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57화 (57/250)

#57

‘어떻게 해야 하지?’

이연은 가방에 남은 그림을 머릿속으로 세었다. 챙겨 온 게 몇 가지 더 남았긴 하지만 유정헌에게 통할 만한 것인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상대가 너무 안 좋았다. 물리적인 것은 죄다 되돌려보낼 수 있는 그에게, 무기 격투를 주로 사용하는 영은 물론이고 무언가를 실제로 만들어 내는 이연의 능력 역시 상성이 최악이었다.

그나마 다행은 그들은 유정헌의 능력을 알고 있지만 유정헌은 그들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인식 범위 내에서 공격하면 무조건 능력으로 반사할 거예요. 섣불리 공격하지 마세요.”

낮게 속삭인 이연이 팔을 뒤쪽으로 뻗어 가방 속의 종이를 움켜쥐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이연은 모든 종이를 꺼내 던졌다. 무언가가 빽빽하게 그려진 종이들이 제각기 팔랑이며 하늘을 날았다. 순식간에 시야가 하얗게 가득 찼다.

그러나 펄럭이는 소리 외에 별다른 일이 생기지는 않았다.

“아, 이건 뭐야…….”

종이 너머로 유정헌의 짜증스러운 혼잣말이 들렸다. 종이 몇 장은 파문을 타고 다시 이연에게 돌아왔지만, 워낙 장수가 많았던 터라 모든 것을 옮길 수는 없었다. 그렇게 위협적이지도 않았고.

종이의 비는 곧 가라앉았다. 유정헌이 난장판이 된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콱 밟아 찼다.

“다짜고짜 왜 이렇게 자원 낭비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 지구한테 안 미안한가?”

앗, 그건……. 변명할 수 없는 질책이었다. 이연이 머쓱하게 사과했다.

“그 친구에게는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들 때문에 나무를 심어도 심어도 끝이 없는 거야. 이기적인 인간들 같으니.”

“저 그래도 자원 아낄 수 있는 능력인데요…….”

소심한 반박에도 유정헌의 인신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종이를 이만큼이나 써야 하는 능력이 자원을 아껴 봤자지. 씨앗을 틔울 수 있는 능력은 아니잖아?”

유정헌이 새침하게 팔짱을 꼈다. 말싸움에 진 이연이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까는 꼬라지를 바라보던 영이 인상을 확 일그러트렸다.

“지금 뭐 하는……”

그때였다. 이연의 허리 부근 공기가 일렁이는가 싶더니, 웬 손이 튀어나왔다.

길쭉한 손가락이 옆구리 뒤쪽에 있는 표식을 터치하려던 그 순간, 이연의 손이 그것을 잡아챘다. 가볍게 맞잡은 손은 마치 악수라도 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데에는 안 넘어가죠.”

고개를 든 이연의 얼굴에는 방금 전의 시무룩한 기색이라곤 온데간데없었다. 팔짱으로 숨겨 공격하려던 손을 그대로 잡힌 유정헌이 짜증스레 손을 비틀었다. 거친 몸부림으로 자유가 된 손은 파문 안으로 사라졌다.

유정헌의 전투 스타일은 워낙 명성이 자자했다. 주로 본인은 아무것도 안 하고 상대방의 힘만 이용한다는 점에서.

뒤집어 말하면 상대가 잠자코 있을 때 유정헌이 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었다. 그의 근력은 잘해 봐야 이연급. 몸싸움에 능하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당연히 유정헌 입장에서는 그들이 먼저 공격해 주는 게 유리했다. 흥분해서 시야가 좁아지면 더 좋았고.

앞선 대화는 그러기 위한 시비였다. 말투가 유별나게 재수 없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대충 패턴 알겠죠? 유정헌 도발 엄청 심하니까 조심해요.”

이연이 영에게만 들리도록 낮게 속삭이며 팔짱을 푼 유정헌을 주시했다. 공격 시도가 실패했음에도 유정헌은 여전히 빙글거리며 웃는 낯짝을 고수하고 있었다.

“……난 너처럼은 못 해.”

잠깐 침묵하던 영이 난감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실토하지 않아도 못 할 것 같았다. 기대도 안 했던 이연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등을 툭툭 쳤다.

“괜찮아요. 이다음부터는 영 씨 하던 대로 하면 되거든요.”

한번 실패했으니 얕은 수작이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은 유정헌도 깨달았을 것이다. 더불어 쉽게 넘어가지 않는 상대에 대한 경계심도 높아졌을 테고. 유정헌의 주의가 이연에게 치중했을 때가 기회였다.

영과 나란히 서 있던 이연이 반 발짝 앞섰다. 나직한 목소리가 영에게 닿았다.

“저는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게 좋아요.”

그녀를 가볍게 두드리는 손길은 그 의미가 명확했다.

바닥에 뿌려진 수많은 종이에 그려진 그림 종류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가 준비해 온 전략은 이런 식으로 쓸 건 아니었지만, 아주 최악은 아니었다. 이연은 즉시 유정헌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종이의 그림을 실체화했다.

