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74화 (73/250)

#74

“다 하고 와.”

마찬가지로 수영복만 입고 옆 베드에 드러누워 있는 산오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툭 내뱉었다. 이 자식들이 나를 인간 효자손으로 쓰잖아……. 똥 씹은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선크림을 바라보던 이연이 한숨을 쉬며 주워서 협탁에 올려놓았다.

“솔직히 산오 형도 올 줄은 몰랐는데.”

혜강이 산오에게 보이지 않는 각도로 고개를 돌려서 소곤거렸다. 짰나? 다들 비슷한 소리를 하네.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선크림 바르기에 집중할 때였다.

“산오 형이 이연이 형 진짜 좋아하나 봐.”

“뭐, 뭔 개소리야?”

이연이 혜강의 등짝을 철썩 치며 펄쩍 뛰었다.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과장된 반응에도 혜강은 아프잖아, 하고 가볍게 투덜거릴 뿐이었다.

“집에서 내내 붙어 있는 것도 모자라 휴가까지 따라왔잖아. 이 정도면 엄청 좋아하는 거 아냐? 설마 산오 형이 갈 데가 없는 건 아닐 거고. 쉬는 기간 동안 그냥 집에 있어도 되는데 굳이 여기까지 온 걸 보면…….”

혜강이 대단한 추리라도 하는 것처럼 심각하게 읊조렸다. 평화에 찌든 나머지 별소리를 다했다. 이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호텔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냥 좋은 곳 우리끼리만 가는 게 배 아팠나 보지.”

“그 정도로 치사한 성격이라고?”

“몰라, 쟤를 평범한 잣대로 판단하면 안 돼.”

외계인이라도 보는 것처럼 산오를 흘긴 이연이 마지막으로 혜강의 등을 두드렸다. 촉촉한 피부가 부딪히며 찹찹 하는 소리가 났다.

“자, 끝.”

“고마워.”

이연은 협탁에 놓인 산오의 선크림을 한번 노려본 다음 슬쩍 집어 들고 일어섰다. 반항하는 것처럼 터덜터덜 걸은 이연이 산오의 선 베드에 앉았다. 팔베개를 하고 가만히 누워 있는 산오는 알이 크고 짙게 선팅이 된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어떤 얼굴인지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워낙 덩치가 큰 인간이라 혜강이 누워 있을 때는 넉넉했던 자리가 산오의 옆에 앉을 때는 맨살이 닿을 정도로 좁았다. 타인의 살갗이 닿았는데도 산오는 미동조차 없었다. 뜨거운 햇빛을 받고 있는 피부는 따끈하게 데워져 있었다. 한여름에 난로라도 켠 듯한 감각이 낯설어 이연이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왜.”

산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새 잠들었나? 이연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산오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허리를 숙인 순간.

“악.”

별안간 당기는 힘에 이연이 그대로 미끄러졌다. 산오의 상체에 그대로 코를 박자 뺨 전체로 체온이 느껴졌다. 매끈한 피부에 이연이 흠칫하며 몸에 힘을 주는데, 커다란 손바닥이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움직이려고 할수록 가슴에 얼굴을 비비는 꼴이었다.

단단한 근육이 빈틈없이 자리 잡은 상체가 닿았다. 보기에는 막연히 딱딱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느리게 숨을 쉬는 흉곽과 맥동하는 심장이 움직이는 것까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밀착한 머리는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그런 감상이나 쏟아 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연은 눈만 빠르게 깜빡였다. 어정쩡하게 선 베드를 짚은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팡. 머리 위에서 뭔가 가벼운 것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죄송합니다.”

찰박거리는 물소리와 함께 다급한 사과 소리가 들렸다. 앳된 여자의 목소리였다.

“……야, 놀랐잖아.”

“공을 터트리는 것보다는 이쪽이 더 낫지 않나?”

그간 임시 동거인으로 지내 본 결과, 산오는 은근히 스킨십에 관대했다. 특히 이런 식으로 끌어안는 건 벌써 여러 번이나 당했다.

사실 스킨십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게, 애초에 큰 의미를 두고 하는 접촉이 아니었다. 친애적 의미라기보다는 그냥 위험할 때 잠깐 당기다가 접촉되는 식이라고 할까, 낭만이라기보다는 실용주의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오히려 이런 걸 신경 쓰는 쪽이 이상하긴 하다.

알고 있다. 알고 있다고.

산오가 이연의 머리를 누르고 있던 손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타닥, 하는 조그만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괜찮으세요?”

“아, 네…….”

이연이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가 죄송하다며 고개를 연신 꾸벅였다. 예쁘게 세팅된 긴 머리의 끝이 젖은 여자는 우아한 디자인의 래시가드를 입고 있었다. 물에 젖은 수영복이 건강한 몸 선을 드러내고 있었다.

공도 주웠고 사과도 건네 용건이 끝났는데도 여자는 바로 가지 않고 힐끔힐끔 산오를 훔쳐보았다.

