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7. 밤하늘을 담은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
하늘이 쨍쨍했다. 화창한 햇살 아래에서 이연이 늘어져라 기지개를 켰다. 편한 복장으로 새하얀 선 베드에 누워 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좋다…….”
“좋긴 뭐가 좋아?”
퍽. 맹렬한 타박과 함께 짤랑거리는 선 캐처가 날아왔다.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크리스털이 온갖 빛으로 반사되며 이연의 몸에 맞고 떨어졌다. 손가락으로 선 캐처를 들어 올린 이연이 태평하게 고개를 젖혔다.
“뭐예요, 재경 씨. 폭력은 나쁜 거예요.”
“폭력? 진짜 폭력적인 게 뭔지 보고 싶어?”
거대한 야외 수영장 옆 입구, 긴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린 재경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표정이 사뭇 험악했다.
“아……. 왜요. 쟤네도 놀잖아요.”
뚱하게 볼을 부풀린 이연이 나머지 선 베드를 가리켰다. 맨 오른쪽 자리를 차지한 이연의 옆에 산오와 혜강, 심지어 뭉치까지 조로록 누워 있었다.
“쟤네는 그냥 온 거잖아. 댁은 아르바이트로 온 거고!”
“그래, 형. 기다려 줄 테니까 일해.”
선글라스를 끼고 일광욕을 즐기던 혜강이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어디서 모히또까지 주문해 와서 빨대를 꽂고 홀짝이는 폼이 본격적이었다.
“자. 일해, 이연 씨.”
재경이 엄격한 얼굴로 유니폼을 내밀었다. 붉은 이파리가 가득 그려져 있는 하와이안 셔츠였다.
계속되는 시선 압박에 이연이 죽상으로 꾸물꾸물 일어났다. 미적거리며 셔츠에 팔을 꿰자 벌써 수영장 출구에 선 재경이 빨리 입고 오라며 닦달했다. 이연의 낯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내 휴가…….’
이 기묘한 모임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는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
“단기 아르바이트요?”
이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앉은 침대 주변에는 재경의 변이종들이 모여 있었다.
그 후로도 간간이 재경과 연락하며 몇 번 집에 놀러 왔더니 낯익은 얼굴이라고 경계심을 푼 모양이었다.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며 기웃거리는 변이종들은 이연이 쓰다듬자 아예 근처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솜 인형들을 모아 둔 것 같았다.
이연과 변이종들이 앉은 침대 아래 맞은편,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는 사람이 내가 딱이라고 소개해 줬거든.”
“오, 잘됐네요.”
“같이 가 줘.”
“예?”
변이종 머리를 쓸어 주던 이연의 손이 뚝 멈췄다.
“재경 씨, 혹시 저희 사무소 의뢰 기본급 얼만지 아세요?”
되묻는 표정은 심각했다. 택도 없는 소리 말아라. 그런 기색이 명백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굴할 재경이 아니다. 그는 진상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 좀 멀어서 혼자 가기 싫단 말이야. 이연 씨가 사장이잖아. 며칠만 빼고 같이 알바해 주면 안 돼?”
그러니까 사장이 왜 알바를 하냐고. 근무 경력이라곤 불법 연구소가 다여서 그런지 사회성이 굉장했다.
“아니, 제가 왜…….”
“전에 약속했잖아.”
“언제요?”
‘힘내세요. 저도 도울 수 있는 건 도울게요.’
묻자마자 머릿속에 예전에 아무 생각 없이 날렸던 공수표가 시의적절하게 떠올랐다. 당황한 이연이 순간적으로 입을 다무는 것을 놓치지 않은 재경이 승기를 잡은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떠들었다.
“한 입으로 두말할 거야? 그간 알고 지낸 정이 있는데!”
불법으로 얽힌 사이에 정은 무슨…….
“재미있을 거야. 어디서 하는지 알아?”
이연의 반응이 신통찮자, 재경은 영악하게 방법을 바꿨다.
“창주 호수 알지? 경치 엄청 예쁜 곳.”
창주 호수는 초호시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하나였다. 거대한 호수와 울창한 산림, 두 자연 정경을 잇는 계곡마저도 한 폭의 그림 같아서, 국내에서도 인기 좋은 휴가 명소기도 했다.
“우리가 알바하는 곳은 호수랑 숲 둘 다 즐길 수 있는 호텔이야. 날이 좀 따뜻해지긴 했어도 성수기 직전이라 사람도 좀 덜할 거고. 이른 휴가 보내는 셈 치고 놀러 간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휴가요?”
미심쩍은 대답에 재경이 듬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휴가. 점장이 숙식까지 챙겨 준다고 했어! 하루에 몇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는 호텔에서 쉬면 되잖아. 거기 스파도 있는 거 알아? 인피니티 풀이랑, 사우나랑……. 숲 근처 산책로도 엄청 예쁘대.”
