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여자는 생각보다 더 냉철했다.
“내가 네 뭘 믿고?”
그렇게 대답하며 냅다 찔러 버리려는 몸짓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간신히 허리를 비틀어 피한 이연이 옆구리에서 올라오는 찌릿함에 숨을 들이켰다. 와, 이거 쥐 난 것 같은데……. 이래서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탈이 난다는 말이 있는 거다.
신체 능력도 어느 정도지, 무술을 배운 것도 아닌 이연이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공격을 계속 막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봉을 팔로 막고 얼얼해진 피부를 문지른 이연이 뒷걸음질로 물러섰으나, 발밑을 얼려 순간 가속이 가능한 여자에게 그 정도 거리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새하얀 냉기가 순식간에 이연의 발목까지 닿았다. 중심을 잡기 위해 주춤하는 순간 발이 쑥 미끄러졌다.
“으악.”
여자와 저 사이에 이어진 빙판에 거하게 넘어질 뻔한 이연이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여자가 구부정하게 선 이연을 향해 봉을 휘두르려는 순간, 이연이 내던지듯 소리쳤다.
“제 표식 하나 드릴게요.”
우뚝. 여자의 몸이 멈췄다. 이연이 눈치를 살피며 꾀어내듯 얼렀다.
“전 생존 가산점이 목표예요. 아무리 일이 안 풀려도 표시 하나 얻고 시작하는 거잖아요. 손해는 아닐걸요.”
“…….”
꿍꿍이를 찾아내려는 것처럼 이연을 훑어보던 여자의 손아귀는 한참 후에야 힘이 풀렸다. 죽는 줄 알았네. 이연이 한숨을 쉬며 아직 녹지 않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왼팔을 내밀었다. 어깨 아래의 팔뚝에 동그란 표식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제 같은 편인 거 맞죠?”
이연의 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자는 봉 끝으로 표식을 툭 쳤다. 공격을 받은 표식은 잉크가 지워지듯 사라졌다.
“이름이 뭐예요?”
“서영.”
“오……. 성은 뭐예요?”
여자의 얼굴이 한심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서.”
“서서영 씨? 저는 정이연이에요.”
“……지금 날 놀리는 건가?”
“예?”
영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봉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어깨 근육이 꿈틀거리는 걸 보고서야 이연은 그녀가 외자 이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냥 말로 해 주면 되지, 행동 양식이 우리 집 룸메이트랑 똑같네……. 이연은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욕을 작게 내뱉으며 투덜거렸다.
그 후로도 두 사람은 일시 동맹 친목 도모라는 명분으로 소소한 잡담을 나누었다.
“1단이요?”
이연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말로만 들었지, 2단 시험에 참여한 1단과 대화해 보는 것은 이연도 처음이었다. 1단이 초전력에 응시하는 경우는 비율로 따지면 0.1%도 되지 않을 것이다.
영은 무덤덤한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빛이 날카로웠다. 마치 제게 돌아올 무시 담긴 시선을 예상하는 것처럼.
“와……. 영 씨 정말 센가 봐요.”
그래서 이연이 그렇게 말했을 때 영은 조금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얼굴이었다.
“그렇게 말한 건 네가 처음이야.”
“반하지는 마세요.”
“…….”
“……그렇게 정색할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이연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농담 한번 했다고 사람을 벌, 아니, 쓰레기 보듯 하는 건 너무했다.
“헌터 취직 하려고요?”
무궁화 1단의 초전력 응시 목표는 거의 대부분이 등급 재심사다.
고작 계급 하나 차이, 실제로는 초능력의 힘 차이조차 잘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은데도 1단과 2단의 취급은 완전히 달랐다. 당장 헌터 업무를 하거나 변이종 전담 회사를 만드는 자격도 무궁화 2단 이상이지 않은가.
