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재경 씨, 담력 진짜 굉장하네요.”
이연이 이마를 짚었다. 재경은 아직도 안절부절못하긴 했지만 사정 설명을 하면서 좀 진정이 된 것 같았다. 평소보다 확연히 시무룩한 목소리가 변명했다.
“아니, 나도 이렇게 될 줄은…….”
“그걸 말이라고 해요?”
기가 막혔다.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싶더라니, 재경은 순수하게 기념품 가게 아르바이트만 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진짜 목적은 호텔에 투숙하고 있는 ‘친구’를 만나는 것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친구가 가져온 변이종을.
그래, 지금 재경의 옆에 있는 이 사람 말이다. 이연이 흘끗였으나 얼굴을 반절 이상 가려 이목구비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친구’는 성별조차 알 수 없었다.
“아니, 위장 알바면 저는 대체 왜 데려온 건데요?”
매서운 타박에 우물쭈물하는 목소리가 구구절절 흘러나왔다.
“혼자 가기 심심하기도 했고, 그리고…… 겸사겸사 이런 긴급 상황 생기면 부탁도 하려구…….”
내가 집에 가기만 하면 이 사회 부적응자 진짜 신고해 버릴 것이다. 이연이 노려보자 제가 잘못했다는 자각은 있는지 재경이 눈치를 살폈다.
재경의 ‘친구’는 변이종 암시장의 상인 중 하나라고 했다. 그런데 재경이 변이종 전문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이번에 새로 얻은 변이종 분석을 해 줄 수 있냐며 부탁해 온 것이다.
의뢰비 외의 모든 숙식비를 대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을 위장 직업까지 전부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한 터라 재경은 칠렐레팔렐레하며 창주 호수로 날아왔고, 기념품 가게 아르바이트를 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이 변이종 분석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알바 중에 어딜 자꾸 나간다 했다! 이연이 뒤늦게 안 진상에 이를 갈았다.
아무튼 여러 사람을 속이고 진행한 비밀 아르바이트는 내내 순조로웠으나 하필 오늘, 폭죽 소리에 놀란 변이종이 도망쳐 버린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호텔 측은 재경 씨랑 친구가 그러고 있는 거 알고요?”
“연줄이 좀 있어서…….”
이놈의 지연민국. 전부 철폐해 버려야 한다.
“저기, ……힘들까?”
“무슨 배짱으로 헌터 하나 없이 5급 변이종을 볼 생각을 해요? 미쳤어요?”
“아니, 악몽코끼리는 호전적인 놈은 아니니까…….”
악몽코끼리는 이연이 상대할 일 없는 중급 변이종이었지만, 대중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유명한 변이종 중 하나였다.
악몽코끼리. 그 이름대로 반투명한 코끼리 외형으로, 발 부분은 연기로 되어 있어 지면에 둥둥 떠서 다니는 제5급 변이종이다. 악몽코끼리 자체는 물리력이 통하고 사람을 경계하거나 저어하지도 않으나, 그런 변이종이 5급이나 받은 이유는 바로 발의 연기 때문이었다.
악몽코끼리의 발에서 뿜어내는 검보라색 연기는 들이마시게 되면 환각 증세를 보인다.
변이종 특성상 조사는 실외에서 이루어졌다고 했다. 투숙객들에게 들켜서도 안 되니 갈 수 있는 장소는 한정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위험하다고 출입이 통제되는 곳 같은.
“산책로 쪽 숲이요? 아니, 무섭지도 않았어요?”
“어차피 밤엔 사람이 없어서 깊게 들어가진 않았지. 그런데 걔가 숲 안쪽으로 달려가 버려서……. 너무 어두워서 따라 들어가질 못했어.”
“그건 잘했어요.”
아마 두 사람이 악몽코끼리를 쫓아 무턱대고 숲속으로 들어갔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졌을 것이다.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숙인 재경의 머리 위로, 세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떤 변이종이었어도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악몽코끼리는 최악이었다.
가장 문제는 악몽코끼리의 연기가 통하는 게 인간뿐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악몽코끼리의 연기는 변이종에게도 같은 효과가 난다. 때문에 악몽코끼리는 타 변이종들과도 함께 다니지 않았고, 만일 다른 변이종이 악몽코끼리를 우연히라도 마주치게 되면 악몽코끼리를 공격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세 사람의 머릿속에 숲속에서 놀고 있을 2급 변이종이 떠오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형.”
혜강의 부름에 이연이 난감한 얼굴로 얼굴을 문질렀다. 으으, 하고 앓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뭉치도 숲에 있다고요…….”
“뭐?”
재경이 기겁했다. 머뭇거리며 눈치만 보던 조금 전보다 훨씬 격한 반응이었다.
“둘이 만나면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죽을 거야!”
“아마 악몽코끼리가 죽겠죠.”
