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쏴아아…….
세면대를 쓸고 내려가는 물줄기 소리가 경쾌했다. 손을 조물거려 비누 거품을 낸 D.S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설마 오겠어 하긴 했어도…….’
막상 마주하니 다른 걸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도망치고 있었다.
희수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도, D.S는 어느 순간부터 그를 오래 쳐다보는 게 힘들었다. 그게 부끄러움인지, 고마움인지, 미안함인지, 또 다른 무언가인지는 그녀 자신도 몰랐다.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섞였고, 이제 와서 구분 지을 정도로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지금도 별로 각오가 서지 않았다. 여전히 희수와 가족들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면 평생 모른 척 살아가고 싶었다. 이연도 수아도 D.S의 마음을 존중했다. 정말로 돌아가 버린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녀를 탓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뭐,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부딪치는 것도 아니고…….’
결국 그녀가 향한 곳은 고작 홀에서 멀리 떨어진 화장실이었다.
“…….”
죄책감 같은 건 없었다. 책임감도 없었다.
이건 그냥 단순한 변덕이었다.
이딴 생각이나 하느라 화장실에서 머무른 시간이 어마어마했다. 미리 집에 간다고 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그녀가 똥이라도 지리는 줄 알 것이다. 손을 헹군 D.S는 기계적으로 수도꼭지를 내리고 티슈를 뽑아 물이 뚝뚝 흐르는 손을 닦으며 멍하니 생각했다.
‘이제 어쩐다.’
이 건물에서 그녀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세은을 찾아서 팔찌 장사꾼을 연결해 달라고 하거나, 팔찌 장사꾼이 D.S를 먼저 찾아오기를 기다리거나.
둘 중 하나를 해야 한다면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후자보다는 그나마 할 거리가 있는 전자가 나을 것이다. 세은을 찾다가 팔찌 장사꾼이 접근하면 금상첨화고.
그러나 홀 안에는 진희수가 있고, 그와 세은이 파트너라면 세은에게 접근하는 D.S를 의아하게 여길 것이 뻔했다. 심지어 그녀의 표면적인 목적을 알게 된다면.
“…….”
D.S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초능력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단 한 번도 부끄러웠던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술적 능력에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위장이라고는 해도, 혐오하는 집안에 비굴하게 보일 만한 여지를 남기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웠다.
홀 안이 아니라 홀 밖에서 세은을 만나야 했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아줌마가 진덕선 씨예요?”
별안간 낭랑한 목소리가 화장실에 울려 퍼졌다. D.S가 의아하게 고개를 틀었다.
입구에 선 한 여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짧은 곱슬머리와 치맛단이 풍성하게 퍼진 미니 드레스를 입은 귀여운 아가씨였다.
“너는…….”
“안녕하세요, 이세은이에요.”
그녀는 한순간이나마 이연과 함께 있던 세은을 본 적이 있었다. 같은 생김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분명히 본 적 있는 의상의 낯익은 이목구비가 살갑게 휘어진 채로 D.S를 보고 있었다.
“진덕선이야.”
“이렇게 뵙는 건 처음이네요. 그렇죠?”
세은이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부드러운 손을 마주 잡아 흔들며 D.S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흘러내린 소매 안쪽에 익숙한 팔찌가 보였다.
“나를 알아?”
“파티에 다니다 보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게 되잖아요.”
“…….”
“보면 사람들이 참 입이 가벼워요.”
세은은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목소리에는 큰 진심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타인의 말에 시달려 온 D.S는 그 사실을 기민하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럼 내가 뭘 아는지도 알겠군.”
뭐, 중요한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저쪽도 할 말이 있어 접근한 것이다. 진심 어린 위로는 오히려 기분을 더 나쁘게 할 뿐이었다. 홀 근처 화장실도 아니고, 굳이 외진 화장실에 있는 그녀를 찾아올 정도로 특징적인 용건을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팔찌에 대해 말해 주러 온 건가?”
세은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눈동자가 짐짓 흥미롭다는 듯 구르고 있었다. 의미심장한 척 애를 태우는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면 그녀의 진의를 의심하고 있거나.
그러나 D.S는 어영부영 말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일종의 캐릭터를 설정했다. 초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열등감을 가진 진덕선. 초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는 진덕선. 절박한 나머지 두문불출까지 깨며 달려들어 온 진덕선.
초능력을 간절히 원하는 진덕선.
“뭐든 좋아. 그 빌어먹을 능력을 쓸 수만 있다면.”
