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83화 (82/250)

#83

“헉…….”

이연의 체력도 해방 직전이었다.

산오의 상태가 심각해서 그렇지, 이연 역시 발목을 포함해 여기저기 다친 환자였다. 그나마 동굴에서 쉰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가능했던 거였다.

이미 이마며 목이며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체력이 다 빠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급한 대로 앞이 뚫려 있는 외투를 반만이라도 벗겨 주기 위해 산오의 건너편 어깨를 쥐었을 때였다.

“……?”

이연이 의아한 얼굴로 손에 힘을 주었지만, 상황은 똑같았다. 산오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이연은 가장 큰 문제를 깨달았다.

제힘으로는, 그것도 한 손 근력으로는 산오의 몸을 일으켜서 옷을 벗기는 것이 불가능했다.

“아니…….”

너무 억울해서 들어 줄 사람도 없는 외마디 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어쩌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지막 희망으로 산오의 팔을 조금 흔들어 보았으나, 손에 들어간 힘은 풀리지 않았다. 족쇄 같은 커다란 손을 허망하게 한참 바라보던 이연의 시선이 조금 스산해졌다.

그냥 다 자르자.

한계에 몰린 이연은 급진주의로 돌아섰다.

커다란 가위를 만들어 낸 이연이 빌어먹을 천 쪼가리를 산산조각 내는 동안 산오는 얌전히도 잤다. 펄펄 끓는 이마에 가지런히 얹어 둔 물수건이 떨어지지도 않을 정도였다.

자르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손 하나와 발 하나가 자유롭지 못하다 보니 자세를 잡는 것이 힘들어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다. 서걱. 가벼운 소리와 함께 바지에 걸려 있던 마지막 맨다리가 드러났다.

장담하는데 초전력 1등 하는 것보다 지금이 더 보람찰 것이다. 이연은 바로 드러눕고 싶은 마음을 참고 어기적거리며 물러났다. 산오가 잡은 손의 반대쪽 다리 바지를 자르기 위해서 산오를 거의 덮다시피 했던 터였다. 여기서 바로 엎어지면 그냥 제산오 덮치는 사람이다.

조심스레 물러나는 과정에서 이연의 시선이 절로 허리 아래에 걸쳐진 손바닥만 한 천 쪼가리를 향했다. 단 하나 남은 의복이었다.

“…….”

새까만 색인데도 젖어서 그런지 별로 정체를 알고 싶지 않은 윤곽이 선명했다.

깔끔한 마무리를 위해서는 저것까지 전부 빼 주는 게 낫기야 하겠지만, 이연은 그냥 추잡스러운 사람이 되기로 했다. 마지막 도의였다.

이제 이불만 덮어 주면 되겠다. 이연은 커다란 덩치의 산오라도 둘둘 말아 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커다랗고 두껍고 푹신한 이불을 만들어 냈다. 막 그것을 덮어 주기 위해 천 끄트머리를 잡고 산오의 상체 쪽으로 몸을 기울였을 때였다.

갑자기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이연은 본능적으로 아래를 휙 바라보았다.

초록색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

지옥 같은 침묵이 흘렀다. 옷을 그냥 벗긴 것도 아니고, 잘라서 조각낸 다음 맨몸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자세는 오해를 사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이연의 뇌가 드물게 정지되었다.

이제까지의 이연의 행동은 분명히 생명 구조에 가까웠고, 사심이라곤 하나도 없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는 처음에 평화적으로 어떻게든 해 보려고 노력했지 않은가! 팔을 안 놔주는 걸 어쩌라고!

그런데도 당사자와 눈을 마주하니 뭔지 모를 민망함이 몰려왔다. 인면수심이 아니라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 저.”

정적을 이기지 못한 이연이 어색하게 잡힌 팔을 가리키자, 산오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이연을 따라 시선을 내렸다. 드디어 손에서 힘이 조금 빠지는 게 느껴졌다.

피가 빠르게 돌면서 생긴 저릿함이 팔 전체에 퍼졌다. 당황한 나머지 가까이 붙은 몸도 그제야 물렸다. 이연이 반대쪽 손으로 자유가 된 팔뚝을 주무르며 인사했다.

“고마……”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팔이 잡혔다. 이번엔 양팔이었다.

“응?”

어리둥절하게 산오를 다시 바라보기도 전에 시야가 뒤집혔다. 강하게 당기는 힘에 반항할 틈도 없이 몸이 쏠렸다. 부드럽고 뜨거운 표면에 코를 박은 이연은 얼얼함을 느끼기도 전에 정체를 깨달았다. 자랑은 아니지만 몇 번이나 얼굴을 부딪쳐 본 곳인 탓이다. 살가죽이었다.

무슨 죽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저를 꼭 끌어안은 산오가 팔다리로 칭칭 옭아맸다. 오른 열로 후끈후끈한 팔다리가 축축하게 젖어 있는 이연의 옷가지를 비볐다. 추측으로는 더운 듯했다…….

아, 아니. 아니! 이게 아니야!

