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76화 (75/250)

#76

“이연 씨. 나 왔어.”

“재경 씨!”

그때, 재경이 가게로 복귀했다. 이연이 반색하며 벌떡 일어섰다.

“뭘 하다 이제 와요? 똥을 네 시간 싸고 온 거예요? 혹시 변비?”

“아, 진짜……. 예쁜 분 앞에서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재경이 투덜거렸다. 호텔에서 혜강을 처음 본 재경은 그와 마주칠 때마다 어울리지 않게 수줍음을 탔다. 설마 스토커 후보가 이렇게 가까이? 이연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이연 씨가 잘 있어 줬으니까 오늘은 이만 퇴근해. 나머지 시간은 내가 할게.”

“정말요?”

불온한 시선을 보내던 눈동자는 당장 원상태로 복귀했다. 아직 오후 세 시인데 퇴근이라니. 일을 열심히 한 보람이 있다. 재경이 자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 불꽃놀이 한다던 거 들었어? 잊지 말고 일행이랑 잘 보러 가.”

“와, 고마워요! 저녁은요?”

“따로 먹자. 난 약속이 있어서.”

바쁘네. 이연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지만, 크게 의심을 품지는 않았다. 애초에 재경의 인맥으로 온 곳이었으니 수상할 일도 아니었다.

하와이안 셔츠를 벗어서 정리한 이연은 혜강과 함께 카운터를 나섰다. 예상치 못하게 얻은 자유 시간에 기분이 금세 들떴다.

“아르바이트라는 게 원래 이렇게 해도 되는 거야?”

가게를 나온 혜강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이연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역시 아르바이트는 처음이라 어떤 식으로 근무가 이루어지는지 잘 몰랐다.

“잘 모르겠는데, 재경 씨가 된다니까 괜찮은 거 아냐?”

“그건 그렇겠지만…….”

혜강은 여전히 미심쩍은 기색이었지만, 이 상황이 그들에게는 이득이었으므로 금세 의혹을 털어 버렸다. 이연이 신난 얼굴로 물었다.

“어디 갈까?”

“수영장 갈래? 산오 형이랑 뭉치도 아직 거기 있어.”

“그래!”

수영장에서 바로 오느라 수영복 차림인 혜강과 달리 이연은 가벼운 평상복 차림이었다. 먼저 가 있겠다는 혜강을 보내고 발걸음도 가볍게 방에 올라온 이연이 가방을 뒤적였다. 놀 생각을 하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쿵.

“응?”

벽을 타고 흐릿하게 울린 둔탁한 소리에 이연의 고개가 들렸다.

행동을 잠시 멈추고 벽을 물끄러미 바라봤지만,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방을 휘휘 둘러본 이연은 사위가 조용한 것을 다시 확인하고서야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야, 나 왔다!”

수영장에 입장한 이연이 혜강과 산오가 누워 있는 선 베드 쪽으로 요란하게 달려왔다. 아까와 비슷한 자세로 누워 있던 산오가 보지도 않고 일갈했다.

“뛰지 마. 죽고 싶나?”

부모님이나 할 법한 잔소리에 이연이 삐죽이며 속도를 줄였다. 금방이라도 오체분시를 해 버릴 것 같은 싸늘한 목소리였지만, 이미 진실을 알고 있는 이연으로서는 찔끔할 것도 없었다.

‘원래라면 저런 말도 안 하고 그냥 치워 버렸겠지.’

오히려 겉모습에 가려져 있던 내면이 그제야 보였다.

따져 보면 산오가 저와 좀 친해졌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차피 그는 볼일이 끝나면 금방 돌아갈 사람이고, 이연 같은 건 금방 잊어버릴 터다. 둘은 사는 세계가 달랐다. 달라야 했고. 만일 산오가 아무 말 없이 사라져도 이연은 그러려니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도, 좀 신기하긴 했다. 본인의 다짐과 다르게 누구보다 신경 쓰는 중인 이연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산오를 훑었다. 조금 전에 봤는데도 괜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제산오는 물리 계열 초능력자도 아닌 주제에 말도 안 될 정도로 좋은 몸을 가지고 있었다. 상의를 입지 않은 맨몸은 마치 누군가가 심혈을 기울여 조각한 작품 같았다. 불거져 나온 뼈와 깊이 팬 근육의 경계, 두터운 몸을 날렵하게 보이게 하는 자잘한 잔근육들의 조합은 섬세하고 아름답다 못해 어딘지 야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빤히 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조금 더워져서, 이연은 손부채질을 했다. 가만히 서 있다가 팔을 펄럭거리는 둥 혼자서 별 난리를 치는 사람에게 그제야 산오의 시선이 닿았다.

이연의 꼴을 확인하자마자 산오가 상체를 일으켰다.

“너.”

“응?”

“옷은.”

누가 들으면 나체인 줄 알겠다.

“수영복 입었잖아.”

이연이 대수롭지 않게 아래를 가리켰다. 딱 달라붙는 재질의 숏 사각 수영복은 선수용으로, 꼼꼼하지 못한 모바일 쇼핑의 실패작이었다.

