는 유지된다고 한다.

나올 수가 있으니 당연히 들어가는 것도 가능했다. 뭉치가 가라는 쪽으로 움직인 악몽코끼리는 곧 제가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만한 소적공을 발견했다.

변이종이 소적공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 같은 건 발견되지 않았지만, 악몽코끼리를 등 떠민 곳에서 우연히 소적공이 나타났다는 건 수상하긴 했다. 2급 변이종이라는 등급이 허투루 판단된 건 아닐지도…….

“와, 그럴 수가 있구나. 이건 또 흥미로운데…….”

“어림없어요.”

이연은 몸을 돌려 뭉치를 향해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내는 재경의 시선을 차단했다. 재경도 크게 조를 생각은 아니었는지 입맛만 쩝쩝 다시고 말았다.

“괜히 재경 씨 계략에 말려서 다리나 다치고……. 이래서야 방에서만 자리보전하게 생겼네.”

뿐만 아니라 감기도 걸리게 생겼다. 스스로 이마를 짚어 보자 따끈한 기운이 번졌다. 움직이는 데에 큰 지장이 없어 티는 내지 않았지만, 하루 정도는 푹 쉬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악몽코끼리가 변이종 암시장에서 팔렸으면 매일매일 연기만 뽑히다가 죽었을 거야.”

재경이 풀 죽은 얼굴로 말했다. 보관과 축적 문제로 기각되긴 했지만, 악몽코끼리의 연기는 실제로 국립 연구소에서 무기로 사용하자는 논의도 된 적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폐기된 사안이어도, 음지에서는 그런 게 없었다. 변이종의 환각 연기를 이용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어디든, 누구에게든.

“됐거든요.”

이연이 투덜거렸다. 뭐라 말을 덧붙일 힘도 안 났다.

“이 기회에 오지랖도 고쳐.”

기회를 놓치지 않은 산오가 냉큼 구박했다. 맞는 말이라 할 말도 없었다.

아르바이트야 그렇다 치더라도, 기껏 이렇게 좋은 곳까지 와서 방에만 처박혀 있는 건 아쉬웠다. 울적해하는 어깨를 툭툭 두드린 혜강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한테 말 걸던 사람 중에 치유계 초능력자 있던데, 등급이 낮다고 해도 발목 삔 것 정도는 고쳐 줄 수 있지 않을까? 부탁해 볼게.”

이연의 얼굴이 환해졌다. 감기 같은 바이러스성 질병은 몰라도 외상은 초능력으로 치유가 가능했다. 역시 인기남이 최고다.

그 후로도 이어진 압박 섞인 면담의 결과, 보답으로 재경은 남은 아르바이트 기간 내내 혼자서 가게를 지켜 주었다. 덕분에 이연은 하루 동안 얌전히 침대 신세를 지고 말끔히 나은 후 혜강과 산오, 그리고 뭉치와 함께 느긋한 휴가를 즐길 수 있었다. 스파, 인피니티 풀, 사우나, 산책로. 재경이 침을 튀기며 홍보하던 호텔 서비스는 과연 최고였다.

“여기가 천국이구나…….”

막 스파를 받고 나온 이연의 얼굴은 반들반들했다. 중간에 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 혜강의 인맥으로 흔적도 없이 싹 나았고…… 이 정도면 첫 휴가치고는 만족스러웠다.

이래서 비싼 호텔을 가는 거구나. 내년에도 여기로 올까? 이연이 훈훈해진 마음으로 여유를 만끽했다.

“저녁은 뭐 먹을래?”

“방금 밥 먹었잖아.”

“그건 점심이니까.”

화장실에 간 혜강을 잠깐 기다리는 사이, 이연이 들뜬 어조로 물었다. 돼지런한 발언에 산오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못 보던 새 식탐이 늘긴 했군.”

“나 잘 먹는다니까.”

다시 만난 후로 꾸준히 어필한 부분인데 이렇게까지 사람을 못 믿어도 될 일인가? 불신 사회 타파하여 믿음 사회 구축하자는 신실한 얼굴로 바라보자, 산오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대답을 하지 않는 걸 보니 저녁 메뉴도 내가 정해도 되는 모양이군. 이연이 휴대폰으로 ‘창주 호수 맛집’을 검색했다. 하얀 화면에 집중하느라 잠깐 조용해진 분위기에서, 덤덤한 목소리가 흘리듯 튀어나왔다.

“그리고 정이연이라고 불러 줘.”

“왜지?”

이연은 희미하게 웃었다. 시야 구석에 뿌옇게 끼는 하얀 잔상을 지워 내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 이름을 부를 사람은 모두 사라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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