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아야…….”
보는 사람도 없는데 그리는 척은 왜 한 거야. 그냥 만들어서 줄걸. 위장 생활이 기니까 별걸 다 신경 썼다. 이연이 뒤늦게 반성하며 제멋대로 엉킨 사지를 움츠렸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낮다고는 하지만 최소 몇 미터는 되는 높이였다.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떨어진 몸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구르면서 여기저기 까진 타박상이야 그렇다 쳐도, 바위 같은 곳에 발목을 부딪힌 것 같았다. 발을 움찔거리기만 해도 고통이 올라왔다.
너무 순식간이라 능력을 쓸 생각도 못 했다. 하도 안 써 버릇하니까 이제 빠릿하게 생각도 안 튀어나오네……. 이연은 본인의 안일함을 잠깐 반성했다.
‘그래, 머리 안 다친 게 어디냐.’
그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안 그래도 온몸이 아픈데 망했다는 비관까지 하면 너무 슬프지 않은가. 떨어진 그 자세로 잠깐 누워 있던 이연은 충격이 조금 가시자마자 일어났다. 바람막이 주름 사이에 굽이굽이 담겨 있던 빗물이 움직임에 따라 주르륵 흘러내렸다.
주머니를 뒤적여 휴대폰을 꺼내 보니 다행히 멀쩡했다. 이게 부서졌으면 정말 슬플 뻔했어……. 이연이 쓸쓸하게 중얼거리며 혜강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그는 신호음이 한참을 울려도 받질 않았다. 호텔 안에 있는 애가 받지 않을 리가 없는데. 당황해서 휴대폰을 확인하니 통화권 이탈이었다. 환장할 노릇이다.
산오를 찾으려면 올라가야 하고 호텔로 가려면 왔던 길을 되짚어가야 했으나, 그러기엔 사위가 너무 어두웠다. 길을 헤매야 할 게 빤한데 이 발목으로 오래 걷는 건 무리다. 여러모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비가 그치고 날이 밝았을 때 움직이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래, 가만히 있자. 악몽코끼리야 뭐, 제산오가 잡아 오겠지……. 이연이 태평하게 생각하며 몸을 질질 끌다시피 해서 떨어진 언덕 앞에 섰다. 돌과 흙으로 이루어진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연은 그것을 짚고 오르는 대신 가만히 바라보았다.
벽과 이연의 주변에 새하얀 알갱이들이 하나둘 모였다.
스으으…….
하얗다 못해 빛이 나는 것 같은 알갱이들은 서로 뭉쳐 점점 커졌다. 꽃이 피는 것같이 부피를 키워 간 덩어리가 금세 이연의 키를 훌쩍 넘겨 형체를 갖췄다.
부드럽게 구부러져 벽과 바닥이 이어지는 삼면을 곡선으로 감싸고, 천장이 생긴 바닥에는 그늘이 졌다. 이연의 앞으로만 뻥 뚫린 공간은 곧 바위 같은 색과 질감으로 변했다.
완성된 것은 조그만 크기의 동굴이었다.
“흠.”
이연이 턱을 까딱이자 동굴 내부에 필요한 것들이 채워졌다. 푹신한 매트리스, 베개, 이불, 모닥불, 새 옷……. 매트리스 옆에 반깁스 도구까지 갖춰지고 나자 동굴은 그럴듯한 은신처로 보였다.
이렇게 마음껏 능력을 쓰는 것도 오랜만이다. 이런 데에 조난당해서야 쓰는 능력이니 계속 안 쓰는 게 낫기야 했겠지만……. 이연은 절뚝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지저분해진 옷에서 진흙 조각과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진짜 죽겠다…….”
매트리스에 털썩 주저앉으니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이연이 손을 뻗기도 전에 하얀 모래들이 허공에서 뭉쳐지고 있었다. 그것을 쥐자, 덩어리는 커다란 수건으로 변했다. 빗물에 젖은 얼굴을 말끔히 닦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발목에 응급 처치를 하고 젖은 옷을 갈아입은 후 모닥불에 말리기까지 하자 할 일을 끝낸 것을 귀신같이 알아챈 삭신이 다시 쑤셔 왔다. 매트리스 앞에 만든 모닥불의 온기가 몸을 노곤하게 했다. 이연은 몸에 힘을 빼고 제가 만든 동굴을 둘러보았다.
작은 동굴이지만 그 안에 비치된 모든 것이 넉넉했다. 매트리스가 퀸사이즈인 것은 물론이고, 모닥불 역시 다섯 명은 둘러앉아도 될 정도로 컸다. 곱게 접힌 수건도 여러 벌 포개어져 있었고, 구석에는 4인 가족이나 쓸 법한 소파까지 예쁘게 놓여 있었다.
