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그렇다고 해도 놀랍다.’
제산오를 싫어할 이유는 수십 가지도 더 댈 수 있었다. 맨날 빈정거리고, 구박하고, 자기 할 말만 하고, 심지어 죽이려 했고, 또…….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이연은 산오를 흘끔 훔쳐보았다. 무뚝뚝하고 서늘한 인상은 위압감이 있었지만, 몇 달간 같이 지내다 보니 그런 느낌은 많이 흐려졌다.
흐린 달빛이 간신히 비치는 공간에선 얼굴 윤곽만 간신히 보였으나, 정성을 다해 잘 빚어진 것 같은 선을 보는 것만으로도 묘한 설렘이 일었다. 보고 있으려니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 이연은 재빨리 안면 근육을 의식해 표정을 가다듬었다.
솔직히 손톱만큼의 호감이 있다는 사실도 어이가 없긴 했지만, 부정하기에는 몸이 너무 솔직했다.
“…….”
그러나 이연은 이내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상황이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제산오는 살면서 평생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던 사람 중 하나였다. 이미 엮여 버린 것은 어쩔 수 없으나, 그 이상까지 뭘 어떻게 해 볼 마음은 없었다. 아마 이런 생각을 하는 걸 알면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라고 하겠지만.
모르포를 찾는다는 목적을 알게 되니 이연에게 접근한 이유는 납득이 갔다. 왜 이연의 곁을 그렇게 따라다니는 건지도.
개인적으로는 헛수고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설령 산오가 이연이 누구인지 알아챈다고 하더라도, 몇 달 더 있다 보면 이미 모르포와는 관련이 없어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럼 끝이다. 산오는 떠나고, 이연은 다시 평범한 일상을 영위할 터였다. 그 후로는 종희가 편집한 아주아주 흐릿한 영상으로나 다시 안부를 확인하게 되겠지. 그게 당연한 일이다.
둘의 세계는 달라야 했다. 이연에게 염치가 남아 있다면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조금 우울해졌다. 분위기를 환기하고 싶어서, 이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주절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평소와 비슷한 목소리가 나왔다.
“재경 씨가 바로 우리를 찾아왔으니까 악몽코끼리도 멀리 가진 않았을 거야.”
그러나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침묵이 오래가자 이연이 의아하게 옆을 다시 돌아보았다.
“제산오?”
산오는 아까와 똑같은 자세에 얼굴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귀가 먹지는 않았을 텐데 조그만 반응조차 없었다. 마치 이연을 투명 인간 취급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당황한 이연이 재차 불렀다.
“야, 왜 그래?”
그제야 산오가 이연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리는 것도 아깝다는 듯 눈알만 슬쩍 돌린 모양새였다.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달이 구름 속에 숨었다. 어렴풋한 달빛마저도 사라져 커다랗고 검은 그림자처럼 보이는 남자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쓸데없는 오지랖은 고쳐지질 않는군.”
말투에 가시가 가득 돋쳐 있었다.
평소에 잠깐 빈정거리고 말던 것과는 감정의 온도 자체가 달랐다. 이연이 어리둥절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왜 저렇게 화가 났지? 상황을 이리저리 되짚어 봐도 어느 부분이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불꽃놀이 보다가 방해받아서 짜증이 난 건가? 아니면…….
“그놈이랑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찌푸린 눈썹과 어둑한 눈동자를 간신히 구분해 냈다. 심기가 단단히 비틀린 얼굴은 금세 시선을 돌려 아무것도 없는 전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이건 어쩔 수 없는 문제잖아.”
악몽코끼리가……. 이연의 말은 날카로운 목소리에 끊겼다.
“덕분에 여기 있게 됐군.”
빈정거리는 어조는 정확하게 그를 힐난하고 있었다.
“…….”
이연이 입을 다물었다. 대놓고 구박하면 조금 억울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5급 변이종이 숲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도 방치를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설령 재경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랬다고 하더라도 이연은 숲에 들어왔을 것이다.
평소 성격대로라면 뭐라고 해 줬겠으나 산오의 얼굴이 너무 무시무시하기도 했고, ……솔직한 마음으로 이연은 산오에게 미움받고 싶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비난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이게 내가 잘못한 건 아니잖아. 이연은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침묵이 두 사람을 내리눌렀다. 묵묵하게 이어지는 발소리는 마치 무언가를 짓이기는 소리처럼 들렸다.
