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수아가 알려 준 장소는 도심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호텔 홀이었다. 다행히 타이밍이 맞았는지 네 사람은 입구에서 바로 만나 들어갈 수 있었다.
수아야 평소에도 잘 꾸미고 다니는 편이니 탁월하게 차려입은 모습이 놀랍지는 않았지만, D.S가 항상 부스스하던 머리를 단정히 빗어 늘어트리고 늘씬한 태의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니 영 낯설었다. 새하얗고 부드러워 보이는 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연은 뚱한 얼굴로 시선을 돌린 D.S와 눈이 마주쳤다.
“뭘 봐.”
“아뇨, 뭐……. 이렇게 보니까 국장님이랑 좀 닮으신 것 같기도 하네요.”
“둘 다 친탁이야.”
이 집은 할머니 유전자가 너무 세. 작게 투덜거리는 D.S는 굳은 얼굴에 까칠한 말투였지만 행동만큼은 제법 협조적이었다. 이연과 D.S가 대화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같이 서게 된 수아와 산오가 먼저 입장하고, 뒤이어 두 사람이 마저 입장했다.
파티는 어마어마하게 규모가 컸다. 높은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샹들리에가 쉴 새 없이 반짝거리고, 샴페인 타워와 각종 핑거 푸드가 홀의 곳곳에 준비되어 있었다. 연회장에 으레 구비되어 있기 마련인 테이블과 의자는 모조리 없애고 가장자리에 우아한 모양의 벨벳 벤치를 대신 놓았다. 넓은 홀에는 선 채로 몸을 가볍게 기댈 만한 높고 작은 테이블이 넓은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어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마치 외국식 파티 같은 풍경이었다.
안에 들어찬 사람들 역시 온갖 천과 보석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이연은 사실 종찬과 종희가 골라 준 옷을 입으며 저희가 너무 튀면 어떡하지 고민했는데,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이 공작새들의 모임에서 이 정도 소박함으로 감히 눈에 띄는 건 불가능했다.
분위기에서부터 풍기는 으리으리한 기운에 살짝 압도된 이연이 수아에게 물었다.
“여기 대체 무슨 파티예요?”
“친구가 세운 의류 회사 론칭 파티예요. 보다시피 규모가 엄청 커서 이연 씨가 누군지 붙잡고 따져 물을 사람은 없을 거예요.”
“어떻게 딱 타이밍이 잘 맞네요. 오늘이 파티라니.”
“파티가 열리지 않는 날은 없어요. 매일매일 다른 파티가 열릴 뿐이죠.”
그렇게 말하는 수아의 모습은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조금 낯설어 보였다. 이연이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 난 후에는 다시 되돌아오긴 했지만.
우리 도시에 이렇게 많은 명사들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으나,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들에게는 유리했다. 네 사람은 자연스럽게 홀 안에 입장해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었다.
파티의 시작이었다.
혜강에게 연락을 해 두긴 했으나, 격식 있는 파티장에서 고글이나 통신기는 다소 눈에 띄었기 때문에 평소처럼 자유롭게 통신을 할 수는 없었다. 변이종 전투를 하는 것도 아니니 실시간 정보를 얻어야 할 일도 별로 없을 것이다. 혜강은 그동안 이런저런 조사나 더 해 보겠다며, 조심히 다녀오라는 안부를 덧붙였다.
혜강의 분석에 따르면 팔찌 장사꾼은 꽤 많은 파티에 참석한 것으로 보였다. 이런 파티에 참석할 수 있을 정도의 명사, 혹은 그에 준하는 인맥을 가졌다는 이야기였다. 추가로, 구매 타깃인 젊은 층에게 자연스럽게 섞이기 위해서는 장사꾼 역시 젊은 나이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고 해도 불법적인 물품을 거래하는 사람이다. 파티 주최자가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는데, 아직까지 영업 중이라면 아주 신중한 성격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구매자 역시 철저하게 따져서 물색한다고 했다.
팔찌 장사꾼의 타깃은 제법 명확한 조건이 있었다. 구매 의사와 구매력이 확고하고, 초능력에 관련해 흥미와 욕심을 가진 일반인.
“처음 보는 얼굴을 상대로 팔려고 들지는 않을 거야.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인물이어야 장사꾼이 안심하고 찔러보겠지.”
그에 의거해 이연과 산오는 자연스럽게 제외되었다.
“저는 동기가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동생이 쓰러졌잖아요. 팔찌를 판 당사자라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테고, 이 시점에 제가 갑자기 팔찌를 구하고 싶다고 하는 게 수상하게 느껴지겠죠.”
남은 사람은 하나였다.
“내 집안의 비초능력자 무시가 이번만큼은 도움이 되겠네.”
D.S가 삐딱하게 웃었다.
초능력을 보유해야 인정받는 가문의 유일한 일반인. 멸시당하다 못해 딸마저 빼앗기고 쫓겨난 비운의 핏줄.
완벽한 구매 동기였다.
“내 불우한 사정은 이 동네에 파다해.”