스파, 인피니티 풀, 사우나, 산책로. 재경이 설명을 할 때마다 이연의 머릿속에 비눗방울 같은 기대가 퐁퐁 피어올랐다.
그래, 요즘 무리를 하긴 했다. 제산오한테 위협도 받았고, 청호도 상대했고, 연기여우 공격도 받았고, 의뢰하다가 칼도 맞고, 초전력에, 사기꾼까지 잡았잖아. 분기 임무 마감은 거의 했고, 급한 의뢰도 없고……. 기분 전환할 겸 휴식을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연은 올해는 물론이고 차금을 운영하는 내내 휴가를 거의 쓰지 않았다. 써도 집에 그냥 누워 있기만 하니, 사무실에 누워 있는 것과 별다를 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왜 어딜 놀러 가 볼 생각을 안 했지? 그제야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재경은 이연의 마음이 거의 기울어졌다는 사실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악마처럼 달콤한 속삭임이 슬슬 얼렀다.
“호수에 해 뜨는 거 보면서 일어나고, 일몰 보면서 술 마시고. 거기 개발도 별로 안 돼서 밤하늘에 별 얼마나 기가 막힌지 못 봤지? 호텔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불꽃놀이도 해 줘. 엄청 예쁠걸.”
결정타는 순조롭게 먹혀들었다. 이연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 휴가 쓰려고.”
“엥? 웬 휴가?”
혜강이 의아하다는 듯 이연을 바라보았다. 휴가라고 해 봤자 병가 정도나 쓰던 인간이 혜강이 출근하자마자 부리나케 책상 앞으로 와 비장하게 선언하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산오 역시 처음 듣는다는 얼굴로 혜강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뜸 혼자 휴가를 쓴다고? 의혹이 증폭되었다.
“호텔 갈 거야.”
“어디 호텔?”
이연은 재경이 가열차게 세뇌한 호텔의 부대 시설과 서비스, 풍경에 대해서 줄줄 읊었다. 혜강은 그 설명을 들으며 호텔을 검색한 후에 이연이 말한 정보가 사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얼마나?”
“일주일.”
잠시 생각하던 혜강이 산뜻하게 대답했다.
“나도 갈래.”
“뭐?”
“왜? 싫어?”
“아니, 너 어디 다니는 거 안 좋아하지 않아?”
혜강의 모든 취미는 사이버 세계에 있었으므로, 그는 평소에도 밖에 거의 나가지 않았다. 돌아다니거나 사람 만나는 걸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린 듯한 내향성 인간의 표본이었다.
“쉬러 가는 거 아냐? 근처에 아무것도 없던데.”
“뭐, 그거야…….”
내내 재경과 알바를 해야 하니 오래 나가 있기도 어려울 것이다. 혜강의 말마따나 음식점 외에는 근처에 뭐가 없기도 하고…….
그래도 휴가인데 직장 동료랑 같이 다녀도…… 괜찮은 건가? 이연이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난감하게 고개만 기울이자, 혜강이 모니터 화면으로 고개를 돌리며 새침하게 중얼거렸다.
“파티 갈 때 끼워 주지도 않고.”
“…….”
“나도 예쁜 옷 차려입고 맛있는 거 먹을 줄 아는데.”
여기서 그 얘기를 꺼내다니. 당시에는 괜찮다며 넘겼지만 아닌 척해도 꽤 궁금했던 것 같았다.
“아니, 그건 놀러 간 게 아니고 수아 씨랑 협력해서 팔찌 장사꾼을…….”
“가서 아무것도 안 먹었어?”
엄청 먹었다.
“동반 입장 할 사람 없어서 같이 가지도 못한다 그러고. 티 나니까 통신도 못 한다 그러고.”
“……그…….”
“나도 팔찌에 대해서 열심히 조사했는데, 중간부터는 끼워 주지도 않고.”
시무룩하게 시선을 내리깐 혜강이 입을 삐죽였다.
“휴가도 같이 안 가려고 하고.”
“…….”
“나 계속 왕따시키네.”
처음부터 이연이 혜강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잠시 후, 혜강은 신난 얼굴로 호텔을 예약했다.
대망의 휴가 시작일, 캐리어를 끌고 방을 나서는 이연의 뒤로 자연스럽게 산오가 따라붙었다.
“넌 어디 가는데?”
“휴가.”
직원이라곤 고작 세 명 있는 사업장에서 두 명이 쉬는 덕에 강제 휴가를 받게 된 말단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 뒤로는 뭉치가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었다.
“……어디로?”
이연 본인도 휴가 가는 판에 산오가 휴가를 가는 거야 타박할 일도 아니었지만, 꼬락서니가 묘하게 불길했다. 이연의 흔들리는 시선을 받은 산오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호텔로 가려고.”
어쩐지 내내 조용하다 했다. 일행은 둘에서 넷으로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