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짧은 산책을 마친 후 세 사람은 스카이라운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건물 꼭대기에서 보이는 호수가 아주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기도 했고, 재경이 추천한 불꽃놀이를 보기에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예약은 혜강이 미리 했다고 했다.
“불꽃놀이 하는 날은 예약 안 하면 입장도 안 된대. 엄청 유명한가 봐.”
“오, 그런 건 어떻게 알았어?”
“몰라. 누가 갑자기 나타나서 줄줄 알려 주던데.”
기세 좋게 헌팅하러 온 사람을 인간 인포메이션 센터로 써먹은 정황이 의심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이득이었으므로 이연은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안내받은 자리는 호수가 잘 보이는 야외 테이블이었다. 마침 날씨도 적당히 선선하고 좋았다. 착석해서 주문까지 마치고 나니 노을이 슬슬 지고 있었다. 얼추 계산해 보니 밥을 다 먹을 때 즈음에 불꽃놀이가 시작될 것 같았다.
“형, 이렇게 많이 시켜도 돼?”
“당연하지.”
제산오 카드 쓸 거니까. 당당하게 생략한 뒷말 대신 믿음직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종찬과 종희가 카드 작작 긁으라고 잔소리한 이후로 좀 자제했지만, 이번엔 산오도 같이 먹는 거니까 괜찮을 것이다.
음식은 비싼 만큼 맛있었다. 볼에 빵빵하게 음식을 욱여넣고 우물거리는 이연의 모습을 본 혜강이 천천히 먹으라며 제 접시를 밀어 주었다. 그 손에는 짧은 사이 와인 한 병을 통째로 비우고 새로 시킨 위스키 잔이 들려 있었다. 아무래도 밥으로 배를 채워 술이 들어갈 공간이 사라지는 불상사를 피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덕분에 이연은 행복하고 배부른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날은 빠르게 어두워졌다. 금세 해가 수평선 아래로 숨고, 희미한 달이 떴다.
오늘따라 하늘이 흐려 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웠지만 그것보다 화려한 걸 보게 될 테니 괜찮았다. 직원이 홀에 나와 잠시 후 불꽃놀이가 시작된다는 안내를 했다. 그쯤 딱 식사를 마무리한 이연이 자세를 고쳐 호수 쪽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불꽃놀이는 처음이었다.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게 아니기도 하고, 그런 걸 보고 싶다는 생각도 미처 해 보지 못했다. 아닌 척해도 조금 기대되었다.
누구누구에게 온갖 유흥을 다 즐긴 방탕아라는 오해를 받는 중이지만, 사실 놀이공원이나 클럽 같은 것도 어쩌다가 한두 번 가 본 게 다다. 가만 되짚어 보니 산오와 함께 지내게 된 후로 이런 경험 할 기회가 유독 많았던 것 같았다. 놀이공원이며, 백화점, 클럽, 사교 파티. 이제는 호텔에 불꽃놀이까지……. 평소의 심심한 생활 패턴을 돌이켜보면 정말 부지런히도 다녔다.
‘그렇다고 제산오가 주도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신기하네.’
이연은 티 나지 않게 시선만 돌려 옆자리의 산오를 흘끗였다. 언제 생겼는지도 모를 습관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나도 모르게 들떴나?’
침착하게 굴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니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주웠을 때 한 다짐은 어느새 무색했다.
최근의 기억은 늘 저 무덤덤한 얼굴투성이라는 것만 봐도 그렇다. 아침을 차려 주고, 같이 출근을 하고, 같이 퇴근을 하고, 변이종을 잡고, 쇼핑도, 의뢰도, 주말에도, 심지어 잠을 잘 때조차. 어느 날을 떠올려 봐도 산오가 있었다.
평생 연이 없으리라 여겼던 최강의 초능력자는 어느 날 갑자기 인생에 뛰어들어 오더니 자연스럽게 일상에 스며들었다.
산오는 무표정한 눈으로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늘 한 가지 표정밖에 짓지 않는 듯한 남자는 의외로 여러 얼굴을 보여 줬다. 물론 대다수는 심드렁한 얼굴이었고 그다음은 화내거나 짜증스러워하거나 한심해하거나 비웃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가끔, 아주 가끔은 진짜로 웃었다.
이연의 뇌리 한구석에서 붉게 물든 뺨으로 웃는 얼굴이 영화 필름처럼 펼쳐졌다. 노을을 맞으며 난장판이 된 거실에서 대화했던 어느 날의 저녁.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눈매를 아주 살짝 접고. 서늘하던 초록색 눈동자에 온기가 섞여 들 때면…….
‘어.’
갑자기 심장이 확 죄어들어서, 이연은 눈을 깜빡였다. 뭐지? 방금 든 감각의 정체를 캐내기 위해 생각의 꼬리를 다시 잡아 들려는 순간.
