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어?’
이연이 눈을 깜빡였다. 뭉치의 털이 순간적으로 반짝 빛난 것처럼 보였다. 햇빛 때문인가? 별생각 없이 그렇게 넘기려던 이연은 퍼뜩 깨달았다.
잔뜩 곤두선 털이 서로 스치면서 작은 스파크가 튄 것이다.
그리고 여긴 물기가 가득한 수영장이다.
“뭉치, 안 돼!”
안색이 새하얗게 탈색된 이연이 냅다 부르짖었다. 대참사는 막아야 했다. 모 호텔 수영장 전류 방사 사건. 순식간에 다음 날 신문 헤드라인까지 주르륵 뽑히는 환상이 펼쳐졌다.
그러나 뭉치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심지어 머리와 목을 잔뜩 숙인 전투태세 그대로 발을 내디뎠다.
“아니야, 그거 아니야! 나 괜찮아! 절대 그러면 안 돼!”
다급하게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다 못해 산오를 끌어안았다. 산오의 머리를 제 어깨에 붙이고 기계적으로 하하 웃자, 뭉치가 혼란스럽다는 듯 고개를 조금 기울이는 것이 보였다. 효과가 있다. 이연은 필사적으로 손가락에 감기는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쓰다듬으며 친분을 과시했다.
“보이지? 오면 안 돼. 그럼 우리 쫓겨나. 난 아직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다고!”
얼결에 본심을 뱉어 낸 이연이 뺨에 흐르는 물방울을 훔쳤다. 이게 눈물인지 수영장 물인지 모르겠다.
뇌전계 변이종을 수영장에 데려오는 미친놈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게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산오를 피해 멀찍이 떨어져 있느라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다행히도 이연의 그런 어필이 통한 건지, 잔뜩 부풀려져 있던 뭉치의 몸은 서서히 평소대로 돌아왔다.
끼잉…….
시무룩한 소리를 내며 풀 근처까지 타박타박 걸어오려는 것을 이연이 후다닥 뛰어나가 마중했다. 아무리 진정했다지만 물 근처로 데려올 순 없었다. 총알처럼 뛰쳐나가는 하얀 몸을 바라보는 초록색 눈이 못마땅하게 가늘어졌다.
이연은 나온 김에 커다란 수건을 가져와 뭉치를 덮고 쓰다듬었다. 복슬복슬한 귀와 꼬리가 축 처져 있었다. 부정어를 잔뜩 들어 기가 죽은 듯했다. 뭉치 잘했어. 잘 참았어. 뭉치 최고야. 이연이 칭찬의 염불을 왼 후에야 뭉치는 귀를 반쯤 바로 세웠다.
“……괜찮아?”
혜강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이연이 제 품으로 파고드는 뭉치를 수건째로 안으며 쓸쓸하게 중얼거렸다.
“여기 말고 다른 데…… 뭐가 있냐?”
물에 쫄딱 젖은 반나체로 수건에 감싼 반려 변이종을 안고 비척비척 걸어 나가는 모습은 잘 봐 줘도 패잔병이었다. 혜강이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가방을 챙겨 따르고, 마지막으로 산오가 자리를 벗어났다.
수영장은 평화를 찾았으니 호텔 입장에서는 해피 엔딩이다.
뭉치를 데리고 갈 수 있는 부대 시설은 생각보다 없었다. 결국 택한 것은 호수 근처의 숲과 가까운 산책로. 샛길로 이어지는 길을 걸어 호텔과 조금 멀어지자, 피톤치드로 압사할 것 같은 녹음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산책이라.”
산오가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꿈도 꾸지 마.”
운동 광인의 개수작을 단호하게 차단한 이연은 손바닥만 한 수영복에서 간단한 옷으로 바꿔 입은 채였다. 품이 넉넉한 흰 티셔츠는 어깨선이 팔뚝까지 내려오고 밑단은 허벅지 반을 덮었다. 그 아래 선이 굵은 영어가 잔뜩 프린팅된 통 넓은 반바지가 간신히 보였다.
“자, 뭉치야. 아까 거기보다 여기가 좋지?”
이연이 안고 있던 뭉치를 내려놓자, 뭉치가 꼬리를 휘적대며 펄쩍펄쩍 뛰었다. 금세 산책로를 활보하는 조그만 호랑이를 보며 머리를 털자 물방울이 조금 튀었다. 느긋하게 한 바퀴 돌고 나면 다 마를 터였다.
“여기도 괜찮다. 그렇지?”
“어어, 뭐…….”
혜강의 대답은 수영장에 있을 때보다 확연히 건성이었다. 심드렁하고 설렁설렁한 걸음걸이가 명백하게 의욕이 없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었지만, 산책이라는 것을 왜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향 인간 정이연은 알아채지 못했다.
“어디까지 걷게?”
“글쎄. 이거 산이랑 연결되어 있나?”
은근한 의사 표시마저 알아듣지 못한 이연이 주변을 두리번댔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나무로 만들어진 안내문이 보였다.
[산길이 조성되지 않아 길을 잃기 쉬우니 절대 들어가지 마시오.]
“안 되어 있나 봐.”
“그러네.”