D.S가 짓씹듯 중얼거렸다. 절박한 연기는 쉬웠다. 그녀는 미친 본가에 있던 매 순간이 절박했으니까.
“네가 팔찌를 파는 사람인지 중개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물건이 내 손에 들어오기만 한다면 사례는 얼마든지 하겠어.”
“오…….”
“그 인간들의 입을 다물 수만 있게 하면 돼.”
결연한 어조와 굳은 눈동자가 자신보다 한참 어린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팽팽한 분위기가 흘렀다. D.S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그런데 세은은 무언가를 재는 사람처럼 눈동자만 도록도록 굴리다, 대뜸 물었다.
“어떤 걸 원하는데요?”
“뭐?”
힘이 탁 풀렸다. D.S가 짜증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팔찌 말이야.”
“아니, 그러니까.”
세은이 손을 가볍게 휘두르자, 허공에서 팔찌가 하나씩 나타났다. D.S의 눈이 점점 커졌다. 하나, 둘, 셋……. 동동 떠 있는 팔찌의 수는 곧 열 손가락으로 세지도 못할 만큼 많아졌다.
“원래는 이 정도로 선택지를 주지는 않는데, 저는 진덕선 씨 같은 눈빛을 좋아하거든요.”
팔찌의 보석들이 하늘에 박힌 별처럼 반짝였다. 세은은 마치 자비라도 베푸는 성인처럼 온화하게 웃었다.
“이 중에 어떤 게 좋아요?”
또라이 같은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세은의 눈은 천진난만하기 그지없었다. 위화감에 소름이 돋은 D.S가 떨리는 손을 숨기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힘이 들어간 뼈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이게 다…….”
“각각 다른 초능력이 담겼으니까, 원하는 걸로 골라잡으면 돼요.”
D.S는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근력 강화 같은 것도 있어?”
“아, 그건 얼마 전에 누가 사 가서.”
심드렁하게 말한 세은이 이내 가볍게 웃었다. 죄책감이라곤 하나도 없는 얼굴이었다.
“그런 시시한 것보단 좀 더 화려한 게 좋지 않아요?”
“그런가…….”
홀린 듯 천천히 팔찌들을 훑은 D.S가 이내 움직임을 뚝 멈췄다. 일순간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며 드러난 것은 사나운 웃음이었다.
“네가 수빈이한테 팔았구나.”
동시에 손을 뻗은 그녀의 반지에서 밧줄이 뿜어져 나왔다.
순식간에 튀어나온 검은 줄은 막을 새도 없이 세은의 허리에 달라붙었다. 밧줄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세은의 두 손까지 찾아내 강제로 몸통과 엮었다.
팔찌들이 떨어지며 바닥에 마찰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세은의 움직임이 제한되었다. 꽁꽁 묶인 몸을 뒤늦게 움찔대며 이리저리 비틀었지만 소용없는 저항이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어린 녀석이 이런 위험한 걸 팔고 다니면 어떡해?”
가볍게 타박한 D.S가 꼼짝없이 묶인 세은에게 다가섰다. 세은은 당황한 듯 팔을 휘두르려고 했으나, 밧줄은 점점 조여들기만 할 뿐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꼬마야, 아직 경험이 부족한 것 같으니까 충고 하나 해 줄게.”
몇 년 동안 사람들에게 장비를 판 엔지니어로서, 개인 공방이 있는 선배 사업자로서. D.S가 삐딱하게 팔짱을 꼈다. 이연이 봤다면 기겁을 하며 재수 없다고 소리쳤을 웃음이 입꼬리에 조롱조롱 매달려 있었다.
“감정에 휘둘려서 장사하는 거 아니야.”
세은이 얼굴을 구기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밧줄에 걸려 예쁜 새 옷이 잔뜩 구겨진 것이 보였다. 지저분한 화장실에서 수모를 겪는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히 나를 이렇게. 감히.
후회하게 될 거야.
증오를 담은 눈동자는 곧 비웃는 것처럼 휘어졌다.
“하하!”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팽팽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깨졌다.
상황에 맞지 않는 커다란 웃음은 마치 쇼맨십이라도 발휘하는 것 같았다. 미쳤나? 휴대폰을 찾아 핸드백을 뒤적이던 D.S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언제 당황하며 몸부림을 쳤냐는 듯 세은이 그녀를 똑바로 노려보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왜 내가 초능력자가 아니라고 생각해?”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