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느긋하게 상황을 살피던 검은 눈이 순식간에 확 타올랐다.
“뭐?”
“저희가 방금 전에 보고 왔거든요. 만약 당신이 지금 도망친다면 영원히 못 볼 수도 있으니까 잘 생각하고 행동하세요.”
악당보다 더 악당 같은 협박이었다.
“걔는…… 걔는 아무것도 안 했어!”
순식간에 높아진 목소리에도 이연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가끔은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이 다칠 때도 있더라고요. 세상이 참 불공평해요.”
“…….”
“그래도 지금은 운이 좋아요. 그러지 않도록 당신이 협조하면 될 일이잖아요. 그렇죠?”
말투가 태연해서 더 위협적으로 들렸다.
장사꾼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연을 보는 눈은 적의로 가득했지만, 조금 전보다는 기세가 한풀 꺾였다.
“이름이 뭐예요? 세은 씨랑은 무슨 관계죠?”
“……이세미. 이세은은 내 쌍둥이 동생이야.”
그렇게 대답한 세미는 혹시나 제 동생이 연좌제로 잡혀가기라도 할까 급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이 일이랑 걔는 상관없어! 그냥 나는 걔 이름이랑 얼굴만 빌려서 들어왔을 뿐이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죠?”
“그건…….”
세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이렇다 할 만한 논리 없이 진짜야, 걔는 이런 거 잘 몰라, 따위의 말들만 반복했다. 그 모습을 보며 턱을 쓰다듬은 이연은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넘어가 주기로 했다.
“팔찌는 누가 만들었고요?”
“……내가.”
“모르포가 만든 거라고 거짓말은 왜 했어요?”
“……그건, 그래야 잘 팔리니까…….”
그 외에 이연은 몇 가지를 더 물었지만, 딱히 특이할 것도 의외일 것도 없었다. 세미는 팔찌 제작자이자 장사꾼인 게 확실했고, 본인 역시 부정하지 않았다.
그사이 D.S는 조금 진정했고, 휘청이긴 했지만 제 발로 설 수 있었다. 이런저런 조사를 끝낸 이연이 D.S와 산오를 둘러보며 물었다.
“수아 씨 불러올까요?”
그녀 역시 이 맹랑한 장사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이다. 그 말에 D.S가 화장실을 나섰다.
그러나 몇 발자국 가기도 전에, 그녀는 누군가와 부딪쳤다.
“덕선 누나. ……누나? 꼴이 왜…….”
비틀거리는 그녀의 팔을 잡은 것은 희수였다. 아니, 국장님이 왜 여길……. 이연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하자, 등 뒤에서 수아가 난처한 얼굴을 내밀며 웃었다.
“미안해요. 더 이상 잡기가 힘들어서…….”
그와 동시에 D.S가 희수의 팔을 쳐 냈다. 희수는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이었지만, 경계하는 기색이 너무 강해 머뭇거리기만 할 뿐 그녀에게 다가서지 못했다. 몇 발자국 물러서는 D.S를 수아가 진정시키듯 다가갔고, 이연이 열린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니, 국장님. 지금 여자 화장실에 들어오시려고 한 거예요?”
“정이연 씨는 모르는 사이에 성전환 수술이라도 받았답니까?”
무시무시한 기세에 이연이 찔끔 쪼그라들었다.
“왜 화를 내세요…….”
“조금 전 폭발은 뭡니까?”
질문이 취조라도 하는 것처럼 사나웠다. D.S에게는 괜찮냐는 말도 못 하면서 이연만 쥐잡듯이 잡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았다. 이연은 그의 뒤에 있는 D.S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줄까 말까 고민했으나 도의상 참았다.
뭐, 잘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희수도 상황을 알아야겠지. 이연이 한 발 물러서자 희수가 기다렸다는 듯 들어왔다.
“이게 무슨…….”
아연한 눈이 화장실 내부를 훑었다. 난장판이 된 바닥과, 수많은 팔찌들, 엉망이 된 세미의 모습까지.
“……세미? 네가 왜 여기 있어?”
바로 알아보네. 쌍둥이 모두와 친분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
그러나 세미는 희수의 시선을 피했다. 꾹 다문 입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설명한 것은 이연이었다.
“초능력 팔찌라고 아세요?”
“그게 뭡니까?”
“착용자 기력을 강제 갈취해서 초능력을 쓰게 하는 불법 물품인데, 의뢰를 받아서 조사하다가 적발했어요. 이세미 씨가 제작자이자 판매자입니다.”
“……예?”
“그런데 영 이상해서요.”
이연이 가볍게 웃었다.
“이세미 씨의 쌍둥이 동생인 이세은 씨의 파트너가 국장님인 게 우연인가요?”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희수가 내뱉은 말은 고작 한마디였다.