‘불우한’이라는 단어에 강세를 넣은 D.S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몇 마디 흘려 주면 그쪽에서 금방 접촉을 시도하겠지.”
심지어 몇 년을 두문불출하다가 갑자기 파티에 나타난 것조차 그럴듯했다. 초능력을 얻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온 여자처럼 보이기에 충분했다.
그들이 할 일은 그저 덫을 쳐 놓고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어머, 수아야. 오랜만이야.”
“이모. 잘 지내셨어요?”
“나야 뭐 늘 그렇지. 그런데 이쪽은…….”
곱게 주름이 진 눈매가 조금 움직였다. 시선이 향하는 곳은 수아의 뒤였다.
큰 관심을 끌지 않을 거라는 수아의 말과 달리, 사람들은 연신 흘끔대다 못해 안면이 있는 수아에게 자꾸 다가와 말을 걸었다.—D.S를 흘끔대는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이쪽은 말을 걸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듯했다.— 그리고는 꼭 산오에 대한 질문이 뒤따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얼굴이 너무 눈에 띄었다.
“와, 제가 몇 번 봤다고 익숙해졌었나 봐요. 이렇게 많이 물어볼 줄은 생각 못 했어요.”
잠깐 틈이 난 사이로 수아가 가볍게 불평했다. 이연이 산오를 흘끔 훔쳐보았다. 매끈한 이마와 선명한 이목구비가 오늘따라 더 환한 것 같았다. 어깨가 넓고 가슴이 커서 안에 갖춰 입은 베스트와 그 위의 투버튼 재킷도 매일 입고 다니는 옷인 것처럼 위화감이 전혀 없었다.
하긴, 그냥 다닐 때도 그렇게 시선을 모으고 다녔는데 작정하고 꾸민 지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잘생기긴 했지. 이건 사심이 들어간 게 아니라 객관적인 진실이다. 이연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고 보니 알바생 분 이름도 모르네. 이름이 뭐예요?”
굉장히 때가 늦은 질문이었지만, 이연이 섣불리 대답할 수 없는 종류였다. 괜히 잘못 대답했다가 비서들에게 연락받는 상황은 생각만 해도 피곤했다. 이연이 산오를 돌아보자 산오가 짧게 내뱉었다.
“제산오.”
수아가 입을 다물었다. 얼굴은 몰라도 그 이름을 모를 수는 없었다.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러간 후,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아는……?”
“맞을 거예요.”
이연의 확답에 두 사람의 눈이 나란히 커졌다. 여기서 들을 거라곤 생각도 못 한 이름이었다.
“아니, 어쩌다가…….”
“사장님, 무슨 뜻이에요?”
이연의 눈이 가늘어지자 수아가 자연스레 시선을 홀로 옮겼다. 그러면서도 간간이 산오를 흘끔거리는 것이, 소문으로만 듣던 인물을 직접 보는 게 퍽 신기한 것 같았다.
“아뇨, 뭐……. 그럼 이름은 말 안 하는 게 좋겠네요.”
“네. 괜히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서비스 많이 주는 사장님이라 봐줬다. 이연이 구시렁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D.S는 놀란 기색이긴 했지만 따로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D.S의 공방에는 정체를 숨기고 거래하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그녀에게 비밀 유지는 몸에 배어 있는 습관이었다.
“저 근데 음식 먹어도 돼요? 배고픈데.”
이연이 홀 여기저기에 놓여 있는 핑거 푸드를 가리켰다. 오후 내내 옷 갈아입는 것을 반복했을 뿐인데 제법 허기가 졌다. 저녁 시간도 훨씬 넘겼고……. 점심 먹고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솔직히 오래 참았다. 원래라면 간에 기별도 안 갈 양이었지만 파티에 있는 음식이라곤 저것뿐이니 어쩔 수 없었다.
“어머, 이연 씨 저녁 안 먹고 왔어요?”
수아가 놀란 듯 물었다. 파티 시작 시간이 밤이라 당연히 저녁을 먹고 오는 것이 예의라는 것이다. 그제야 파티라고 해 놓고 제대로 된 음식이 없는 비극적인 상황이 연출된 정황을 깨달았다.
산오는 같이 굶어 놓고 배가 고프지도 않은지 심드렁하게 먼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자식……. 설마 다 알고……? 이연이 배신당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 얼마나 충격으로 얼룩졌는지 D.S가 구박도 않고 손을 내저었다.
“갔다 와.”
신난다. D.S의 허가에 비매너 인간이 빠른 발걸음으로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훌쩍 멀어지는 뒤통수를 바라보던 수아와 D.S는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다시 둘러싸여 인사를 시작했다. 인파 사이에서도 머리가 껑충 보이는 잘생긴 얼굴만 슬쩍 시선을 돌려 잘 손질된 밝은 머리통을 바라보았다.
한 입 크기로 예쁘게 장식된 케이터링은 제법 호화스러웠다. 이건 연어고, 성게알, 참치, 케이크에, 푸딩까지. 뭐부터 먹지? 이연이 오늘 최대의 고민에 골똘히 빠져 있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