넋이 나가 현실을 방관할 뻔했던 이연이 정신을 차렸다. 뒤늦게 벗어나기 위해 힘을 주었으나, 손 하나도 못 이기던 인간이 온몸을 사용한 결박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기껏 물기를 제거해 줬더니 새로운 물기를 찾은 것도 어이가 없었고, 맨살, 맨살이……. 미친 거 아냐? 이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거짓말 같은 현실이다. 산오와 한 침대에서 그렇게 많이 잤지만 이딴 잠버릇은 처음 봤다.

뺨에 닿은 가슴 너머로 따뜻한 심장 소리가 계속 들렸다. 산오의 몸은 너무 뜨거워서 이연의 몸 어디에 어떻게 얹어져 있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자세를 고치기 위해 움직이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까 옷 자를 때에는 쥐 죽은 듯이 자더니, 이연을 끌어안은 산오는 계속 팔이나 다리를 조금씩 움직이며 자세를 고쳤다. 꼭 품 속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처럼.

“…….”

이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뛰었다. 너무 빨리 뛰어서 이러다 진짜 터지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꿈인가? 그러고 보니 언젠가 이런 꿈을 꿨던 것 같기도 하고…….

싫은 건 아니었으나—그렇다고 좋다는 건 아니고!—, 근본을 알 수 없는 죄책감과 회피성이 무럭무럭 피어났다. 그는 포화 수준의 자극에 파업하려는 뇌를 돌리고 돌려 방법을 찾아냈다.

고개만 돌려 슬그머니 주변을 살핀 이연이 손을 까딱였다. 확. 침대 아래 방향에만 하나 놓여 있던 모닥불이 오른쪽과 왼쪽에 하나씩 더 생겨났다. 장작을 태우며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아늑하다 못해 더워지기 시작했다.

태양과 바람 작전이었다.

이연은 금방 덥고 축축한 덩어리가 될 테고, 불쾌한 촉감이 잠결에 감겨들면 산오는 금방 그를 떨쳐 낼 것이다. 제가 세운 계획이었지만 꽤 그럴듯했다. 불쾌한 덩어리가 되는 게 이렇게 기쁜 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이연은 산오의 고열을 온몸으로 받고 있는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모닥불의 열기까지 닿자 거짓말 안 하고 더워서 미칠 것 같았다. 순식간에 사우나에라도 온 것처럼 땀이 주르륵 흘렀다. 이대로 가면 더위 먹는 건 시간문제였다.

급기야 제 옷 자체가 거추장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빗물에 젖어 눅눅해진 옷이다. 불편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연의 현재 옷은 능력으로 만든 새것. 없애려면 없앨 수 있었지만 아직 그 정도로 정신을 놓은 건 아니었기 때문에 간신히 참았다. 이연의 옷마저 사라지면 그냥 나체의 두 남자가 엉킨…… 진짜 미친 거 아냐?

산오는 그 와중에도 절대로 몸의 힘을 풀지 않았다. 땀 정도야 나는 것 같았지만, 그렇게까지 걸리적거리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어째서…….

품에 안겨 있다는 미약한 설렘은 극한의 더위 속에 점점 무뎌졌다. 얼마간 더 버티던 이연은 결국 항복하고 모닥불 두 개를 없앴다. 입구에서 들어오는 시원한 공기가 실내 온도를 서서히 낮춰 주었다.

‘진짜 힘들어 죽겠네.’

팔자에도 없는 사우나를 한 덕에 안 그래도 없던 체력이 바닥났다. 곧 해일 같은 졸음이 몰려왔다. 마지막 반항으로 아까보다는 조금 미지근해진 것 같은 산오의 다리를 슬쩍 밀어내 보았으나, 역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확 얼음을 부어 버릴까 보다.

“…….”

산오가 일어나면 이 요란한 은신처와 제 옷 상태에 대해서 많은 설명을 해 줘야 하겠지만, 지금 심정으로는 뭐라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어쩔 건데, 죽이든가……. 이연이 불량스레 생각했다. 인간의 정신이 이렇게 나약하다.

무사히 임무를 완수한 이연은 빠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두 명의 숨소리는 조그만 공간 안에서 마치 대화라도 하는 것처럼 번갈아 가며 울리다가 곧 하나로 합쳐졌다.

*

꿈을 꿨다. 온통 새하얀 공간에서 어린 소년 둘이 있었다. 간식도 먹고, 그림도 그리고, 동화책도 읽느라 주변은 알록달록한 장난감들로 엉망이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연신 웃고 있는 소년들은 마냥 행복해 보였다.

봉지를 부스럭거리던 소년이 엎드려 그림책을 읽는 소년의 옆에 나란히 엎드렸다. 입가에 잔뜩 묻은 과자 부스러기가 조금 떨어졌다.

‘여기서 나가면 뭘 하고 싶어?’

과자를 먹던 소년의 말에 그림책을 읽던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책에는 노란 나비가 넓은 하늘을 잔뜩 날아가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희미해지는 말끝은 들리지 않았다. 이연은 흐려지는 풍경 너머로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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