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봤죠?”
혜강이 산오를 돌아보았다. 자식의 성적표를 동네 주민에게 자랑하는 부모님 같은 태도였다.
시험장과의 거리가 멀어 이연과 영이 정확히 무슨 작전을 짰는지는 모르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파악하는 것은 가능했다.
골목에 들어선 이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공터 여기저기에 동그랗게 뭉친 종이를 떨어트리는 것이었다. 태블릿 위에 종이를 대고 그대로 그린 그림은 구겨져 있어도 능력을 발동하는 데에는 문제없었다.
사전 작업을 마친 후 두 사람은 골목 위 담벼락을 올라타 주택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곧 검은 후드의 남자가 들어왔고, 이연이 등장해 그를 꾀어냈다.
그 후로는 모두가 아는 대로였다.
“머리를 쓰는군.”
산오는 퍽 놀랍다는 어투로 중얼거렸다. 묘하게도, 그 목소리에 담겨 있는 감정은 조금 복잡한 것 같았다.
“의외예요?”
혜강이 모든 적을 탈락시키고 그물을 없애는 이연을 바라보았다. 조그마한 알갱이들이 허공으로 날아가 사라지고 있었다.
“생각을 가지고 사는 놈은 아니지.”
“와, 이연이 형 앞에서는 그런 거 말하지 마세요.”
혜강이 농담처럼 타박하자, 산오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아무튼 믿을 수 없겠지만, 이연이 형 특기는 심리전이에요.”
수확을 얻은 영과 이연이 다시 이동했다. 무뚝뚝하게 앞을 보고 걷는 영에게 하이파이브를 시도하다가 결국 시무룩하게 손을 내리는 꼴을 보던 혜강이 혼잣말을 하듯 읊조렸다.
“초전력에 참가할 생각은 없지만, 가끔 이연이 형이랑 팀을 짜 보고 싶긴 해요. 이연이 형 작전에 따르는 것도 꽤 재미있을 것 같거든요.”
산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넌 이미 훌륭한 파트너인 것 같은데.”
혜강의 눈이 조금 커지나 싶더니 느리게 깜빡였다. 산오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생각도 못 한 말이다. 그 사실이 조금 재미있어서, 혜강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거야 그렇긴 하죠.”
“그건 어디서 배웠어요?”
이연이 눈짓으로 봉을 가리켰다. 검도 같은 거면 모를까, 봉술이란 게 흔하게 배울 수 있는 종목은 아니었다. 게다가 실력 역시 범상치 않았고. 영이 봉의 몸체를 엄지로 쓸었다.
“아버지가 가르쳐 주셨어.”
“액션 스쿨이라도 운영하셨나 봐요.”
“그건 아니고, 그냥 멋있어 보여서 전국을 뒤져 할 줄 아는 사람을 찾아냈다고 하더라고.”
영의 아버지는 의외로 무술에 재능이 있었다. 덕분에 무궁화 1단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헌터보다 몸 쓰는 게 나았다. 헌터라고 모두가 전문적인 무술을 배우는 것은 아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웬만한 초능력보다 낫지?’
영이 아버지와의 대련에서 처음으로 이긴 날, 뒷마당에 드러누운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파하하 웃었다.
“와, 그렇게 열정적이기 힘든데. 대단하신 분이네요.”
이연의 감탄에 영이 피식 웃었다.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얼굴은 묘하게 쓸쓸한 분위기를 풍겼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두 사람이 다시 멈춘 곳은 제법 커다란 공터였다. 주택가 조경에 포함된 곳인지, 주변에는 회양목들이 단정한 모양으로 손질되어 있었다.
남은 시간은 40분 정도. 시간이 꽤 흘렀으니 웬만한 잔챙이는 대부분 탈락했을 것이다. 아직까지 살아남은 응시자는 이연처럼 초전력에 몇 번 참가해서 나름의 유효 전략을 세웠거나, 영처럼 자체적인 전투 능력이 상당한 실력자들 뿐이었다.
특히…….
“헉.”
느닷없이 이연이 영을 잡아끌었다. 슬슬 엎드려 회양목 뒤로 숨은 이연이 전방을 슬쩍 보고는 혀를 찼다. 다소 마른 남자가 공터에 아무렇게나 놓인 건축 자재에 앉아 있는 모습이 비스듬히 보였다.
“하필 유정헌이네…….”
대기실에서 못 봤는데, 다른 대기실에 있었던 모양이다.
“아는 사람?”
얼결에 이연을 따라 쭈그려 앉은 영이 물어 왔다. 이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정헌 몰라요? 랭커잖아요.”
“2단 초전력에 무슨 랭커야.”
대답을 듣고도 영은 여전히 의아하다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무궁화 1단이었다. 2단 상대로도 싸움을 너무 잘해 소개를 듣고서도 실감이 안났는데, 랭커를 모르는 것을 보니 확실히 2단은 아니구나 싶었다.