펑! 펑! 퍼퍼펑!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요란한 화약 소리에 주의를 빼앗긴 이연이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새까맣던 밤하늘이 색색깔의 불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커다랗고 화려한 빛들이 테이블은 물론이고 혜강이나 산오의 얼굴까지 순간순간 물들였다. 불꽃이 잦아드는 꼬리마저 유성처럼 아름다웠다.
“와…….”
이연이 감탄사를 흘렸다. 폭죽 소리로 먹먹한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불꽃놀이는 처음인가 보지.”
질문이라기보다는 장하다는 감탄사에 가까웠다. 또 뭐라 하려고. 이연이 빈정거리듯 투덜댔다.
“그래, 처음이다. 넌 행사 다닐 때 많이 봤겠네. 이번엔 네가 이겼다.”
“나도 처음이야.”
분명히 주변이 온통 시끄러운데, 이상하게 그 목소리만 선명했다.
“그럼 둘 다 처음이군.”
산오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아주 희미한 웃음이었지만, 마치 사진을 찍는 것처럼 사소한 움직임까지 뚜렷하게 눈에 박혀 들었다.
두근. 심장 소리가 울렸다.
이연이 멍하니 산오를 바라보았다. 매끈하고 선명한 이목구비가 불꽃이 터질 때마다 온갖 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붉은색, 보라색, 노란색, 초록색, 주황색, 다시 붉은색.
그 모습이 정말…….
“야.”
“어, 어?”
“전화.”
산오가 턱을 까딱였다. 이연이 허둥지둥 시선을 돌려 테이블에 올려놨던 휴대폰을 보았다. 재경에게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주변이 하도 요란해서 벨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데 산오가 용케 알아챘다. 이연은 이유 모를 민망함에 휴대폰을 후다닥 집어 들었다.
“네, 네. 재경 씨?”
[아……. 이연 씨.]
“잠시만요.”
펑. 펑. 폭죽 터트리는 소리로 너무 시끄러웠기 때문에, 이연은 잠깐 자리에서 일어섰다. 야외 라운지를 나와 안으로 들어오니 그나마 재경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렸다.
“저 방금 안에 들어왔어요. 다시 말해 보세요.”
[어, 어……. 바쁜데 미안해.]
재경의 목소리는 조금 떨떠름했다. 자기가 전화 걸어 놓고, 뭐야? 이연이 의아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무슨 일 있어요?”
[아, 그……. 부탁이 있어서.]
“부탁이요?”
[잠깐 내 방으로 와 줄 수 있어?]
“네…….”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이연이 꺼진 휴대폰 화면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라운지로 다시 나갔다. 애들에게 이야기는 하고 가야지 싶었던 것이다.
“나 잠깐 재경 씨한테 갔다 올게.”
그 말에 산오가 대번 인상을 찌푸렸다.
“왜.”
“부탁이 있대서…….”
“이 밤에?”
이연도 그게 궁금했으나 재경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으니 대답할 말도 없었다. 산오가 몸을 일으켰다.
“같이 가.”
“어? 왜, 계속 구경해. 불꽃놀이 이제 시작했잖아.”
기껏 처음 보는 불꽃놀이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이연이 만류했으나, 산오는 무심한 얼굴로 고개만 까딱였다. 앞장서라는 뜻이었다.
“뭐야, 둘 다 가게? 나도 갈래.”
두 사람이 자리를 뜰 기미가 보이자 혜강 역시 일어섰다.
“너도?”
이연의 말에 혜강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나 혼자 여기서 뭐 해? 또 나 빼놓으려고 하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그래, 같이 가자. 같이 가.”
이연이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 사람은 재경의 방으로 향했다.
“이연 씨, 어서…… 전부 왔네?”
“네. 다 같이 있었거든요.”
“어어…….”
재경은 예상치 못한 대인원에 조금 당황한 듯했다. 산오를 보는 눈빛이 특히 흔들렸다. 산오가 무시무시하게 그를 노려보고 있는 탓도 있을 것이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 안으로 들어온 이연이 탁자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커다란 후드에 마스크까지 눌러쓴 차림은 누가 봐도 수상해 보였다.
“이분은…….”
“아, 내 친구야.”
대단히 두루뭉술한 설명이었다. 뭐지? 묘한 분위기에 이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부탁이 뭔데요?”
이연의 물음에 재경이 침을 삼키며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그, 내가 있잖아, 부탁이 있는데…….”
“왜요, 무슨 일인데요?”
“그게…….”
재경의 시선이 이연과 산오를 번갈아 가며 흘끗댔다.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 우물쭈물하며 망설였다.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모습에 보다 못한 이연이 재경의 양어깨를 쥐었다.
“재경 씨, 재경 씨. 저 봐요.”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동자가 이연을 향했다. 이연이 차분하게 안심시켰다.
“괜찮으니까 말해 주세요. 무슨 일이에요?”
이연의 눈동자를 한참 응시하던 재경은 입을 달싹거리다가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의뢰 하나만…… 맡겨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