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형! 왜 이렇게 늦었어?”
복도 끝에서 걸어오는 혜강과 산오가 보였다. 이연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시험이 끝나고 이연은 영을 만나기 위해 대기실을 뒤졌으나, 영은 먼저 나가 버린 건지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대기실의 사람이 전부 빠지고 난 후에야 터덜터덜 나온 참이었다.
“맞은 건 괜찮아? 보기만 해도 아프던데.”
“치료받았어.”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제일 늦게 나오니 별다른 대기 없이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다행히도 치유계 초능력자의 가호를 받은 덕에 다친 옆구리는 말짱하게 복구되었다. 이연이 제 허리를 툭툭 두드리자, 혜강이 다행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하필 고르고 고른 게 막판에 배신하는 사람이라니, 진짜 운 너무 없는 거 아냐?”
“혜강이가 말로 때리네?”
이연이 허허 웃으며 혜강의 목을 조르는 척 팔을 감았으나, 힘이 거의 들어가 있지 않은 탓에 금방 어깨동무로 변했다. 이연은 비밀이라도 말해 주는 것처럼 속삭였다.
“그래도 그 사람 1단인데, 전투 능력 대단했지?”
“대박.”
얌전히 안겨 있던 혜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같은 1단으로서 그게 얼마나 힘든 선택인지는 혜강이 더 잘 알았다.
“근데 마지막이 좀 이상하긴 했어.”
“갑자기 형 공격할 때?”
“응.”
이연은 아직도 의문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점수가 어쩌고 했는데, 이미 재심사 고려할 만한 점수는 충분히 넘긴 상태였거든. 그런데 그 정도로는 안 된다고 하더라고.”
영의 뉘앙스는 마치 특별한 기준 점수가 있고, 그것을 넘겨야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초전력은 상대 평가였고, 몇 점을 얻든 등수만 괜찮으면 되는데…….
“아.”
혜강이 고개를 들었다. 팔 안에서 머리카락이 바스락거렸다.
“혹시 그 소문을 믿는 건가?”
“무슨 소문?”
“아, 형은 2단이라 모르겠구나.”
1단들 사이에서는 꽤 오래전부터 도는 괴담 같은 소문이 있었다.
“초능력 강화 실험?”
이연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건 또 무슨 실험이야? 그게 가능했으면 눈에 불을 켜고 인재 양성을 하는 초능력 관리청에서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었다.
“몰라, 그런 걸 연구하는 집단이 있다고 하더라고.”
초능력과 변이종이 워낙 현대 과학으로 설명하기 힘든 것들이다 보니, 초호시에는 관련해서 오만가지 낭설이 도는 일이 일상다반사이긴 했다. 혜강 역시 스치는 이야기로만 들었지 실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그 소문에 따르면, 초전력에 참가해서 좋은 성적을 내면 실험 대상자가 될 수 있대.”
“좋은 성적?”
“이를테면, 몇 점 이상을 받아야 한다든가.”
이연이 천천히 영과 했던 대화를 곱씹었다. 짧은 시간밖에 보지 못했지만, 영은 세상에 대한 신뢰가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실체도 없는 소문을 순진하게 믿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 소문에 대한 근거를 그녀가 손에 넣었고, 정말로 실험 대상자가 되기 위해 초전력에 참가한 거라면…….
“그런 실험은 불법이겠지?”
“당연하지.”
“아니, 대체 이 나라엔 법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연이 혜강의 어깨에 축 늘어지며 투덜거렸다. 그 역시 준법에 대해 사돈 남 말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불법이라는 사실만 봐도 실험자의 생명을 깎아서 진행한다는 사실을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죽을 수도 있잖아. 죽으면 끝이라고. 시험 종료 직전 본 영의 간절한 얼굴이 계속 생각나서, 이연은 얼굴을 찌푸리고 같은 말만 중얼댔다. 그런 그를 혜강이 흘끗 바라보았다.
“난 무슨 마음인지는 알 것 같아.”
“뭐?”
다른 사람도 아닌 혜강이 그런 소리를 하다니. 이연이 놀라서 시선을 내리자, 혜강은 그렇다고 불법 실험까지 할 마음은 없고, 라며 다독였다.
“무궁화 1단이라는 게 허울만 그럴듯하지, 생각보다 별로거든.”