늦은 오후에서 저녁으로 막 넘어가는 시간의 숲은 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예쁘게 내리쬐고 간혹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의 평화가 다 모여 있는 것 같은 광경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숲의 끝이 보이지 않고, 멀리 있는 나무의 꼭대기가 여기서도 촘촘히 보이는 것으로 짐작했을 때 그리 평탄한 지형은 아닌 듯했다.
“변이종이 나오는 건 아니겠지?”
“요즘은 헌터 고용 안 하는 호텔 없대.”
알바하며 주워들은 최신 정보였다. 혜강이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번화한 도시 중심부와 달리 개발이 덜 된 한적한 지역은 변이종이 발견되지 않고 활동하기 딱 좋았다. 창주 호수 부근은 아슬아슬하게 적공의 범위 내였고 변이종이 도시와 시골을 가리면서 나타나지는 않았기 때문에, 호텔 쪽에서도 나름대로 방비를 단단히 할 터였다.
“돈 아깝군.”
별말 없이 그들을 따라 걷던 산오가 툭 중얼거렸다. 이게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다. 이연이 훈계하듯 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데에 돈 아끼는 거 아니야.”
“내 말이.”
……왜 대화를 하는데 말이 안 통하는 것 같지? 이연은 혼란하게 산오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늘 그렇듯 속 시원히 말하지 않았다. 제가 이상한가 싶어 혜강을 바라보았지만 같이 알아듣지 못한 기색이어서 조금 안심이 됐다.
이연 역시 모든 말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해 주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산오는 좀 심했다. 남들 다 A 이야기 하고 있는데 혼자 Z를 이야기하는 주제에 주어도 목적어도 죄다 생략해 버리니 알아듣는 게 용한 수준이다.
‘그러니까 친해진 줄도 몰랐지…….’
산오의 호감을 알아채는 건 종찬이나 종희도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신경 안 쓰겠다더니 틈만 나면 계속 제산오 생각만 하고 있는 이연이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하는 김에 산오를 흘끔대니 뭘 보냐는 눈빛이 날아왔다. 이것도 제산오식 소통이겠지. 쓸데없이 굳은 믿음으로 가득한 이연이 온화한 기세를 풍기고 있으려니 산오의 눈빛이 좀 더 열렬해졌다. 그래, 내가 다 안다니까.
“재수 없게 쳐다보는 이유를 말해.”
뭐, 그렇다고 굳이 알은척할 필요는 없었다. 괜히 말했다가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야.”
이연이 김칫국을 들이켜는 동안 살벌해지는 분위기를 감지한 뭉치가 다시 달려왔다. 뭘 하다 왔는지 그새 얼굴에 이슬이 잔뜩 묻어 축축했다.
그런데 뭉치는 이연의 주변을 몇 바퀴인가 빙글빙글 돌더니 이내 산책로 울타리를 훌쩍 넘었다. 밧줄이 쳐진 경계선 너머에서 꼬리를 살랑이며 뛰는 시늉을 하는 행동의 의미를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뭉치. 거기서 놀고 싶어?”
숲을 턱짓하며 말하자 뭉치의 노란 눈이 더 초롱초롱해졌다. 옆에서 혜강이 기겁했다.
“형, 미쳤어? 2급 변이종을 숲에 풀자고?”
“뭉치잖아. 어차피 숲에 사람들도 못 들어가고, 만약 발견한다고 해도 사람 공격은 안 할 것 같은데.”
뭉치는 혜강이 주운 이래로 내내 아기 호랑이 모습이었다. 당연히 집채만 하던 청호 모습이 본체일 텐데, 늘 조그맣게 해서 다녔으니 답답했을 것이다.
산오와 동거를 시작하자마자 뭉치가 들어온 셈이니 뭉치와 같이 지낸 기간도 꽤 오래되었다. 그동안 뭉치와 동네 거리를 활보한 적도 적지 않았으나, 이 똑똑한 변이종은 이연이 위협받는 상황이 아니라면 한 번도 사람을 공격하려 들지 않았다.
심지어 거리를 걷던 어린아이가 귀여운 고양이라며 끌어안으려고 할 때도 얌전했다. 상급 변이종의 자아라 그런지 말도 아주 잘 알아들었고……. 해서 이연은 이 눈치 빠른 아기 호랑이에 대해 제법 두터운 신뢰가 쌓인 참이었다.
“대신 절대로 사람 공격하면 안 돼. 변이종은…… 알아서 하고. 그치만 사람은 안 돼. 이왕이면 마주치지도 마. 알았지?”
뭉치가 마치 대답하는 것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영리한 생물이니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우아하게 뒤돈 검은 호랑이는 땅을 몇 번 박찬 걸로도 금세 작아졌다. 멀어지는 뒤꽁무니가 푸른 털가죽을 가진 거대한 호랑이로 변하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 혜강은 계속 걱정되는지 뭉치가 사라진 방향을 연신 흘끗였다.
“만약 헌터들이 뭉치 발견하면 어떡해?”
“괜찮아. 우리 뭉치가 이겨.”
팔불출 부모 같은 말에 혜강이 이마를 짚었다. 이연이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농담이야. 알아서 피하겠지. 내일쯤 다시 데리러 오자.”
뭉치는 이연의 집에서 나가려면 진작에 나갈 수 있었다. 그냥 창문이나 문 부수고 어디든 가 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는 건 뭉치가 이연과 함께 지내는 것에 만족한다는 뜻이었다. 아마 이연의 적의를 살 만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