그렇다고 다시 살 시간은 없어서 급한 대로 들고 온 참이다. 뭐, 어차피 물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지. 쓸데없이 쾌남적인 사고였으나 이연은 원래 한번 입은 건 부끄러워하지 말자는 확고한 패션 철학의 소유자였다.

태연하게 선 두 다리 위로 매끈한 종아리와 동그란 무릎을 거쳐 허벅지로 올라가는 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골반에 겨우 걸쳐진 천 쪼가리를 보는 시선은 하나가 아니었다. 선글라스에 가려진 산오의 눈가가 미미하게 찌그러졌다.

“물에나 들어가.”

그 말과 동시에, 바닥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이연을 집어 던졌다. 첨벙! 커다란 소리와 함께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성인의 평균 키보다 깊은 풀은 호리호리한 덩치를 부드럽게 받아 냈다. 보글보글하는 기포와 함께 물 밖으로 머리만 내민 이연이 버럭 소리쳤다. 온통 젖은 머리카락과 뺨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야! 이럴 거야?”

“놀고 싶어 했으니 잘 됐군.”

산오는 새침하게 대답하고는 다리를 꼬았다. 이 자식이. 지만 능력 있는 줄 알아? 이연의 눈이 맹렬한 복수심으로 물들었으나, 산오에게 바로 능력을 썼다가는 대번 “거짓말을 했군.” 하고 찌를지도 몰랐다.

가뜩이나 미남 두 명의 체류 덕분에 수영장엔 사람이 제법 있었고, 심지어 그 미남에게 말을 걸었다가 내던져지는 것 같은 광경에 사람들의 시선이 흘끔흘끔 모이던 차였다.—구경하던 사람들과 산오와의 물리적 거리는 확실히 멀어졌다.— 이연은 차선책으로 산오를 잡아당겨 끌어내려고 했지만, 힘으로 안 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직접 확인할 수도 없었다.

이연이 풀을 벗어나려고 할 때마다 산오가 다시 집어 던졌기 때문이다.

“너 진짜…….”

오뚝이처럼 머리를 내민 이연이 이를 갈며 한쪽 다리를 걸치다가 꿀렁이는 바닥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입수당했다. 꼬르륵하는 소리가 이제는 배경음 같았다.

“형도 형이다.”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던 혜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쯤 되면 포기할 법도 한데, 이연도 제법 근성이 있었다.

혜강은 선 베드에서 일어나 티셔츠를 벗었다. 이번에 다시 올라오면 적당히 달래 풀에서 놀아 줄 생각이었다.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듯 허리를 슬쩍 구부리면서 풀을 보는데, 잠잠했다.

“……형?”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것은 이연의 머리통이 다시 올라오지 않는 시간이 생각보다 더 길어졌을 때였다.

물을 많이 먹었나? 다급하게 풀 근처로 다가간 혜강이 물속을 들여다보려는데, 그 옆에 탄탄한 다리가 섰다. 곧이어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수영장 깊숙이 빠져 있던 한 남자가 건져졌다. 철 밧줄에 감긴 하얀 몸은 정신을 잃은 것처럼 축 늘어졌다. 눈을 감은 얼굴이 평소보다 하얗게 질려 있었다.

“형. 괜찮아?”

혜강이 다급하게 이연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놀란 시선이 어쩔 줄 모르고 산오를 향했다. 얌전히 이연을 수영장 바깥에 내려놓은 산오가 목을 감싸 숨을 확인했다.

그때였다.

와락. 늘씬한 팔이 산오의 목과 어깨를 감았다.

“수를 쓰는군.”

가소롭다는 듯 중얼거리는 미남에게 방긋 웃는 얼굴이 속삭였다.

“이게 다 사랑이야.”

이연은 그대로 산오의 목을 끌어당겼다. 아무리 말라도 성인 남자의 몸무게. 그걸 모조리 실은 채로 발로 바닥을 강하게 밀어 뒤로 낙하하는 몸짓에는 강한 힘만큼이나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이 자식에게는 꼭 물을 먹이겠다는 각오 정도.

첨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그대로 입수했다. 혜강이 풀 아래를 들여다보자, 커다란 살색 덩어리가 너울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잘 논다, 진짜…….”

얼결에 튀긴 물을 고스란히 맞은 혜강이 투덜거리며 물속으로 따라 들어가려는데, 문득 뒤에서 섬찟한 기운이 느껴졌다. 뭐지, 그러고 보니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곧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산오와 이연 역시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는 혜강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세 사람의 시야에 시커먼 털이 보였다.

그릉…….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선 베드 아래에 얌전히 엎드려 자고 있던 뭉치가 자세를 낮추고 노려보고 있었다. 이연이 계속 수영장에 내동댕이쳐지는 모습을 보고 공격을 받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산오를 노려보는 호박색 눈동자가 살벌하게 빛났다. 우리 뭉치, 우선순위가 확실하구나……. 철없는 주인 이연이 그 와중에도 감격 어린 눈을 했다.

그러나 상황이 그리 감동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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