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진짜……. 별일이 다 있네.”
유정헌이 천천히 일어서며 투덜거렸다. 그는 바닥을 확인했다. 초전력 베테랑이니만큼 상대방의 능력을 파악하는 것이 빨랐다. 빙결. 직접 공격할 정도의 강도는 안 되는 것 같고. 유정헌이 어쩔까 싶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먼저 제안한 것은 이연이었다.
“그럼 저희 이쯤에서 헤어질까요?”
“뭐?”
“남의 표식 하나 없애 놓고 빠지시겠다?”
이연을 제외한 모두가 반항적인 얼굴이었다. 에이, 하고 이연이 넉살 좋게 웃었다.
“더 싸워도 되겠지만, 그럼 저희 중 하나는 탈락할걸요. 유정헌 씨 아직 어깨 아프지 않아요? 그 몸으로 괜찮겠어요?”
이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나무 봉에 직격으로 얻어맞은 어깨가 시간이 지날수록 화끈거렸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유정헌이 어깨를 늘어트렸다.
“다음에 꼭 다시 만나면 좋겠네.”
“저는 별로…….”
떨떠름한 대답에도 방긋 웃은 유정헌이 훌쩍 몸을 돌려 공터를 걸어 나갔다. 그 뒷모습을 금방이라도 따라 나갈 기세로 노려보던 영이 험악하게 으르렁댔다.
“왜 여기서 끝내? 미쳤어?”
“영 씨, 방금 영 씨의 공격이 통했던 건 순전히 저쪽이 저희 능력을 몰라서 방심했기 때문이에요.”
단호한 목소리는 객관적인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영이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방금 바로 반격당한 거 못 봤어요? 저희 또 싸웠으면 장담 못 해요. 유정헌 씨는 진짜로 초전력 엄청 잘한다고요.”
저도 이제 밑천이 거의 떨어져서 서포트 못 했을 거예요, 하고 이연이 가볍게 웃었다.
“어차피 곧 시간도 끝이에요. 잘해 봤자 무승부였을걸요.”
이연은 그렇게 말하며 공터 쪽으로 걸었다. 절대 유정헌 씨 말을 신경 쓰는 건 아니고……. 속으로 변명한 이연이 공터에 있던 종이를 주워 가방에 넣기 시작했다. 유정헌과 싸울 때 대부분 써서 빈 종이투성이였다.
팔찌를 확인하니 점수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대부분의 표식 처치를 영이 하긴 했지만, 이연도 중간중간 점수를 땄다. 여기에 생존 가산점까지 합치면 당초 목표였던 순위권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영이 제 역할을 잘해 준 덕분에 평소보다 쉬웠다. 제산오랑 혜강이도 잘 보고 있겠지? 이연이 뿌듯하게 웃었다.
“고생했어요.”
이연은 그렇게 말하며 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아까 유정헌의 표식을 없앤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등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묘하게 서늘해서, 이연은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영 씨?”
불현듯, 영이 몸을 돌렸다. 거침없는 발걸음이 이연에게 다가왔다. 조금 떨어져 있던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영이 봉을 고쳐 쥐었을 때였다.
“……영 씨?”
대답은 없었다.
순식간에 이연의 코앞까지 다가온 영이 팔을 휘둘렀다. 길쭉한 봉 끝이 정확히 오른쪽 발등을 향하고 있었다. 이연이 어리둥절한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 피하자, 영의 눈에 살기가 섞였다.
“뭐, 뭐예요?”
이연은 재차 물었지만 영은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봉이 다시 살벌하게 공기를 갈랐다.
저런 흉기에 맞으면 어떻게 될지는 보지 않아도 훤했다. 이연은 영과 대화하기를 포기하고 공격을 피하는 데에 주력했다.
그러나 영은 전문적으로 무술을 배운 사람이었다. 아무리 운동 신경이 좋은 편이라고 해도, 이연이 그것을 피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공격에 이연이 잠깐 궤적을 놓친 순간, 옆구리에 있는 표식을 정확히 노린 공격이 들어왔다. 퍽. 표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윽…….”
허리를 강타한 충격에 이연의 몸이 휘청였다. 표식은 둘째 치고 너무 아파서 눈물이 다 났다.
비틀거리는 인영을 여자는 놓치지 않았다. 남은 표식은 하나. 영은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우아하게 돌았다. 부웅, 하는 소리가 이연에게 시시각각 가까워졌다.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해 취한 사람처럼 주춤거리는 통에 거리가 벌어진 이연에게 영이 한 발자국 다가간 그 순간.
쉬익!
영의 눈앞이 일순간 까맣게 변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봉을 내둘렀지만, 함정이 더 빨랐다.
유정헌을 덮쳤던 새덫이 영을 가두었다.
