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간편한 차림새의 귀여운 커플은 진열대 사이를 걸으며 조잘조잘 수다를 떨었다.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으나, 내부는 규모가 작고 손님이라곤 그 커플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이연에게도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어우, 예전에 왔을 땐 좋았는데 어제는 좀 그랬어. 새벽에 쿵쿵거리는 소리 들리지 않았어?”
……괴담인가? 그러고 보니 호텔 같은 숙박업소에는 귀신이 많이 산다던데. 이연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품에 잔뜩 안은 물건을 다시 하나하나 올려 두었다.
“그래? 난 잘 잤는데…….”
“자기는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못 일어나잖아.”
“이상하네. 어제는 자기도 푹 잘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우, 무슨 소리야!”
머리를 예쁘게 틀어 올린 여자가 키가 큰 남자의 어깨를 퍽퍽 쳤다. 푹 자는 걸 싫어하나? 왜 때리지?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이연은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할 일에 집중했다. 조그마한 상자들이 열을 맞추어 놓이는 모습은 묘한 쾌감이 있었다.
“헐, 혹시 변이종인가?”
“에이. 호텔에 어떻게 변이종이 들어와? 요즘 헌터 고용 안 하는 데가 어딨다구.”
……설마 뭉치가 뛰어다닌 건 아니겠지? 찔리는 바가 있는 이연이 애써 모른 척 진열대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건 그래. 그럼…… 귀신?”
“어쩐지 방이 오싹하더라.”
여자가 웃으며 엄살을 부리자 남자 역시 소리 내 웃었다. 알콩달콩하게 잡담을 나누던 두 사람은 조그마한 수제 비누 세트를 사고는 가게를 나갔다.
그 후로도 이연이 와글거리는 가게를 혼자 지키는 동안, 다양한 손님들이 와서 수다를 떨며 구경하다 나갔다. 덕분에 요 며칠 호텔에서 일어난 이런저런 사건들을 토막토막 주워들을 수 있었다. 조금 전의 커플처럼 쿵쿵 소리를 들었다느니, 새벽에 산책로를 걷다가 유성우를 본 것 같다느니, 수영장에 미남 두 명이 하루 종일 누워 있어서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느니…….
눈이 돌아갈 만큼 바쁜 건 아니었지만, 체크아웃 시간 근처라 하루 중 제일 분주한 때였다. 그런 시간대에 독박 업무를 하고 있으면 부아가 나는 것이 정상이다. 재경 씨 오면 교대하고 놀러 가야지. 반짝 붐비고 썰물처럼 손님이 빠진 가게의 카운터에 오도카니 앉은 이연이 뚱하게 생각했다.
“형. 잘하고 있어?”
딸랑, 하고 방울이 다시 울렸다. 형광 야자수가 그려진 수영복 반바지에 하얀 티셔츠만 간단하게 챙겨 입은 혜강이 들고 온 음료수 하나를 건넸다.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있을 정도로 시원한 탄산음료였다.
“고마워.”
안 그래도 내내 손님 응대하느라 목이 말랐던 참이다. 이연이 단숨에 캔을 따서 꿀꺽꿀꺽 들이마셨다. 목울대가 꿈틀거리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혜강이 카운터에 기댔다.
“둘이 엄청 친하다니까.”
“응?”
“산오 형이랑 형.”
뭔 소린가 했더니 아까 이야기의 연장선인 모양이다. 내가 보기엔 그냥 그런데……. 이연이 말도 안 된다고 고개를 젓기도 전에, 혜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솔직히 형이 그렇게 편하게 대하는 사람 처음 봤어.”
“내가? 제산오를?”
이연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가리켜 보았지만, 혜강은 그 과장된 몸짓에 속지 않았다.
“형은 반말 잘 안 쓰잖아.”
대부분의 상황에서 이연은 존댓말을 썼다. 미래 정도의 아주 어린 아이 정도만 아니라면, 이연이 말을 놓는 상대라고 해 봤자 혜강 정도였다.
그리고 산오.
“그건…….”
그러네? 너무 자연스럽게 써서 쓴 줄도 몰랐다. 이연이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조금 당황했다. 내가 언제부터 반말했더라? ……설마 처음부터 했나?
“형이랑 산오 형은 성격도 정반대인데.”
혜강은 말하면서도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산오와 이연은 성격부터 성향까지 상극이었다. 외형은 말할 것도 없고 말수나 말투, 전투 스타일 등의 기본적인 정보에서부터 식사 습관이나 아침 루틴 같은 사소한 부분까지 전부 달랐다.
많은 경우에서 이연이 접고 들어간다고는 하지만, 이연 역시 마냥 순한 성격은 아니었다. 둘이 부딪히지 않고 몇 달을 같이 지냈다는 건 산오도 어느 부분에서는 타협을 했다는 뜻이었다. 물론 대다수는 이연이 양보를…… 아니, 이거 그냥 내 희생으로 유지되는 관계 아니냐?
“내가 착해서 그런 것 같은데?”