‘아.’
그제야 이연은 그게 한 사람이 쓰기엔 조금 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연이 팔을 휘젓자, 모닥불이 사라지고 조금 작은 크기의 새 모닥불이 생겼다. 수건과 담요 두어 벌, 소파와 테이블은 아예 사라졌다. 혼자 쓰기엔 조금 빠듯하다 싶을 정도로 조정한 후에야 동굴은 다시 가지런해졌다.
“습관이 무섭네.”
이런 능력은 정말로 간만에 쓰는 건데도 그랬다.
담요를 끌어 덮은 이연이 벌렁 드러누웠다. 동굴 바깥의 빗소리와 타닥이는 모닥불 소리가 제법 운치 있었다. 제산오 우산을 못 씌워 줬는데. 좀 살 만해졌다 싶으니 그런 생각이나 들었다.
아니, 땅에서 철 같은 거 끌어다가 움직이는 나만의 파라솔 만들면 되잖아. 놀이공원에서는 하지 말라고 해도 꾸역꾸역 하더니 여기서는 왜 처량하게 그 비를 다 맞고 있냐고? 신경 쓰이게. 이연이 괜히 투덜거렸다.
내가 없어진 것도 그냥 삐져서 따로 가 버렸다고 생각하려나? 하긴, 누가 멍청하게 비탈에 굴러떨어질 거라고 생각하겠어. 멍청이가 우울하게 자조했다.
산오의 성격을 생각했을 때, 이연을 찾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좀 친해졌다고 해도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다……. 사실 그게 더 낫기도 했다. 괜히 지금 만났다가 능력이란 능력은 다 쓰고 앉은 이연의 모습을 보는 것도 곤란하긴 했으니까.
호텔로 다시 가 버린 거 아냐? 날씨가 이러니 차라리 그쪽이 더 나을 것 같긴 했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판이니 반투명한 악몽코끼리 같은 건 눈에도 안 띄겠다.
‘비가 빨리 그치면 좋을 텐데.’
무슨 폭발음 같은 것이 희미하게 들렸다. 땅이 아주 미세하게 울릴 정도로 장엄하게 퍼지는 소리였다. 이연의 귀가 쫑긋 섰다.
근처는 아니고, 조금 떨어진 곳인데 아주 먼 것 같지는 않았다. 생전 들어 본 적이 없는 종류라 소리의 정체를 짐작하기는 힘들었다. 굳이 추측하자면 땅 아래에서 뭔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 같은…….
땅?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이 절로 움직였다. 이연이 절뚝거리는 다리로 동굴 입구에 다가섰다. 손에는 어느새 하얀 우산이 쥐어져 있었다.
철퍽. 진흙을 밟는 소리가 질척했다. 동굴을 나선 이연은 주변을 걸었다. 넘어지거나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느라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느린 속도였으나, 그에게는 이게 최선이었다.
바위라도 뚫을 것처럼 거센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게 벌써 한참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산오는 이미 악몽코끼리를 잡고 내려갔거나, 잠시 비를 피하고 있거나, 아예 호텔로 철수했거나, 셋 중 하나여야 했다. 비를 한 방울도 맞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연이 마지막으로 산오를 봤을 때 그는 비를 그대로 맞고 있지 않았는가. 그런 꼴로 이 날씨에 돌아다니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비 오는 골목, 세상에 어떤 미련도 없는 것처럼 아무렇게나 사지를 늘어트리고 있던 몇 달 전의 그가 지금 생각나는 건 당연히 기우였으나.
“…….”
아는데도 동굴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이연은 저도 모르게 우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제산오?”
이 정도면 아까 그 소리가 난 곳의 근처인 것 같은데……. 이연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 번 더 같은 소리가 들리면 좀 쉬울 것 같은데, 영 잠잠했다. 그게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모르겠다.
“제산오!”
빗소리가 커서 목소리가 자꾸 묻혔다. 이연은 점점 목청을 돋우며 걸었지만 타인의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역시 제산오가 이 상황에 여기 있을 리가 없지. 그 후로도 한참을 돌아다닌 이연이 드디어 확신했다.
보나 마나 호텔 스위트룸에서 따뜻하게 샤워하고 침대에 드러누워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침에 러닝을 하다가 숲에서 나오는 이연을 발견하고 평소처럼 잘생긴 얼굴로 “꼬라지가 끝내주는군.” 하고 비웃겠지. 그럼 이연은 환자에 대한 예의를 지켜 주길 바란다고 투덜거리면서…….
콱.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갈고리 같은 손이 이연의 팔뚝을 세게 거머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