그물은 발버둥 치면 칠수록 옴짝달싹할 수 없이 조여들었다. 영은 구속복이라도 입은 것 같은 자세가 되어서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그물 안쪽에서 흘러나왔다.
“……이게.”
이연을 공격하기 전 그녀가 확인했을 때, 근처에 새덫이 그려진 그림은 없었다. 그의 주변에는 빈 종이만 가득했다.
“네 비장의 무기로군.”
새덫은 그런 바닥에서 튀어나왔으니, 가능성은 하나였다.
“종이를 일부러 뒤집어 놓은 건가?”
“비장의 무기라기엔 좀 그래요. 쓸 생각이 없었거든요.”
이연이 한숨을 쉬며 다가왔다. 옆구리의 고통이 가시지 않아 허리를 조금 구부정하게 숙인 채였다. 내일이면 허리에 시퍼렇게 멍이 들 게 빤했다. 그런 걸 며칠 내내 달고 다녀야 할 터였다. 치유계 초능력자가 이런 것도 치료해 주려나? 목숨에 지장 없는 것도 해 주던가?
“왜 그랬어요? 이런 거 안 해도 영 씨 성적은 엄청 좋았는데…….”
“넌 모르겠지.”
영의 기세가 거칠어졌다.
“너같이 운 좋게 태어난 헌터들은…….”
무궁화 1단인 탓에 영의 아버지는 헌터가 되지 못했다. 영의 아버지가 동네에 출몰한 하급 변이종을 상대하고 있을 때면, 연락을 받고 출동한 헌터들이 나타나 어디 1단 따위가 나대느냐고, 변이종은 고작 그딴 기술로 상대할 만한 생물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영은 그런 식으로 쫓겨난 아버지가 터덜터덜 집에 돌아와 우울하게 제 봉을 닦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다.
‘네가 헌터가 되면 분명히 날아다닐걸.’
아버지는 틈만 나면 그렇게 말했다. 영이 제가 쥔 컵의 물 표면에 서리가 낀 걸 보여 줬을 때 누구보다 기뻐했고, 정식으로 초능력자 등급 심사를 받을 수 있는 나이인 20살이 되기 전까지 영의 능력을 무술 능력과 어떻게 결합해야 더 효과적으로 쓸 수 있을지 매일 고심했다.
그러나 영의 통지서에 찍힌 등급은 무궁화 1단이었다.
뭐, 그래도 괜찮았다. 영은 가볍게 생각했다. 어차피 1단과 2단은 큰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와 같은 1단인 게 더 좋았다. 같이 동네 순찰도 하고, 어쩌면 하급 변이종을 만났을 때 헌터들이 오기 전까지 쫓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와 치킨집에 가서 축배도 들어야지. 잔뜩 신나할 아버지의 모습이 선연하게 상상돼, 영은 현관을 들어서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그녀뿐이었다.
영이 들고 온 종이를 읽는 아버지의 표정이 단번에 식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축하한다는 말도, 고생했다는 말도, 그 어떤 종류의 말도.
그는 그저 종이를 영에게 건네주고 등을 돌려 방에 들어갔다.
영은 멍하니 아버지가 들어간 방문을 보았다. 집에 올 때까지 내내 쥐고 있던 통지서인데도 유독 촉감이 낯설었다.
아버지가 원한 건 강한 헌터였다. 고작 1단짜리 초능력자가 아니라.
심장 한구석이 아주 차가운 바늘로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영은 평생 그 감각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영 씨도 2단이, 헌터가 될 수 있잖아요.”
“그 정도로는 안 돼.”
“네?”
이연의 눈이 의아하게 뜨였다. 1단에서 2단까지는 초전력에서 어느 정도 비등하게 겨루는 것이 가능했지만 3단부터는 어림도 없었다. 선천적인 2단조차 초전력 결과만 가지고 3단으로 승단한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가타부타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전체 초능력자 중 3단 이상 초능력자의 비율이 등급 심사 난이도를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혜강처럼 특수한 사례도 아니고, 영의 능력 특성인 빙결은 전투 능력으로서 괜찮게 평가받는 종류였다. 그녀가 1단인 이유는 기력의 양이 너무 적어서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건 그냥 선천적인 문제였다.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대답에 인상을 찌푸렸으나, 영은 이연이 앞에서 뭘 하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연신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비명을 닮아 있었다.
“점수가 조금만, 조금만 더 있으면 됐는데…….”
그때였다.
삑. 두 사람의 팔찌에서 작은 알림음이 울렸다. 이어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제5구역 오전 2차 시험이 종료되었습니다. 안내에 따라 모두 시험장에서 퇴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 드립니다. 제5구역 오전 2차 시험이 종료되었습니다.]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근처에 있던 지형지물이 모래처럼 부서져 날아가기 시작했다. 서서히 사라지는 배경 너머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 하나둘 보였다.
초전력 종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