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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84화 (83/250)

#84

보통 사람보다 확연히 색소가 옅은 눈동자는 몇 번 깜빡여 초점을 찾았다. 하얗고 밋밋한 천장. 공기가 통하는 실내. 자기 전의 상황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래, 제산오가 갑자기 인간 수갑처럼 굴어서 온갖 생쇼를 했지……. 거기까지 생각한 이연은 제 몸에 어떤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

이연이 놀라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검은색 천 쪼가리와 눈이 마주쳤다.

“…….”

“…….”

이게 왜 보이지?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에야 상황 파악을 한 이연의 시선이 속옷을 입고 있는 몸통의 위를 거슬러 올라갔다.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산오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은신처의 입구로 들어온 햇살이 안을 밝혀 맨몸이 선명하게 보였다.

“……잘 잤어?”

이연이 머쓱하게 물었다. 당시에야 자포자기하듯 잠들었지만, 자기 전과 같은 자세로 깨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언제나와 같은 뚱한 얼굴을 보니 상태가 많이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푹 잤다고 해도 그렇지, 열이 그렇게 끓었는데 물수건 한번 올리고 약도 없이 나아 버리다니. 철인인가? 평소에 이연더러 그렇게 허약하다고 비웃는 인간다웠다. 이런 신체를 가지고 있는데 툭하면 체력이 다했다며 엎어지는 인간쯤이야 갓 태어난 병아리처럼 보일 것이다.

오히려 상태가 안 좋은 건 이연이었다. 젖은 옷을 입고 그대로 잠든 것이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던 것이다. 자는 사이 옷은 말랐지만 몸이 조금 으슬했다.

산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내 옷.”

“…….”

“잘려 있던데.”

가장 꺼내지 않아 줬으면 하는 화제였다. 이연이 시선을 피했다. 꾸물꾸물 등을 돌린 이연이 최대한 발음을 뭉개며 웅얼거렸다.

“아니, 옷이 다 젖었는데 열이 너무 심해서…… 근데 네가 움직이질 않아 가지고 부득이하게…….”

산오의 시선이 오물대는 뒤통수로 꽂혔다. 당장이라도 잡아 묶을 것이라는 이연의 예상과 다르게, 산오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쯤 되니 이연은 산오의 분위기가 평소와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설마 아직 제정신이 아닌가? 이연이 조심스레 다시 뒤를 돌았다. 미심쩍은 눈빛이 산오를 훑는데도 그는 별말 하지 않았다.

“너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몸을 일으킨 이연이 팔을 뻗었다. 덮고 있던 이불자락이 부스럭대며 떨어졌다. 뚱하니 바라보는 산오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대자, 미열이 조금 남아 있긴 하지만 그럭저럭 안정된 체온이 손바닥에 닿았다.

가까워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시야 가득 들어오는 훤한 얼굴에 이연이 잠깐 멈칫했다. 쿵. 쿵. 때늦은 심장이 다시 뛰었다.

“……괜찮으면 됐고…….”

자문자답하고는 몸을 물려 괜히 부산스럽게 이불을 부시럭대자, 산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정연.”

아니, 이 자식이. 만난 지 얼마나 오래됐는데 아직도 이름을 틀린다. 열이 너무 올라서 기억 상실이라도 걸렸나? 이연이 인상을 찌푸리며 항변했다.

“아니, 그러니까 내 이름은 정이연이라고…….”

“나를 바보로 아는군.”

이름도 못 외우는데 그럼 천재라고 불러 주리?

“옷 내놔.”

마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요구하는 투였다. 물에 빠진 사람 건졌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 것과 진배없는 행동이었다. 이연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만들 줄 알잖아.”

“……펜도 없는……”

“필요 없는 거 알아.”

갈팡질팡하는 의심 따위가 아니었다. 선명한 확신이 그 안에 깃들어 있었다.

“난 너한테 이름을 가르쳐 준 적이 없어.”

“…….”

“하지만 넌 내 얼굴만 보고 단번에 정체를 알았지.”

그리고 모른 척해 줄 생각도 없는 모양이다.

어두운 그림자가 진 녹색 눈이 이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곧은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부터 알았어?”

“처음부터.”

그 말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분명히 처음 봤을 때에는 긴가민가하는 기색이었는데……. 솔직히 친히 그림 공부까지 시켜 주는 데에서 모른다고 확신했다.

“왜, 머리 색도 바뀌었잖아.”

“얼굴이 똑같잖아.”

“10년 전에 잠깐 본 게 다면서…….”

아직도 애먼 소리만 꿍얼거리는 이연을 바라보는 눈길이 가늘어졌다.

“날 바보로 아나?”

이연이 입을 다물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대놓고 능력을 쓴 판에 더 이상 발뺌할 방법도 없었다.

