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헉!”
팔을 잡은 힘이 어찌나 셌는지 떨어져 나가기라도 할 것처럼 아팠다. 산속에서 자신을 붙드는 괴한이라니. 19세 이용가 스릴러 영화에서나 흔하게 볼 법한 상황이다. 깜짝 놀란 이연이 고개를 휙 돌렸다. 우산이 흔들리면서 물방울이 조금 튀었다.
눈앞에 보인 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푹 젖은, 익숙한 옷차림의 남자였다.
“……제산오?”
산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타고 얼굴에 흘러내리는 빗줄기가 턱 아래로 방울져 끊임없이 떨어졌다. 축 처진 머리카락은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고, 물을 먹어 평소보다 훨씬 무거워졌을 게 뻔한 옷가지가 짙어진 색으로 몸에 들러붙어 있었다.
이연이 산오를 멍하니 훑었다. 하얗게 질린 입술, 따갑게 때리는 빗줄기를 그대로 맞고 있는 어깨와 팔. 신발과 바지 밑단에 아무렇게나 엉겨 붙은 진흙과 나뭇잎 조각들.
그 오랜 시간 내내, 비 같은 건 피할 생각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산오는 이연의 팔을 쥐고 있었다. 놓치면 큰일이라도 나는 사람처럼. 이연이 도망이라도 갈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왜…… 왜 그러는데.”
산오의 태도가 평소와 다르게 너무 절박해 보여서, 이연은 어쩔 줄 모르고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산오의 눈이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지 않는 탓에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추측하는 게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굳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잠잠했다. 대답 없는 물음은 허무하게 흩어졌다.
쏴아아……. 잠깐 멀어졌던 빗소리가 귓가에 들리고 나서야, 이연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야. 뭐라도 만들어서 비 피하지…….”
허둥지둥 우산을 산오의 머리 위에 대 주었다. 크지 않은 우산 그늘은 산오 하나만 담아도 꽉 찼다. 이연 역시 기껏 갈아입은 옷이 젖어 버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산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팔을 부서트릴 수도 있을 것 같은 강한 힘. 고통에 이연이 눈썹을 약간 찌푸린 순간,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가지 마.”
“……어?”
아무렇게나 흘러내려 잔뜩 엉킨 앞머리 사이로 녹색 눈동자가 얼핏 보였다.
“약속했잖아.”
산오는 이연과 대화를 한다기보다는, 그냥 혼잣말을 내뱉는 것 같았다. 꿈을 헤매는 것 같은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나랑, 나가면…… 비…… 기로…….”
산오의 말은 빗소리 때문에 거의 들리지 않았다. 나가면, 뭐? 이연이 본능적으로 귀를 쫑긋 세우고 한 발자국 다가간 순간, 커다란 몸이 그대로 기울어졌다.
“야, 제산오!”
얼결에 그를 받아 안은 이연이 목과 뺨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흠칫했다.
몸이 불덩이였다.
이래서 경험이 중요하다. 이연은 빠르게 걸리적거리는 우산부터 내버렸다. 산오가 하던 것처럼 가볍게 안아 들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이연으로서는 축 늘어진 거구를 겨우 지탱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연은 몇 걸음 걸으려고 노력했지만 금세 멈춰서야 했다. 이 날씨에 이 무게를 지고 움직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가장 걸리적거리는 건 역시 다친 발목이었다.
발목 하나로 사람 두 명분의 무게를 지탱하는 건 자학 수준이다. 쉴 새 없이 전해지는 찌릿한 감각이 절로 이를 악물게 했다. 발목이 바스라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산오를 빗속에 이 이상 방치할 수는 없었다. 세탁기에 한번 돌려졌다 나온 것 같은 꼬락서니가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곁에 있는 이연까지 땀이 날 정도로 열이 오른 걸 보니 최소가 감기다.
이연이 주위를 살폈다. 그들이 있는 곳은 바위도 뭣도 없는 숲 한복판이고, 여기서 이연의 동굴은 너무 멀었다.
‘미치겠네, 진짜…….’
제산오가 이걸 보면 100% 확신할 텐데. 이연은 잠깐 고민했으나, 고열이 들끓는 사람을 빗속에 방치할 만큼 소중한 비밀은 아니었다. 두꺼운 빗줄기 사이로 하얀 알갱이가 다시 모여들었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반구를 세로로 가른 모양의 둥근 은신처가 새로 생기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연이 가장 먼저 만든 것은 커다란 모닥불이었다. 전기장판이나 히터는 만들어 봤자 전기가 없으니 작동하지 않았다. 때로는 원시적인 것이 가장 도움이 된다. 하필 모닥불이라니. 옛날 생각이 난 이연이 희미하게 웃었다.
산오의 바로 뒤에 커다란 침대를 만들어 슬쩍 밀자, 커다란 덩치가 힘없이 안착했다.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매트리스가 크게 출렁였다.
문제는 산오가 이연의 팔을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악.”