아무 얘기도 없이 그저 열심히 걷기만 한 덕에 둘은 부지런히 숲속을 전진할 수 있었다. 아마 호텔까지의 거리도 제법 멀어졌을 터였다.
지형의 경계선을 넘은 모양인지 점점 나무와 풀숲이 우거지고 커다란 바위가 많아졌다. 자연스럽게 경사가 높아지는 비탈길은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아 울퉁불퉁하고 제대로 다져지지 않았다. 어디선가 물소리도 들리는 걸 보니 호수에서 갈라진 계곡이 근처에 흐르는 모양이다.
똑.
‘어.’
뺨에 스치는 물기에 무심코 위를 바라보았다. 오늘 일기 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했다던 재경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무래도 기상청의 판단이 맞는 것 같았다. 이연은 날씨를 핑계로 산오에게 무언가 말을 할까 했지만, 그새 네 발자국 정도 앞서간 넓은 등은 절대로 돌아서지 않을 것처럼 냉랭했다.
그 단단함이 어쩐지 조금 낯설어서, 이연은 조용히 뺨을 닦았다.
처음에는 몇 분에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은 점점 빈도가 잦아졌다. 아직까지는 부슬비 정도였으나 언제까지 내릴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이연이 바람막이의 후드를 쓰며 산오를 살폈다.
그는 비가 오든 말든 꿈쩍도 하지 않고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마치 뭐가 내리는 줄도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산오가 입은 검은색 항공 점퍼에는 후드가 달려 있지 않았다.
아무리 나무가 우거졌다고 해도 그 사이에는 간격이 있었고, 산오가 비를 아예 맞지 않을 수는 없었다. 벌써 젖은 머리카락 끝에 물방울이 맺힌 것이 보였다.
여름이긴 했지만, 날이 어두워지면서 기온이 내려간 데다가 숲과 호수가 가까이 붙어 있는 지형 특성상 도시보다 훨씬 쌀쌀했다. 그런 날씨에 비까지 오는 것이다.
‘다 맞고 있으면 추울 텐데.’
이연이 주머니에 있는 펜과 메모지를 만지작거렸다. 그의 그림 실력으로 멀쩡한 우산을 그리는 건 어림도 없겠지만, 그린 척하고 좀 삐딱하게 생긴 우산을 만들어 주는 정도는…… 괜찮지 않나?
슬금. 이연이 산오의 눈치를 보며 옆에 있던 커다란 나무 뒤로 숨었다. 다행히 산오는 이연이 옆으로 움직이든 탈춤을 추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연보다 앞에 있어서 보지 못한 것도 있겠지만, 빗소리에 인기척이 묻힌 영향도 있는 듯했다.
무사히 둘레가 넓은 나무 뒤에 안착한 이연이 주섬주섬 메모지를 꺼내 나무줄기에 댔다. 울퉁불퉁한 나무 표면에 메모지가 조금 구겨졌다.
잠깐 멈췄는데도 산오는 벌써 저 멀리 앞서갔다. 완전히 멀어지기 전에 얼른 시늉을 끝내야 했다. 반대 손으로 종이를 고정하고 펜을 꺼내려는데, 다급하게 구는 바람에 주머니 끝에 걸린 펜이 통, 하고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앗.”
크게 튕긴 후 도르르 굴러떨어진 펜은 뒤에 있는 풀숲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진짜 가지가지 한다. 이연이 메모지를 쥐고 조심스레 펜이 사라진 곳으로 내려갔다. 경사가 꽤 가파른 데다가 젖은 흙과 땅 위로 드러난 나무뿌리가 함정처럼 얽혀 있어 잘못하면 미끄러지기 십상이었다.
이연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허리를 낮춰 무게중심이 쏠린 몸을 지탱하기 위해 발가락에 힘을 주는데, 디딘 곳이 쑥 빠졌다. 나무뿌리 앞쪽이 비에 쓸려 나가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균형이 무너진 이연은 다른 발로 무게를 지탱하려고 했으나, 하필 밟은 곳이 진흙탕이었다.
비에 깎여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가팔라진 바닥은 흠뻑 젖어 미끄러웠다. 필사적으로 몸을 가누다 간신히 몇 발자국을 더 간 이연이 붕 뜨는 부유감에 눈을 크게 떴다. 가려져 있던 풀숲 너머 광경이 뒤늦게 보였다.
낮은 벼랑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미……”
욕설을 채 내뱉기도 전에 몸은 그대로 균형을 잃고 떨어졌다.
그 후로는 쭉 빗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