“그래, 오랜만이야.”

이제는 기억도 희미한 시절은 온도와 색깔, 냄새 정도만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흐릿한 영상 너머여도, 거칠게 내리는 빗속의 어둠이어도, 제산오를 몰라볼 수는 없었다. 이연은 평생 그의 얼굴을 잊지 못할 터였다.

내 오래전 친구.

다시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것이 아주 많았다. 그 골목에서 만난 후에도, 같이 지내는 동안에도 궁금한 건 정말 많았다. 늘 물어보고 싶었지만 망설였다. 처음에는 못 알아보는 것 같아 입을 다물었고, 그다음에는.

그다음에는…….

“모르포를 찾고 있다며.”

결국 고르고 골라 물어본 것도 고작 이런 거. 이연의 물음에 산오는 오히려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너야말로 관심 없을 줄은 몰랐는데.”

“어?”

“왜 그놈을 가만히 내버려 두려는 거지?”

이연이 난처하게 입을 다물었다. 산오가 모르포를 싫어할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수소문하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둘이 마주치는 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라, 이연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어디 있는지도 몰랐는데 내버려 두긴 무슨…….”

그 맹한 낯짝을 본 산오의 입매가 비틀렸다.

“너도 협조해, 이정연.”

“나? 난 도움이 안 될 텐데.”

행방도 모르고……. 어리벙벙한 이연의 대답에 비웃는 것 같은 음성이 날카롭게 꽂혔다.

“내가 그 정도 자격은 되지.”

산오와 눈이 마주친 이연이 움찔했다. 뭐라 말하려던 입술이 얌전히 붙었다.

맞는 말이었다. 제산오는 그럴 권리가 있다. 이연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알았어.”

두 사람은 땀에 전 몸을 간단하게 씻은 후 이연이 만든 옷을 입고 숲을 다시 나섰다. 한바탕 비가 오고 난 숲의 냄새가 청량했다. 둥그런 은신처가 모래로 변해 사라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산오가 중얼거렸다.

“이혜강은 알고 있나?”

“아니, 몰라.”

단번에 튀어나온 대답은 조금 낮은 목소리였다. 무려 10년 동안 이연은 아무에게도 제 능력을 말하지 않았다. 특히 혜강을 속인다는 사실은 죄책감이 동반되었으나, 원래 거짓말이라는 것이 한번 하고 나면 밝히기가 힘든 법이다.

“왜 하필 2단이지?”

이연의 원래 능력은 실체화. 무려 지형 설정 기능의 원천이었으니 본 능력대로 초능력 등급 심사를 받았으면 5단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굳이 능력을 숨기고 심사를 받았다. 차금을 따로 세운 것은 타인의 회사에 소속되어 활동했다가 혹시라도 능력이 들킬 것을 우려한 것이다. 2단이라는 등급 역시 사업 자격을 얻기 위해 임의로 조정한 거고.

“굳이 높은 등급을 받을 필요 없잖아.”

주목을 끌어서 좋을 게 없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사는 것이 좋았다. 괜히 본 능력으로 심사를 받았다가 지형 설정 기능과 엮여 초능력 파장이 같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고.

“그런 거라면 차라리 등급 심사를 받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이연이 머쓱하게 웃었다.

“부모님이 원했어.”

모든 게 사라지고 홀로 남은 이연에게 이정표라곤 오직 그거 하나였다. 선택지 같은 건 없었다.

‘그리고…….’

이연이 산오를 흘끔 바라보았다. 너무 오래되어 그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이연 역시도 당시의 기억은 몇 개 남아 있지 않지만, 그래도 그 약속은 그나마 이연이 온전히 기억하는 것 중 하나였다.

시원한 공기 속 햇살이 쨍쨍했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늦은 아침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시간을 엄청나게 지체했으니 서두르는 게 좋았다. 혜강 역시 밤새 돌아오지 않은 두 사람을 기다렸을 것이다. 산오가 있으니 걱정 같은 건 안 했겠지만…….

“악몽코끼리가 아직 숲에 남아 있을까?”

“글쎄.”

문제는 이거였다.

밤새 비가 왔다지만 모르는 일이었다. 변이종이 비 좀 맞는다고 감기 같은 게 걸릴 리도 없고……. 계속 움직였다면 이 근방을 벗어났을 가능성도 농후했다.

이연이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을 옆에서 얌전히 걷던 산오가 흘끗 바라보았다. 짙은 눈동자는 꼬질꼬질하게 마른 옅은 색의 머리통에서 한동안 멈춰 있었다.

“네 머리……”

컹!

산오가 말을 막 꺼내려던 그때, 발랄한 울음소리와 함께 무성한 나무줄기 사이로 커다란 생물이 몸집을 드러냈다. 검은 줄무늬가 있는 푸른 털가죽. 뭉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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