“……몰랐습니다.”
“그러시겠죠.”
이연이 다시 웃었다.
“그러니까 국장님이 책임지세요. 적법한 조사를 받고, 적법한 처벌을 받게.”
이세미 씨의 주장에 따르면 이세은 씨는 관련이 없다고 하네요, 하고 이연이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희수는 혼란에 가득 찬 눈으로 세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으나, 세미는 끝까지 그를 보지 않았다.
“수아 씨, 이 정도로 괜찮겠어요?”
그 말에 D.S의 곁에 있던 수아가 다가왔다. 세미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다양한 감정으로 얼룩졌다. 분노, 슬픔, 경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세미를 보고 웃었다. 화를 내지도, 주먹을 들어 때리지도 않고, 온화하고 부드럽고, 단단하게.
“당신 때문에 제 동생은 몇 주째 잠들어 있어요.”
“…….”
“나쁜 일이잖아요. 반성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 말에 세미가 시선을 들어 수아를 바라보았다. 수아는 눈을 피하지 않았고, 세미는 이내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어딘가에 연락한 희수가 세미에게 다가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 호텔에 더 이상 볼일은 없었다. 세은이야 뭐, 지나가다 본 누군가가 풀어 주겠지……. 고급 호텔이니 불이 꺼지거나 사람이 없을 일도 없을뿐더러, 이연은 세미의 주장대로 세은이 완전히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단 그녀도 팔찌를 차고 있지 않았는가. 그 정도 고생은 가벼웠다.
D.S의 응급 처치 후, 네 사람은 건물을 나와 밤거리를 걸었다.—부상자가 있으니 바로 택시를 탈 것을 권했지만, D.S는 고개를 저으며 잠깐 걷고 싶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동네 주민들이다 보니 가는 길이 같았다.
“국장님이 제대로 처리하겠죠?”
“그놈이 크게 영악한 성격은 아니야.”
조용히 걷던 D.S가 중얼거렸다. 사촌이 하는 말이니 믿어 볼 만했다. 그간 이연이 봤던 희수의 모습을 미루어 짐작하기에도 불법을 저지른 세미를 쉽사리 넘어가 줄 것 같지는 않았고.
“다들 고생하셨어요.”
이연이 모두를 둘러보며 인사했다.
“이연 씨랑 산오 씨도요. 덕선 언니도……. 모두 제 고집이었는데.”
수아가 머쓱하게 웃었다. 이연이 농담처럼 말했다.
“저는 사실 사장님이 한 대 정도는 칠 줄 알았어요.”
“아이참, 그런 건 게임에서 끝내야죠.”
그녀는 가볍게 대답했지만, 제 가족을 해한 사람을 앞에 두고 흥분하지 않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나머지는 법이 해야 할 일이에요.”
세미를 앞에 둔 찰나 동안 수아가 많은 고민을 했으리라는 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됐고, 이 일로 우리 미래한테 영향 가면 너네도 가만두지 않을 거야. 병원 진단 받은 것도 전부 청구할 줄 알아.”
D.S가 무뚝뚝하게 뱉은 말에 수아가 미안하다며 두 손을 모아 비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보던 이연이 불쑥 입을 열었다.
“D.S 씨는 좋은 사람이에요.”
“갑자기 뭔 개소리야?”
돈 뜯어내고 있는데 아첨하지 말라며 D.S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연은 굴하지 않았다.
“국장님이랑 미래가 D.S 씨를 왜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아요.”
“…….”
“저도 D.S 씨 같은 사람 좋아해요.”
작게 웃는 얼굴이 달빛을 받아 빛났다. 아, 물론 친구로서요. 뒤늦게 덧붙인 말에 D.S가 한 박자 늦게 질색을 했다.
“어머, 저도 덕선 언니 좋아해요.”
수아가 질세라 D.S의 팔짱을 꼈다. 달밤에 난데없이 벌어진 고백 파티는 한동안 내내 계속되었다. D.S는 그만두라는 말을 연신 내뱉었지만, 팔을 내치지는 않았다.
“…….”
한창 D.S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세뇌하듯 조잘대던 수아와 이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산오에게 흘렀다. 빤한 눈빛에 내내 앞만 보고 걷던 산오가 눈알만 돌려 두 사람을 마주 바라보았다.
“어림없어.”
역시 제산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소리가 터졌다.
*
그로부터 열흘 후, 수아에게 연락이 왔다. 수빈이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이었다.
수아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 울었고, 차금은 병문안을 갔다. 수빈은 걱정을 끼쳐서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이렇게 다시 만나서 반갑다며 쾌활하게 웃었다. 수아가 뒤늦게 D.S에게서 온 메시지를 보여 주었다.
덕선 언니별 문제 없을 거라고 했잖아
너무나 그녀다운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