“저……. 제가 너무 죄송해서 그런데, 혹시 음료수 뭐 좋아하세요?”

난처한 듯 부끄러운 듯 내뱉는 목소리는 복숭앗빛 뺨처럼 조금 달아올라 있었다.

아, 또다.

벌써 몇 번이고 본 풍경이었다. 혜강과 산오의 얼굴이 평균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데다가 휴가지라는 특수한 상황까지 더해져서, 동네에 있을 때보다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말을 거는 경우가 많아졌다. 상대는 다양했다. 여자, 남자, 어린아이에서부터 중년, 심지어 외국인까지.

물론 제산오가 상냥하게 대응해 줄 리가 없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얼굴은 선글라스로 가려져 어딜 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조금 기다리던 여자는 완전한 무시에 머쓱하게 이연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려 멀어졌다.

산오의 싸가지는 늘 감탄스럽긴 하지만, 크게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혜강 역시 새로운 사람을 사귀어서 노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알바를 하고 돌아온 이연이 처음 보는 얼굴을 만날 일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셋 중에 낯을 제일 가리지 않는 사람이 이연이다. 그는 처음 보는 사람과도 곧잘 즐겁게 대화했고, 멀리 갈 것도 없이 이 호텔도 재경과 어울리다가 나온 이야기가 아닌가. 헌팅으로 새 일행이 생겨도 이연은 무리 없이 섞여 들 자신이 있었다. 딱히 싫어하거나 불편한 것도 아니었고.

그런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건지 모르겠다.

전에는 제산오가 헌팅을 당하든 캐스팅을 당하든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럴 만한 상황도 아닌데 괜히 얄미워 보였다. 제산오는 아무것도 안 했잖아. 그렇게 되뇌도 요상한 서운함이 자꾸 몰려들었다.

‘나도 사실 인기 있고 싶었나?’

아니, 살면서 그런 생각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이연은 근본을 찾기 위해 심각하게 고민했으나, 이렇다 할 답안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정신 들었으면 선크림이나 발라.”

그렇게 말하는 산오는 여전히 정면으로 드러누운 자세였다. 빈공간 없이 들어찬 상체 근육들에 강한 음영이 져 있었다. 이연의 시선이 길을 잃고 우묵하게 파인 배꼽 부근 언저리만 맴돌았다. 한 박자를 쉬고 나온 대답은 반항적인 것치고는 힘이 빠져 있었다.

“앞판은 네가 바르면 되잖아.”

산오의 슬쩍 치켜올린 눈썹이 선글라스 바깥으로 삐져나왔다.

“나 말고.”

“…….”

“피부도 약해 빠져서.”

어찌나 못마땅한 어조인지 이연은 저도 모르게 제 팔을 들어 살펴보았다. 하얀 피부가 며칠 내내 강한 태양 빛을 그대로 받아 조금 붉어져 있긴 했지만, 까지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햇빛이 뺨과 뒷덜미에 들러붙었다. 땀이 나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와, 산오 형. 그런 말 하면 내가 뭐가 돼요?”

“알 바인가?”

뒤에서 혜강이 종알거리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두근, 두근. 심장 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울렸다. 이연은 이 소리가 혹시 산오에게 들릴까 싶어 노심초사했으나, 곧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게 됐다.

“이연 씨…….”

흉악한 기세의 재경이 그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진짜 사람 놀라게 하는 데에는 뭐가 있다. 이연이 가게 물품의 각을 맞추며 투덜거렸다.

갑자기 왜 사람을 신경 쓰고 난리란 말인가. 그런 식으로 선크림 적선해 주면 뭐, 내가 고…… 고맙기야 하지만.

‘피부도 약해 빠져서.’

그렇게 상냥한 목소리도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울렁거리는지 모르겠다. 사람은 아홉 번 잘못해도 한 번 잘해 주는 걸로 인상이 바뀐다더니……. 세상 착하게 살아 봐야 아무 의미 없다. 인생은 제산오처럼 살아야 해. 진리를 깨달은 이연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격한 움직임에 진열대에서 조그마한 상품 박스 몇 개가 떨어졌다. 되는 일이 없어. 이연이 허리를 숙여 주섬주섬 집어 드는데, 문에 달아 둔 방울이 울렸다. 손님이었다.

“어서 오세요.”

이연은 고개만 빼꼼 내밀어 인사했다. 재경은 어딜 간 건지 보이지가 않았다. 그는 이연이 놀러 다닐 때마다 귀신같이 달려와 잡아가는 주제에 정작 이연이 일을 성실하게 하고 있으면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덕분에 가게는 기묘하게 공평한 교대제가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호텔의 옆에 딸린 기념품 가게다 보니 무언가를 반드시 사러 온 손님보다는 단순히 구경하러 온 손님이 훨씬 많았다. 이번에 온 손님도 그런 부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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