가끔은 아예 안 주는 것보다 간을 볼 정도만 주는 게 더 질이 나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특히 주변에 넘치도록 축복을 받은 사람이 널려 있는 환경이라면, 열등감에 빠지는 건 너무나 쉬웠다.
“모두가 강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지만, 굳이 약한 사람이 있을 필요도 없잖아.”
그렇게 말하는 혜강의 얼굴은 지나치게 담담해서 어떤 기분인지 읽을 수가 없었다. 섬세하게 깜빡이는 눈꺼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연이 뭐라 말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뒤에서 누가 그를 끌어당겼다.
“으악.”
이연이 다칠 정도로 강력한 힘은 아니었지만, 그대로 몸이 끌려갈 만큼은 됐다. 덕분에 혜강과 어깨동무하고 있던 팔도 저절로 풀렸다.
놀란 이연이 고개를 휙 돌리자, 무뚝뚝한 얼굴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산오의 표정은 언제나 그렇듯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힘들었다.
“넌 어땠어?”
잠깐 입술을 달싹이던 이연이 물었다. 산오와 초전력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어쩐지 채점을 받기 위해 시험지를 내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등바등하더군.”
표현이 진짜…… 제산오 같았다. 칭찬하면 혹시 뭐, 다음 날 죽는 병이라도 걸렸나? 이연이 입을 삐죽이며 속으로 투덜거리는데, 산오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네가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어.”
“……너 지금 나 동정하냐?”
“나도 나중에 한번 싸워 보고 싶은데.”
“그냥 계속 동정해 줘.”
제발, 하고 덧붙인 이연이 기지개를 폈다. 오전 내내 뛰어다녔더니 슬슬 출출했다. 오늘 점심은 좀 푸짐하게 먹자. 푸짐하게 안 먹은 적은 있었고? 놀리는 듯한 혜강의 목소리 사이로 낯선 음성이 끼어들었다.
“정이연 씨?”
목에 사원증을 걸고 있는 남자가 어느새 그들 근처에 서 있었다. 누구지? 이연이 얼결에 대답했다.
“아, 네.”
“초전력 시험 진행 위원회입니다. 시험에 관해서 말씀드릴 일이 있어서요. 잠깐 시간 괜찮으실까요?”
이연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 걷는 진행 위원을 따라가며 산오와 혜강에게 먼저 가라는 손짓을 하자 혜강이 제 휴대폰을 가볍게 흔들었다. 식당에 도착하면 연락을 주겠다는 사인이었다. 혜강의 선택이라면 믿을 만했다. 초전력도 잘 끝냈겠다, 끝내주는 낮술을 하겠다는 야망에 이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진행 위원이 이연을 데리고 간 곳은 작은 방이었다. 박스에 담긴 서류들과 노트북이 책상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것을 보니 지형 설정 기능으로 만든 임시 사무실인 태가 났다.
위원은 서류철이 되어 있는 얇은 보고서 하나를 뒤적였다. 눈치로 보아 이연과 관련된 문서인 것 같았다.
“일단 약식으로 확인했는데, 끝까지 생존하셨더라고요. 좋은 성적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보통 시험 끝나고 바로 불러내 이런 자리를 만들지는 않는다. 무언가 잘못됐나? 이연의 눈이 경계심으로 데구르르 구르기만 하자, 위원은 종이를 내려놓고 본론에 들어갔다.
“정이연 씨, 무궁화 2단 판정을 받으신 게 언제죠?”
“스무 살 때 바로 심사받았으니까…… 한 4년 정도 됐어요.”
“그 후로는 격년마다 정기 검사를 받으셨죠?”
“네. 올해도 받았어요.”
“그때에도 별다른 이야기는 듣지 못하셨고요.”
“네. 무슨 문제라도…….”
의미 모를 문답을 하는 내내 위원은 이연을 뜯어보듯 관찰했지만, 큰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이내 시선을 돌려 노트북을 조작했다.
“이거 보세요.”
위원은 노트북을 반 바퀴 돌려 화면을 이연 쪽으로 향하게 했다. 스크린에 떠 있는 것은 일시정지 되어 있는 영상이었는데, 그 정체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저희 방금 시험한 거 영상 아닌가요?”
불과 한 시간도 지나기 전의 자신이 화면 안에 보였다. 배경을 보니 영과 공터에 있을 때였다.
“네. 이건 정이연 씨 회사로 보낼 시험 영상입니다.”
