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D.S가 멈칫한 순간, 세은의 신형이 사라졌다. 목표물이 사라진 밧줄이 바닥에 힘없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화장실에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비초능력자가 건방지게…….”
등 뒤였다.
쾅!
D.S가 본능적으로 몸을 굴리자마자 그녀가 있던 바닥에 세은의 발이 내리쳤다. 타일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깊게 패었다. 아마도 근력 강화의 일종. 팔찌를 꺼내 과시하던 초능력과는 전혀 다른 계열의 능력이다.
원래 초능력이 있는 거라면 팔찌 능력과 합쳐서 능력이 두 개라는 이야기였다. 정면으로 상대하는 건 위험했다. D.S가 혀를 차며 핸드백 안에서 휴대폰 대신 동그란 구슬을 쥐어 던졌다. 요즘 공방 근처가 어수선해서 호신용품을 몇 가지 만들어 둔 게 이런 데에서 도움이 됐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깨진 구슬 속에서 연기가 새어 나왔다.
순식간에 무럭무럭 피어 나온 새하얀 안개가 화장실 안을 채웠다. 꽤 넓은 공간에 자욱하게 깔린 안개는 D.S는 물론 세은의 시야까지 완전히 가렸다.
“이런다고 크게 달라지는 게 있을까?”
어디선가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해 주면 좋지. D.S가 속으로 감사를 표하며 신발을 벗고 목소리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머리가 있다면 당연한 행동이겠지만, 세은은 출구 쪽을 막고 선 듯했다. 안개는 시야만 막아 줄 뿐 청각까지 차단하지는 못했다. 전화를 하면 즉시 있는 곳이 들킬 것이다.
이 좁은 화장실 안에서는 승산이 없으니 밖으로 나가야 했다. 하여튼 정이연이랑 한수아 때문에 별 고생을 다 하는군. 나가면 단단히 생색낼 계획을 세우며 D.S가 조심스레 세면대 아래로 숨어들었다.
세은이 어느 정도의 초능력자인지 모르는 이상, 최대한 부상 없이 탈출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밖에는 이연과 산오도 아직 있을 테고, 내키지는 않지만 희수 역시 있을 터였다.
‘해 보자.’
심호흡을 한 D.S가 핸드백에서 두꺼운 반지를 찾아 꼈다. 근접 공간에서 기력이 감지되면 약한 진동이 울리는 반지였다. 이어서 동그란 칩 같은 기계를 꺼낸 D.S가 옆에 붙은 버튼 몇 개를 누른 후 벽에 붙였다.
탁. 탁. 탁. 순식간에 칩 몇 개가 더 붙었다. 그녀는 곧 세면대 아래 끝에서 끝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칩을 전부 붙이는 데에 성공했다. 세면대 구석에 앉은 D.S가 손목시계를 조작했다. 동그란 전자 화면에 점이 두 개 보였다.
세은이 바닥에 발을 붙이고 걷는 이상, 칩으로 만들어진 바닥의 탐색망은 자욱한 안개 속에서도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려 줄 것이다.
“이게 뭐야? 별 같잖은 재주를…….”
아직 어린데 말하는 싸가지가 대단하군. D.S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슬아슬하게 움직이면 세은을 피해 화장실을 나갈 수 있었다. CCTV가 없는 이곳만 나가면 난동은 금세 경비원들이 포착할 것이고, 그럼 D.S의 승리였다. D.S가 조심스레 세면대 아래에서 나왔다. 안개에 가려 세은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손목시계상으로는 D.S와 불과 두 발자국 떨어져 있었다.
느리게 숨을 들이마신 D.S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압박해 오는 침묵 속에서, D.S는 세은이 있는 방향을 살피는 시선을 거두지 않으며 조금씩 전진했다. 절로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잘못하면 세은과 닿을 것 같아, 벽에 등을 바짝 붙였다. 타일의 냉기가 늘어트린 머리카락을 넘어 드러난 목덜미까지 느껴졌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에는 딱 좋았다.
“시간 싸움 해 봤자 누가 이길 거라고 생각해?”
바로 옆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D.S가 동작을 그대로 정지했다. 몇 초간 그녀의 눈치를 살폈으나, 세은은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말만 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귀로 D.S의 위치를 파악할 심산인 듯했다.
그녀가 자신의 위치를 모른다는 것을 확신한 D.S는 다시 움직였다.
움직이는 동안 몇십 년은 흐른 것 같았다. 다행히 세은의 위치는 거의 다 지났다. 바로 앞이 문이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D.S가 인상을 찌푸리고 머리까지 벽에 완전히 밀착했을 때였다.
팅.
낭랑한 소리가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소리의 정체를 눈치챈 D.S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귀에서 화려하게 달랑거리는 묵직한 장신구.
D.S의 귀걸이가 낸 소음이었다.
“찾았다.”
섬뜩하게 웃은 세은이 고개를 돌렸다. 아무렇게나 휘두른 세은의 팔에 D.S가 닿은 순간, D.S는 앞뒤 볼 것 없이 문으로 달렸다.
“어딜.”
그녀가 문손잡이에 손을 대기 직전, 문 바로 앞으로 순간 이동한 세은이 D.S를 밀쳐 넘어트렸다. 순식간에 안쪽으로 밀려난 D.S가 힘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졌다. 손에서 놓쳐 버린 힐은 어디론가 굴러 들어갔고, 넘어지면서 쓸렸는지 무릎이 화끈거렸다. 아, 젠장……. D.S가 바닥에 손을 짚었다. 폭력적인 상황에 다리 힘이 풀렸는지 빠르게 일어서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둘의 거리가 벌어진 덕에 안개가 다시 시야를 가렸다.