2단 중에서도 당연히 상위권이 존재한다. 뭘 모르는 일반인들이나 상급 초능력자들이야 2단의 생태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리가 없고 관심도 없겠으나, 여기에도 그들만의 리그라는 게 있다.
같은 등급인 2단 헌터라면 최소한 이름은 들어 본 부동의 최상위권.
여기에는 보통 랭킹 21,000위 이내의 랭커들이 속한다. 숫자가 이만이 넘는데 이게 무슨 랭커냐 싶겠지만, 3단 이상의 초능력자 머릿수가 20,000명이니 2단끼리 비교하면 1,000위 이내인 것이다.
그 정도면 무궁화 2단 상위 0.6%다.
2단 초전력의 5위권 이내는 이 구간의 랭커들이 대부분 쓸어 간다고 보면 됐다. 간혹 랭커끼리 싸우다가 조기 탈락 하는 사례도 있기야 있다만 그거야 예외 상황이고…….
“여기요. 20,102위 유정헌. 사진 보이죠?”
이연이 랭킹 페이지를 보여 주자, 영의 시선이 휴대폰 화면에 닿았다. 순한 얼굴의 증명사진이 조그맣게 떠 있었다. 그 옆으로는 이연이 말해 준 정보와 함께 기본적인 신상이 적혀 있었다. 20,102위. 유정헌. 만 26세. 공간 일체 능력.
“이게 무슨 능력이지?”
초능력자등급심사위원회가 명명하는 초능력명은 이연의 그림 실체화처럼 직관적인 종류도 있었으나, 응용 범위에 따라 단번에 추측하기 어렵게 지은 이름도 많았다. 유정헌의 공간 일체 능력도 본인이 유명한 랭커라 사전 지식이 있는 거지, 처음 듣는 사람이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 그건요…….”
“자세에 비해 태평한 대화를 나누고 계시네.”
이연의 설명은 머리 위로 떨어진 목소리에 끊겼다. 두 사람이 동시에 눈을 깜빡이고는 시선을 천천히 위로 올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거리를 두고 앉아 있던 얼굴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격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걸까?”
선이 가는 얼굴이 눈을 접어 웃었다. 이연만큼 호리호리한 몸집인데도 키가 커서 그런지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먼저 움직인 것은 영이었다.
그녀는 바닥에 잠깐 내려놓았던 봉을 움켜쥐고 그대로 각도를 바꾸어 유정헌에게 찔러 올렸다. 준비 동작 없는 자세였음에도 속도가 제법 빨랐다.
유정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이 조금 더 진해졌다.
“잠깐……”
이연이 외쳤으나 이미 늦었다. 유정헌의 코앞에서 봉이 허공에 파문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영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녀의 배 앞 빈공간에 파문이 일었다. 그곳에서 사라진 봉 끝이 튀어나왔다.
“헉……!”
뒤늦게 힘을 늦추었으나 충격은 이미 전달되고 난 후였다. 제힘에 그대로 배를 찔린 영의 신음이 터졌다. 비틀거리는 영을 이연이 재빨리 잡아 부축했다.
“영 씨, 괜찮아요?”
이연이 조심스레 영을 데리고 뒷걸음질 쳤다. 유정헌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부상자와 함께 도망쳐 봤자 의미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여유였다. 조금 거리가 벌어졌지만 여전히 상황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유정헌의 능력은 2단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공간 일체 능력. 말 그대로 서로 다른 허공을 하나로 이을 수 있는 능력이다.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거리나 크기에 제한이 있으며, 사용한 위치에 파문이 이는 듯한 현상이 보인다.
얼핏 보면 텔레포트와 비슷했으나, 유정헌의 능력은 사람을 옮길 정도는 아니라고 알려져 있었다. 또한 그의 능력은 물체 지정이 아니라 위치 지정으로 발동된다. 일종의 축지 통로를 만든다는 설명이 더 적합했다.
그는 방금 영에게 했던 것처럼 주로 공격한 당사자에게 공격을 되돌려주는 식으로 힘을 사용했다. 이연처럼 체력이나 근력은 그저 그랬지만, 애초에 본인의 근력을 쓸 일이 거의 없으니 타고난 신체 능력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2단 랭커 중 몇몇은 3단에 한없이 가깝다고 평가된다. 비공식적으로 준3단이라고 불리는, 2단의 평균적인 기력량을 뛰어넘지만 아쉽게도 3단까지는 되지 않는 수준.
그중 하나가 유정헌이다. 이견이 없는 2단의 강자였고, 유정헌은 그것을 매 초전력 때마다 증명했다. 그의 초전력 성적은 수많은 2단 랭커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이었다.
유정헌은 참가했던 모든 초전력을 통틀어, 자신의 표식을 잃은 적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