산뜻한 대답에 재경이 제발 도와 달라며 엎어졌다. 악몽코끼리를 이렇게 죽이는 건 범세계적 손실이라는 얼토당토않는 웅변과 함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악몽코끼리를 되찾지 못하면 그간 한 분석이나 조사 같은 건 전부 수포로 돌아간다. 변이종 오타쿠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수준의 사건일 터였다.
‘범세계적 손실 좋아하네…….’
당연하게도 동정표를 던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아서 하게 둬.”
방문에 기대어 있던 산오가 툭 내뱉었다. 서늘한 시선이 재경을 훑자, 재경이 움찔했다. 산오는 진심이었다. 그들이 이 덜떨어진 인간의 뒷수습을 해 줘야 할 필요는 없었다. 이연의 반응을 보면 그도 비슷한 생각일 터다.
“아니……. 그러긴 좀.”
그러나 이연에게서 나온 것은 떨떠름한 거부였다. 네 사람의 시선이 모두 이연에게 향했다. 한 명 빼고는 전부 이게 미쳤나 싶은 얼굴이었다.
이연이라고 재경이 불쌍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뭉치가 무사히 악몽코끼리를 만나서 처치하면 좋겠지만 뭉치가 알고 들어간 것도 아니고……. 재수 없게 뭉치를 피한 악몽코끼리가 숲을 벗어나 일반인과 마주치면 큰일이다.
“어쩌겠어. 이게 초능력자 일인데.”
그 말에 재경의 얼굴이 환해졌다.
“의뢰비는 어떻게 하실 건데요?”
“아, 그건 이쪽이 알아서 할 거야.”
재경이 상인을 가리켰다. 이 상황을 그저 방관할 수는 없었으나, 무급 노동을 할 생각 역시 없었다. 휴대폰을 꺼내 톡톡 두드린 이연이 화면을 내밀었다. 계산기 어플에 숫자가 적혀 있었다.
“얼마…… 헐, 이렇게 비싸?”
재경이 오두방정을 떨었다. 이연이 방긋 웃었다.
“휴가 중 근무잖아요.”
그 얼굴에는 절대 봐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서려 있었다.
“추가금까지 주셔야죠.”
혜강은 재경과 호텔에 남아 재경의 친구와 거래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고글을 들고 오지 않아 평소처럼 혜강의 밀착 도움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점이 아쉬웠다.
“조심해서 다녀와.”
혜강이 혀를 차며 재경을 흘끗 노려보았다. 재경은 움찔하며 눈을 깔았다.
“비, 비 올지도 모른다고 하니까 너무 무리하진 마. 뭉치 발견하면 바로 단속하고.”
웅얼대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용기가 가상했다. 사고 다 쳐 놓고 이제 와서 걱정하는 척은…….
“악몽코끼리 위험도가 있어서 상황에 따라 처치할 수도 있어요. 알아 두셔야 해요.”
“최대한,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이 친구 능력이면 포획도 가능하잖아.”
재경이 산오를 가리키며 가냘프게 애원했다. 직접 말하기는 무서운지 손가락만 향한 채였다. 이연은 노력은 해 보겠지만요, 하고 그를 안심시켰다. 괜히 불길한 말 덧붙여서 시간 끌 필요는 없었다.
“갔다 올게요.”
휴가라서 고글도 슬링백도 챙겨 오지 않아 운동화와 외투 정도만 챙겼다. 주머니에 조그만 호텔 메모지와 펜 정도. 산오가 옆에 있으니 이연이 크게 능력을 쓸 일도 없을 것이다.
늘 주렁주렁 달고 다니다가 맨몸으로 가려니 무언가 어색했다. 이연이 휑한 목을 한번 쓸고 뒤를 돌았다.
가벼운 차림새의 산오와 이연이 산책로 울타리를 넘었다.
눈앞에 펼쳐진 숲은 낮과는 달리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흘렀다. 나무가 빽빽해 희미한 달빛 정도로는 시야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고, 끝물인 듯한 불꽃놀이가 간간이 터질 때만 나무 위 정도가 간신히 밝아지곤 했다.
‘뭐……. 그래도 위험하진 않겠지만.’
이연이 옆을 흘끗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산오는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금세 숲으로 진입했다. 한동안 땅에 떨어진 나뭇잎이 바스락대며 밟히는 소리만 났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산책로는 금방 보이지 않게 되었다. 불꽃놀이도 완연히 끝났는지, 적막이 주변을 감쌌다.
그제야 이연은 산오와 단둘이 숲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재경의 전화가 오는 바람에 끊겼던 상념은 조용해지면서 다시 몰려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진짜 요지경이네…….’
이연은 아주아주 숙고한 끝에, 자신이 산오에게 일말의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절대 연애 상대로서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냥, 그냥 인간적인 호감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