“아……. 괜히 밀쳤네.”
세은의 짜증스러운 한숨과 함께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D.S는 금세 어떤 상황인지 눈치챘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수많은 팔찌들.
팔찌 중에 안개를 몰아낼 만한 종류의 초능력이 있다면 골치 아프다. D.S가 막 다른 기계를 꺼내기 위해 핸드백에 손을 넣었을 때였다.
“그…… 혹시 거기서 누가 싸우고 계신가요?”
떨떠름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화장실 출입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맹하고 느긋한 말투. 정이연이었다.
목소리를 내면 단번에 그녀가 있는 장소를 들키겠지만, 뭘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D.S가 힘껏 소리쳤다.
“정이연! 들어와!”
D.S의 목소리를 들은 세은의 걸음이 빠르게 가까워지는 것이 들렸다. 세은의 위치를 확인한 D.S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쾅. 바로 옆에 있던 벽의 타일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저리 튄 파편 중 일부가 D.S의 몸을 때리고 떨어졌다.
“……D.S 씨? 가신 거 아니었어요?”
“닥치고 빨리 들어오지 못해?”
D.S의 신경질에 끼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새로운 공기가 들어오자 좁은 공간을 자욱하게 메운 연기는 금세 옅어졌다. 세은이 시야를 회복하기 전에, D.S가 잽싸게 발을 놀려 거리를 더 벌렸다. 다행히 그녀가 D.S를 쫓으러 안쪽으로 들어온 덕에 출구 쪽으로 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악……. 야, 아프잖아.”
문 바깥으로 하얀 연기가 쏟아지는 걸 눈치채기도 전에 산오의 품에 처박혀 코트로 가려진 이연이 투덜댔다. 사람 몸에 좀 갖다 박혔다고 왜 이렇게 아픈 건지 모르겠다. 코가 다 얼얼했다. 따뜻한 온기에 심장 박동이 오른 건 그다음이었다.
말랑한 마음도 잠시, 연기가 신체에 별다른 이상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산오가 이연을 내팽개치듯 떨어트렸다. 그제야 이연은 조금 달아오른 뺨을 문지르며 화장실 내부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D.S 씨!”
이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지막에 봤을 때와 전혀 다른 차림새였다. 머리는 잔뜩 헝클어졌고 옷의 일부는 찢기기까지 한 것 같았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무릎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괜찮아요? 걸을 수 있어요?”
“괜찮아. 다리 힘만 좀 풀린 거야.”
“이건 또 뭔…….”
이연이 D.S에게 다가가자, 안쪽에서 강하게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짧은 파공음이 들렸다. 어느 모로 보나 그들을 환영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는 많이 옅어져 간신히 인영이 보일락 말락 한 안개 너머로 상대 위치를 가늠했다. 마침 모두의 시야가 딱 가려진 상황이다.
이연은 능력을 사용했다.
공격자의 발목을 하얀 족쇄가 감쌌다. 갑작스레 두 발을 구속한 강한 힘에 공격자는 반동을 받고 그대로 쓰러졌다. 우당탕하는 소리를 향해 이연이 다가갔다.
“악!”
“대체 누구시길래 사람을 이렇게…… 세은 씨?”
이연이 바닥에 쓰러져 그를 노려보고 있는 여자를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았다. 불과 일 분 전에도 마주했던 얼굴이 있었다.
아니, 세은 씨는 내가 수갑으로 묶어 놓고 왔는데……. 이연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지저분해지긴 했지만 의상도 머리도 조금 전에 봤던 세은과 똑같았다. 그새 빠져나왔나? 하지만 폭발음은 같이 있을 때 들렸는데…….
“눈이 삐었나?”
혼란을 잠재운 것은 산오의 목소리였다.
“이세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야.”
그제야 이연은 D.S와 그를 노려보는 세은의 얼굴이 미묘하게 더 날카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닥에 널려 있는 팔찌들을 보아하니 이쪽이 진짜 장사꾼인 모양이다. 세은 씨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거지? 단순 변장? 아니면…….
“진짜 별…….”
혀를 찬 장사꾼이 손을 뻗었다. D.S가 재빨리 소리쳤다.
“근력 강화 아니면 순간 이동!”
이연의 뒤에 있던 산오가 눈을 깜빡이자, 바닥에서 뻗어 나온 철사가 장사꾼의 손목을 감았다. 순식간에 팔찌를 벗겨 낸 철사는 장사꾼을 옥죄었지만, 그녀는 금세 바로 옆으로 이동해 산오의 능력을 벗어났다.
“이런 걸로는 잡기 힘들지.”
빈정거리는 얼굴을 보니 확실히 세은과는 달랐다.
순간 이동 능력자에게는 물리적인 구속이 거의 쓸모없다고 보면 됐다. 범죄자들 중에서도 가장 잡기 힘든 초능력자가 순간 이동 능력이다. 잡아 봤자 방금 했던 것처럼 다른 곳으로 순간 이동 하면 되니까.
물론 사람을 잡아 두는 데에는 물리적인 방법만 있는 건 아니다.
이연이 으음, 하고 손에 쥔 것을 들어 보였다. 그게 누구의 팔찌인지는 장사꾼이 더 잘 알 터였다.
“세은 씨는 어떻게 됐는지 안 물어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