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85화 (84/250)

#85

“뭉치야!”

이연이 반갑게 손을 흔들자, 뭉치는 머리를 한번 털고 달려왔다. 나무 사이를 날쌔게 뛰던 푸른 호랑이는 이연의 품에 안길 때쯤엔 평소 보던 조그마한 아기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재밌게 놀았어?”

뭉치가 속도도 줄이지 않고 그대로 박치기하듯 날아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지만 산오가 팔을 잡아 줘서 간신히 버텼다. 이연이 거하게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아기 호랑이는 제 덩치도 모르고 주인에게 잔뜩 애교를 부렸다. 그 몸부림에 이연은 뭉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뭉치야, 혹시 악몽코끼리 본 적 있어?”

슬슬 힘에 부친 이연이 자연스럽게 뭉치를 내려놓으며 묻자, 뭉치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긴, 인간이 붙인 변이종 이름을 뭉치가 알 리가 없다.

“코가 길고 네 발로 다니는, 발에서 연기 뿌리는 애 있잖아.”

손짓까지 곁들인 설명에 뭉치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살랑거리는 꼬리가 딱 멈췄다. 바닥을 꾹꾹 몇 번 누른 뭉치는 이연을 등지고 앞장섰다. 몇 발자국 갔다가 멈춰서 그들을 바라보는 모습에 이연과 산오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뭉치는 두꺼운 나무의 줄기 아래 뿌리가 드러나 마치 동굴처럼 파인 곳에 그들을 안내했다. 거기엔 잔뜩 웅크려 있는 악몽코끼리가 있었다.

“같이 있었어?”

뭉치는 끼잉, 하는 소리를 내며 이연의 다리에 꼬리를 감았다. 악몽코끼리를 보고도 가만히 있었다니, 이것도 주종론과 관련이 있는 건가? 얘도 굳이 분류하면 포유류긴 하지……. 뭐가 됐든 신기한 현상이었다. 이연과 산오, 뭉치는 조금 떨어진 풀숲 뒤에서 악몽코끼리의 동태를 확인했다.

나무 주변에는 악몽코끼리가 뿌린 보라색 안개가 눈에 보일 정도로 퍼져 있었다. 연기를 들이마시면 위험하니 근처로 다가갈 수는 없었다. 악몽코끼리는 연기 외에 별다른 공격 기술이 없는 덕에 산오나 이연의 능력을 사용하면 포획을 하는 것 자체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쟤……. 다친 것 같지 않아?”

눈을 잔뜩 찌푸리고 그늘에 묻힌 변이종을 살펴보던 이연이 중얼거렸다. 멀어서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머리와 배에 상처를 입은 흔적이 있었다. 경미한 타박상에 그친 것 같은 머리 쪽과 달리 배 쪽의 상처는 자상에 가까웠다.

처음에는 당연히 뭉치가 공격한 줄 알았으나, 곧 생각을 바꾸었다. 뭉치가 공격했다면 악몽코끼리는 살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용의선상에서 뭉치가 제외되었을 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그 인간들, 대체 무슨 조사를 한 거야?”

이연이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재경의 의뢰인은 암시장의 상인. 이연은 암시장에 한 번도 가 보지 못했지만, 하급 변이종뿐만이 아니라 중급 변이종도 왕왕 거래된다고 한다. 보통 변이종 암거래의 목적은 관상, 혹은 과시용.

그러나 악몽코끼리의 상처를 재경이 낸 거라면, 의뢰인은 이 변이종을 단순한 관상용으로 팔려고 했던 게 아니다. 그렇다면 남는 건 하나, 악몽코끼리의 특수 능력.

들이마시면 환각을 보는 연기.

“고작 1단이?”

산오가 비웃듯 중얼거렸다. 말투야 재수 없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악몽코끼리는 그래 봬도 변이종이다. 아무리 좋은 장비를 쓴다고 해도, 헌터가 아닌 사람이 피부를 쉽게 찢을 수는 없었다. 재경의 말을 들어 보면 분석할 때 헌터가 따로 동행했던 것도 아닌 모양이었고. 일반인 둘이서는 고작 흔적 정도가 한계였을 터였다.

지금 악몽코끼리의 배에 있는 옅은 자상 같은.

하지만 악몽코끼리 같은 희귀 케이스는 국립 연구소에서도 분석을 한다. 당연히 뿜어내는 연기의 출처가 어딘지에 대해서도 연구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다 할 쓰임새가 나오지 않은 건 성과가 없다는 뜻이고.

그런 정보를 재경이 몰랐을 리가 없는데.

혼란스럽게 악몽코끼리를 바라보던 이연의 눈이 한번 깜빡였다. 산오를 바라보자 그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한 듯 고개를 까딱이기만 했다.

설마.

*

“다녀왔어요.”

“형!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다리는 왜 그래?”

“이연 씨!”