진지하게 중얼거린 이연의 말은 농담으로 치부되었다.
“아까 산오 형이 형 끌어안는 것도 다 봤어.”
“끌어안기는 무슨, 공 맞지 말라고 한 거잖아.”
“선크림도 챙겨 주고.”
“그거야…….”
그건 상식선의 행동…….
“산오 형이 그렇게 친절한 사람이야?”
“…….”
그건…… 그러네? 이연이 다시 움찔 멈췄다.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처음에 보여 준 산오의 모습과 비교하면 천지가 개벽하다 못해 멸망한 수준이 아닌가.
그럴 인간이 아닌데.
“나도 산오 형하고는 제법 친해졌지만, 악수도 안 해 봤어.”
“나도 악수는 안 해 봤어.”
“그런 말이 아니잖아.”
아는데 그냥 민망해서 아무 말이나 꺼내 봤다. 이연이 머쓱하게 음료수를 꼴깍였다.
혜강의 지적에 따라 기억을 가만히 되짚어 보니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될 정도로 협조적이었던 상황들이 조금씩 떠올랐다. 놀이공원에서 그의 다리 사이에 앉았을 때 얌전했던 거야 우산 대용이었다고 치지만, 파스타 게임 할 때도 망설임 없이 닿, 닿, 닿았잖아. 보통 승부욕이 아무리 세도 그런 행동을 기꺼이 하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연이 가는 곳은 어디든 따라오고, 칼을 맞았을 때도 당장 치료를 해야 한다며 잔소리로 달달 볶았다. 취미도 같이 해 주겠다고 하고, 이연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알아서 보호해 준 적도 한둘이 아니다. 게다가 오늘 일까지.
이건 무려 제산오가 아닌가. 수상하다는 이유로 초면에 다짜고짜 죽이려고 들었던 그, 제산오.
“……진짜 친해지긴 했나 보네.”
이연이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딘지 어이없다는 어조였다.
“그걸 이제 알았다는 것도 신기하다. 같이 살면 원래 그렇게까지 친해지는 거야?”
“그럴지도…….”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으나 둘 다 독립자취인이라 의문이 속 시원히 해결되지는 않았다. 생활 반경을 공유하는 걸로 생기는 친밀감이라는 게 제산오에게도 적용되다니…… 그도 인간이긴 했구나 싶을 뿐…….
솔직히 예상도 못 했다.
이연은 새로 알게 된 놀라운 진실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늘 험하게 말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꽤 친근하게 굴었단 말이지. 심지어 타인이 그렇게 느낄 정도로. 그렇게 생각하니 산오의 무뚝뚝한 얼굴도 좀 더 귀엽게 보이는 것 같았다.
“나도 형이랑 같이 살 걸 그랬어.”
“응?”
혼자 흐뭇해하느라 혜강의 말을 듣지 못한 이연이 되묻자, 혜강은 말끔하게 닦인 카운터에 뺨을 얹고 투덜거렸다.
“형 요즘 나한테 소홀해.”
곱슬한 머리카락이 나무 상판에 흩어지고, 말랑한 볼이 조금 눌려 발음이 샜다. 소년 티를 겨우 벗은 앳된 얼굴은 늘 그렇듯 표정 변화가 크게 없었지만, 섬세한 모양의 눈썹과 눈매를 아주 조금 늘어트린 것만으로도 퍽 시무룩해 보였다.
하지만 이연은 속지 않았다. 혜강은 외로움은 타지만 막상 옆에 사람이 있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 희한한 성격이다. 이연이 산오와 붙어 다니는 것만큼의 빈도로 혜강을 끌고 다니면 일주일도 안 되어서 도망갈 것이다.
“뭐가.”
“내가 필요하다고 할 땐 언제고, 산오 형이랑만 다니고.”
“어이구, 그래서 섭섭했어?”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투정을 부리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이연이 웃으며 혜강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가 혜강을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2년 전쯤. 혜강이 막 해를 넘겨 스무 살이 되었을 즈음이었다. 늦은 저녁에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문이 닫힌 상가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가출 청소년이었기 때문에, 이연은 처음엔 잘 타일러서 집에 돌려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갈 데가 없다고 했다. 가족이 모두 없다고.
외로워지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래서 이연은 혜강을 동업자로 맞아들였다.
“언제나 관심 많으니까 걱정 붙들어 매. 혹시 애인 생기면 꼭 소개해 주고. 이상한 사람 데려오지 말고.”
“참나…….”
혜강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지만, 그리 기분 나쁜 기색은 아니었다. 농담이려니 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연은 진지했다. 혜강이 얼핏 보기에는 야무져도, 은근히 보는 눈이 없어서 또 몰랐다. 얼굴은 도자기 인형처럼 생겨서 가만있어도 온갖 변태들이 꼬여 드는데 본인이 밖에 나가는 걸 귀찮아해서 천만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자석처럼 몰려드는 스토커들 물리치느라 매일매일 난리가 났을 것이다.—실제로 전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