위원은 마우스를 조작했다. 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영상이 재생되었다. 말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지만, 움직임은 제법 선명하게 보였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영상은 이연이 아는 내용이었다. 영과 함께 유정헌을 상대하다가, 유정헌의 표식을 하나 따고, 시험이 끝나기 직전에 영이 그를 공격했고, 이연이 그것을 막으면서 무사히 종료.
유정헌이 표식을 빼앗긴 것이 드문 일이긴 했지만 직접적으로 빼앗은 게 영이었으니 그걸로 이연을 부를 이유는 없었고, 그 밖의 특수한 상황이라고 해 봤자 영이 배신한 것이 다였다. 물론 그게 이연에게는 예상외의 사건이었으나, 온갖 변수가 산재한 초전력에서는 크게 특별할 것도 없는 전개였다.
영상이 종료되자, 위원은 화면을 앞으로 조금 감았다. 방금 봤던 장면들이 빠르게 되돌아갔다.
그가 멈춘 곳은 영이 그를 공격하려 하는 순간이었다.
“정이연 씨도 아시겠지만, 시험 시 착용하는 팔찌에는 기력 측정기가 붙어 있어요. 시험 내내 능력을 쓸 때마다 방출되는 기력을 기록하죠. 인간은 위급한 상황에서 본 힘이 나오기 마련이고, 당사자조차도 자기 힘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를 때가 많거든요.”
설명과 함께 상황이 다시 재생되었다. 가만히 뒤돌아서 있던 영이 이연을 공격하고, 이연이 표식을 하나 잃었고, 고통에 비틀거리는 사이 공격하려던 것이 오히려 이연의 함정에 걸렸다.
“그런데 여기.”
영이 이연의 함정에 걸리는 장면에서 화면이 다시 멈췄다.
“여기에서 능력을 쓰실 때 정이연 씨의 표준 기력보다 훨씬 더 높은 기력 수치가 나왔어요.”
위원의 말이 빨라졌다. 다다다 쏘아붙이는 듯한 말투는 화가 났다기보다는 흥분한 영향인 것 같았다.
“추측하기로는 위협에 몸이 저절로 반응하느라 평소의 컨트롤보다 더 다급하게 운용을 하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단 이 정도의 기력이 나왔다는 건 몸 안에 그만한 기력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예요. 없는 것을 끌어 쓸 수는 없으니까요.”
“그, 그래요?”
이연이 어리벙벙하게 물었다.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맹한 얼굴에 위원이 방금 한 이야기를 요약했다.
“정이연 씨의 초능력 등급이 낮게 측정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3단,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몰라요.”
연한 색의 눈동자에 노트북 화면이 투명하게 비쳤다. 영이 그를 공격하기 전, 얼결에 이연이 함정을 발동시키는 장면이 뚜렷하게 찍혀 있었다.
“저……. 혹시, 제 능력에 대해서 들으신 적 있으신가요?”
“네?”
느닷없는 질문에 위원이 눈을 깜빡였다. 이연이 머쓱하게 웃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제 능력은 그림 실체화예요. 제가 무궁화 2단인 이유는 아마 기력이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활용도가 영향을 깊게 미쳤을 거고요.”
“하지만…… 시험 치르시는 걸 보면 능력 활용에도 능숙해 보이신데요.”
“뭐, 그거야 헌터 경험이 기니까요. 그리고 능력 심사할 때 들은 건데, 제 등급을 측정한 방식은 일반적인 초능력자들과는 조금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무조건 복잡한 걸 만든다고 기력을 많이 쓰는 것이 아니라나? 기력량이 많다고 능력이 강한 게 아니라고 했나? 뭐 그런 설명을 듣긴 했는데, 전문가가 아니라서 정확하게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이연의 이야기에 위원이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아마 이제 와서 다시 심사해도 초능력 그 자체로는 달라지지 않을 거예요. 당장 올해에도 초능력 검사 받았는데 그대로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이연의 태도는 어딘지 초연한 분위기가 풍겼다. 다른 초능력자들이 자신의 등급을 높이지 못해 성화인 것과는 정반대였다. 오히려 위원이 아까운 마음에 안달을 냈다.
“하지만…… 심사해서 오를 수도 있잖습니까. 기회잖아요.”
이연이 빙긋 웃었다. 태평하기 짝이 없는 미소였다.
“저는 지금이 딱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