산오와 이연, 뭉치가 호텔 방에 들어서자 모여앉아 그들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 반색했다. 재경, 혜강, 그리고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마스크를 착용한 상인.

“어떻게 됐어? 악몽코끼리는?”

가장 먼저 다가온 건 재경이었다. 재경은 이연과 산오의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본 끝에 악몽코끼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 순간 그의 눈에 스쳐 지나간 복잡한 감정을 이연은 놓치지 않았다.

“밤새 비가 내렸잖아요. 흔적이 씻은 듯이 사라졌더라고요. 아마도 숲 밖으로 사라진 것 같아요.”

여건이 너무 좋지 않았다. 바깥 날씨가 얼마나 험했는지는 호텔에 있기만 했던 사람들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먼저 의뢰를 맡겨 주신 분께는 죄송하지만…… 이미 저희 손을 떠났어요. 초관청에 신고하고 정식 처리 절차를 밟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이연이 어깨를 으쓱이며 의뢰인을 향해 말하자, 그는 낭패라는 듯 짜증 섞인 신음성만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실패한 거니 착수금만 받을게요.”

이연은 그렇게 말하며 제 다리를 슬쩍 들어 보였다. 어느 모로 보나 심하게 다친 행색이었다.

최선을 다해 의뢰를 하고 온 듯한 사람이 정중하게 사과하는 데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제 와서 어쩔 수 있는 방법도 없었고. 말없이 서 있던 의뢰인은 벌떡 일어서 성큼성큼 방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황급히 따르려던 재경의 팔을 붙잡은 이연이 낮게 속삭였다.

“우리 할 이야기가 좀 있죠?”

움찔한 재경이 이연을 바라보았다.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하여튼 맨날 이용할 생각만 하고.”

“……미안.”

재경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이연은 됐다는 듯 그의 팔을 놔주었다. 재경은 이연을 흘끔 바라보고는, 막 복도 너머로 사라지고 있는 의뢰인을 향해 달려갔다.

“왜, 무슨 일인데?”

남은 혜강이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재경 씨 오면 이야기해 줄게. 내가 한 건 추측뿐이라.”

슬슬 다리가 아파진 이연이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마찬가지로 침대로 펄쩍 뛰어올라 이연의 옆구리에 몸을 붙이고 앉은 뭉치를 슬슬 쓰다듬어 주며 투덜거렸다.

“하여튼 저 변이종 오타쿠.”

재경은 애초부터 악몽코끼리를 조사할 생각은커녕, 도망친 걸 잡을 생각도 없었다.

의뢰인을 따라 사라진 재경은 생각보다 금방 돌아왔다. 화를 잔뜩 내고 여긴 더 이상 볼일이 없으니 먼저 가 보겠다고 했단다.

눈치를 보며 방에 다시 들어온 재경은 대뜸 무릎을 꿇었다.

“미안.”

“미안한 건 아니 다행이네요.”

사정도 모르고 이리저리 이용당한 경험이 유쾌할 리가 없었다. 자연스레 뾰족한 말투가 나오자 재경은 한층 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됐고, 설명이나 좀 해 봐요.”

“그게…… 얼마 전에 아는 사람을 통해서 악몽코끼리가 잡혔다는 정보를 들었거든.”

일반인에게 하급 변이종이 잡히는 건 생각보다 흔했지만, 5급 정도의 중급 변이종은 거의 잡히지 않았다. 포획하는 것보다 처치되는 비율이 훨씬 많을뿐더러, 불법으로 잡기 전에 헌터들이 임무를 받고 출동하기 때문이다. 재경에게 소식을 전해 준 지인도 굉장히 오랜만의 일이라고 했다.

악몽코끼리를 잡았다는 사람은 변이종 암시장의 유명한 상인 중 하나. 그는 상품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다는 사람이었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재경은 제 지인에게 떡밥을 흘렸다.

‘악몽코끼리? 걔한테 연기 주머니가 있다던데, 그분 완전 계 타셨네.’

당연히 헛소리였다. 국립 연구소 보고서만 한번 봤어도 그런 결과가 없다는 것쯤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재경은 이쪽에서 꽤 인지도가 있었고, 현재 발표된 변이종 연구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 역시 상식이었다. 나름의 전문가가 하는 말이니 혹했던 것이다.

악몽코끼리의 연기 주머니를 떼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오자, 재경은 몇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작업을 할 수 있을 만한 탁 트인 공간을 마련해 줄 것. 재경이 먼 곳을 가도 의심받지 않을 만한 알리바이를 마련해 줄 것.

그리고 헌터는 데려오지 말 것.

“그쪽이 데려온 헌터가 진짜 악몽코끼리를 공격해서 배를 가르면 안 되니까요?”

“맞아.”

재경은 저 혼자여도 연기 주머니는 뗄 수 있고, 오히려 모르는 사람은 방해된다며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상인은 5급 변이종을 데려가는 것이니만큼 최소한의 보험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널 꼬셨어.”

“어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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