얼결에 매트리스에 같이 쓰러진 이연이 바둥대며 팔을 비틀었다. 말투나 행동거지를 보니 제정신이 아닌 건 확실한데, 의식도 오락가락하는 주제에 남의 팔만 구명줄처럼 붙들고 있었다.
저릿저릿한 근육을 주무르며 산오의 손을 풀려고 노력해 봤지만, 뭔 놈의 힘이 이렇게 센 건지 이연의 근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한참 용을 써 부질없는 저항으로 힘을 다 뺀 후에야 이연은 현실을 인정했다. 손가락 열 개가 전부 얼얼했다.
현실에 순응한 이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발목을 슬쩍 들어 올려 보는 것이었다. 아릿하게 근육이 풀리는 것 같은 감각이 종아리까지 퍼졌다. 야무지게 맨 반깁스는 물을 먹고 한껏 묵직해져 있었다. 5초만 들고 있었는데도 다리가 당겨 와, 이연은 얌전히 발목을 내려 두었다. 걸리적거리는 반깁스는 금방 하얀 모래로 변해 날아갔다.
팔 한쪽을 잡힌 채로 누워 있으려니 자세가 영 어색했다. 이연은 옆을 슬쩍 돌아보았다. 잔뜩 인상을 쓴 얼굴이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
망설이던 이연은 깊은 선이 팰 정도로 구겨진 미간을 슬슬 눌러 펴 주었다. 손끝에 닿는 피부에 델 것 같았다.
열이 이만큼이나 올랐으니 두통도 상당할 것이다. 잡힌 팔이 신경 쓰여 깜빡 잊었는데 산오는 환자였다. 되는대로 간단한 처치를 좀 해 두자. 이연이 몸을 조금 일으켜 산오를 살펴보았다.
얼굴과 머리카락은 그새 조금 말라 있었으나, 걸친 옷가지는 아직도 축축했다. 조금 누르는 것만으로도 금세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습기를 흠뻑 머금고 있었다. 감기를 심화하는 데에 일조하는 공신이었다.
‘몸을 좀 말려야 할 것 같은데…….’
이연이 난감한 산오의 몸을 훑었다. 외투, 티셔츠, 바지, 양말, 신발. 단출한 차림이라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가장 최선의 해결책은 옷을 벗겨서 몸을 닦아 준 다음에 옷은 말리고 산오는 이불을 둘둘 감아서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거였지만,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산오의 손이 이연의 팔을 놓지 않는 이상 상의는 자르지 않으면 못 벗긴다.
일단 손을 떼어 내는 건 논외였다. 이미 방금 전에 한껏 시도하다가 실패했으니까. 자르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가위 같은 거야 만드는 데에 1초도 안 걸린다.
여기서부터는 도의적 문제였다.
‘옷을 자르면서까지 벗기는 건 좀…….’
그렇다고 바지만 탈의시키는 것도 이상했다. 상체는 외투까지 다 입고 있는데 하체는 맨몸이면 너무, 좀…… 변태 같지 않나?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산오가 제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이연을 죽일 것 같은 점도 고민됐다.
하지만 가만히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열로 땀이 나서 말라 가던 옷이 다시 젖고 그게 식어서 전신을 덮고 있는 게 최악이다. 목숨과 체면 중에 선택하라면 당연히 목숨 아닌가. 일단 젖은 천을 제산오와 떼어 내야 하는 것은 맞았다.
로맨스 영화 같은 거 보면 좋아하는 사람 생겼을 때 어떻게 고백할지 걱정이나 하던데—물론 자신은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난 이게 뭐냐? 사람 옷을 잘라서 완전 나체로 만드냐와 그냥 타협해서 하의 실종으로 만족하느냐의 기로라니. 야밤에 이딴 생각이나 하고 앉아 있는데 이게 심각한 문제라는 게 가장 황당했다.
애초에 인간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나체로 만드는 게 좀, 부적절하지 않나? 심지어 이놈의 손 때문에 멀리 떨어질 수도 없었다. 아니, 내가 뭐 개인적인 탐욕을 위해서 이러는 건 아니긴 하지만…….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도 마땅한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이연은 일단 제일 만만한 신발과 양말만 처리하고 마저 생각해 보기로 했다.
몸을 일으켜 팔을 쭉 뻗자 간신히 산오의 발에 손이 닿았다. 한 손만으로 고군분투하며 남의 신발을 벗기자니 스스로도 너무 어이없어서 마치 예능 프로그램에서나 할 법한 게임같이 느껴졌으나 이게 현실이었다.
그 와중에 제가 쥔 팔이 멀어지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챈 산오가 잡아당기면 이연은 종이인형처럼 쓸려 가 몸통에 머리를 박았다. 인간 머리통의 무게가 꽤 나갈 텐데 산오는 그런 타격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이 자식 사실 깨어 있는 거 아냐? 이연이 의심스럽게 산오를 노려보았지만, 평소보다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흉곽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과정을 몇 번 정도 반복한 후에야 산오의 발이 해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