쉬익.

순식간에 커다란 새덫이 종이에서 튀어나왔다. 유정헌의 키를 전부 덮고도 남는 크기의 덫이었다.

사람을 옮길 정도로 큰 통로는 만들지 못하니, 이 거대한 새덫을 다른 곳에 이동시킬 수는 없었다. 유정헌이 혀를 차며 뒤로 빠졌다. 그의 코앞에서 덫의 아가리가 살벌하게 다물리는 쇳소리가 났다.

“이게 자원 낭비의 정체였군.”

“더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걸요.”

이연이 놀리듯 말하는 것과 동시에 유정헌의 근처에 있던 종이들이 하나둘 펄떡대며 덫을 뱉어 냈다. 빠른 변환 속도가 사뭇 위협적으로 그에게 들이닥쳤다.

일단은 종이로 가득한 바닥을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다. 유정헌은 종이가 없는 곳으로 도망치려고 했으나, 이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최대한 유정헌을 정신없게 몰아붙여야 했다. 영의 존재감이 일순간이라도 지워지도록.

두더지 게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유정헌이 가는 곳마다 덫이 따라붙었다. 중간중간 덫이 아닌 것들이 튀어나오는 일도 있었다. 무선 마이크라든가, 조금 전에 썼던 소화기, 사다리 같은 것들은 훌륭한 미끼 역할을 했다. 공터는 순식간에 잡동사니로 난장판이 되었다.

이연이 교묘하게 그를 몰아 가며 종이 구역을 벗어날 수 없게 막자, 유정헌은 방법을 바꾸었다.

막 그를 덮치려는 덫을 피해 허리를 숙인 유정헌이 종이를 한 움큼 주워 허공 속으로 던졌다. 구겨진 종이들은 이연의 얼굴 앞으로 직배송되었다.

“윽.”

이연이 팔을 휘저어 제 시야를 방해하는 종이를 걷어 냈으나, 유정헌은 계속해서 이연의 근처로 종이를 뿌려 댔다. 종이를 날려 계속 신경을 어지럽히는 와중에 몸으로 직접적으로 뻗어 오는 유정헌의 손을 모조리 피한 것만으로도 선방이었다. 덕분에 이연이 종이를 피해 도망 다니는 사이 유정헌 역시 종이 늪을 벗어날 수 있었다.

공터 외곽에 놓인 벤치는 빌어먹을 종이 쪼가리가 없는 안전지대였다. 거리는 조금 멀어졌지만, 어차피 그에게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유정헌이 반격을 위해 이연 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찰나, 등 뒤에서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경험으로 쌓은 직감이었다.

고개를 돌릴 틈도 없었다. 유정헌은 소름이 돋은 곳을 향해 능력부터 사용했다. 눈으로 확인한 것은 그 후였다.

머리통만 한 파문 너머에, 물결 모양으로 이지러진 여자가 봉을 금방이라도 휘두를 것처럼 힘껏 뒤로 당긴 것이 보였다. 제 능력으로 받아 낼 수 있는 공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위협적인 기세였다. 순간적으로 압도당한 유정헌이 저도 모르게 조금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발을 물린 순간, 신발 밑창이 힘없이 미끄러졌다.

발에 닿는 생경한 감각에 유정헌의 눈이 커졌다. 몸의 균형이 뒤로 훅 쏠리고 시야가 위로 솟았다.

동시에, 그의 어깨에 강한 타격이 가해졌다. 정확하게 표식을 향한 공격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자문한 후에야 유정헌은 진상을 깨달았다. 방금 유정헌이 파문을 만들었을 때, 영은 봉을 휘두르지 않았다. 기백이 어마무시하긴 했지만, 그녀가 한 것은 단순한 준비 자세에 불과했다.

거기에 눌렸을 때부터 유정헌은 진 거였다.

유정헌이 움직이는 걸음에 맞추어 영은 그의 발밑을 얼렸다. 그가 그대로 넘어지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몸의 균형이 흐트러지는 그때, 그녀를 시야에서 한순간만 놓친다면.

시야가 잠깐 뒤집힌 틈을 타 영은 유정헌의 파문을 피해 봉을 내질렀다. 제아무리 유정헌이어도 보지 못한 공격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와, 살다 보니까 유정헌 씨 표식도 없애 보네요.”

어느새 다가온 이연이 중얼거렸다. 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즉시 봉을 모로 세워 휘둘렀지만, 유정헌은 두 번 당할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았다.

“헉.”

이번에 인 파문은 이연에게 향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봉 끝을 간신히 피한 이연이 뒤로 물러나자, 흠칫한 영이 다시 무기를 거두었다.

“깜짝이야……. 아무튼 잘했어요, 영 씨.”

이연이 가볍게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원래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제스처였지만, 영은 놀랍게도 손을 마주 댔다. 조그만 박수 소리가 났다.

“비장의 한 수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눈동자에는 약하게 들뜬 기색이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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