이연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2단 헌터들이 맡는 D급 임무는 사실상 큰 초능력이 필요하지 않다. 지니고 있는 초능력에 따라, 1단 수준이어도 충분히 수행 가능한 정도라는 뜻이다.
사정을 아는 1단들이 나도, 하는 생각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헌터들은 돈 많이 벌잖아.”
“대체적으론 그렇죠.”
헌터로 입사하면 신입 연봉이 파격적으로 높은 수준일 뿐만 아니라, 엔지니어들이 만드는 전투 보조 도구도 일정 부분 지원해 주는 경우가 많았다. 이연이 재정난에 시달리는 것은 연봉을 주는 사람과 도구를 지원해 주는 사람이 본인이기 때문이다. 자영업자의 비애라고나 할까…….
“그럼 영 씨도 상위권을 노리겠네요.”
초능력 심사 결과로 등급 판정이 끝난 1단들이 2단으로 승단하기 위해서는 2단들 사이에서도 충분히 전투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추가적 증명이 필요했다. 그것을 가장 도전하기 쉬운 방법이 초전력이고.
당연히 성적이 탁월하면 탁월할수록 좋았다.
“너도?”
“저는 지인들이 보러 와서요. 이왕이면 활약하고 싶죠.”
일차적인 목표가 같으니 시작이 괜찮았다. 이연이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딜 가는 거지?”
내내 대화하는 중에도 이동은 끊기지 않았다. 주로 이연이 앞장서고 영이 따라가는 식이었다. 이 지형이 처음인 것은 마찬가지일 텐데, 이연은 멈추지 않고 주택가 심층부로 계속 파고들어 갔다.
“아, 제가 그려 온 게 있어서요.”
“그려 온 거?”
“이쯤이면 되려나.”
이연이 멈춰 선 곳은 평범한 골목이었다. 주택의 높은 담벼락이 자연스럽게 만든 거리.
미리 그려 뒀다는 말은 시작하기도 전에 전략이 이미 머릿속으로 짜여 있다는 말이었다. 어떤 맵이든, 어떤 상황이든, 일정한 조건만 있다면 무조건 기동할 수 있는 계획.
몸을 주로 쓰는 영의 전투 스타일은 그 계획에 끼워 넣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제 능력은 그림 실체화예요. 영 씨는 빙결이죠?”
“그림 실체화?”
영이 놀랍다는 듯 되물었다. 일반적으로 많이들 가지는 능력은 아니긴 하다. 이연이 가방에서 빽빽하게 무언가가 그려진 종이를 여러 장 꺼내 들며 웃었다.
“영 씨, 혹시 몰이 같은 거 해 본 적 있어요?”
자박. 조심스러운 발길이 골목을 걸었다. 검은 후드를 입은 남자가 연신 주변을 두리번대며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거리는 조용했지만, 그렇다고 마음을 온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 어디서 사람이 튀어나올지 몰라 긴장한 상체는 잔뜩 굽어 있었다.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남자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잠깐 간을 보는 사이 주변의 참가자들은 죄다 자기들끼리 동맹을 맺었고, 끼고 싶으면 길잡이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좋게 말해서 길잡이지, 그냥 미끼 역할을 하라는 이야기다.
그들은 뒤에서 확실하게 엄호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선택지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당장 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들은 가장 먼저 남자에게 달려들 테니까.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인 헌터인 만큼 남자에게 1인분을 할 자신은 있었지만, 너덧 명을 한 번에 상대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동조하는 척 다른 사람들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그저 꺾인 골목 너머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을 일회용 동료들이 제발 제 몫을 하길 바랄 뿐이었다.
별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불행히도 이 주변에서 싸우는 초능력자는 없는 모양이었다. 사방을 경계하는 사람에게 달려드는 것보다 서로 싸우는 사람들을 옆에서 공격하는 것이 훨씬 쉽다. 운이 지지리도 없었다.
구십 도로 꺾이는 담벼락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고 상황을 살피던 남자는 비어 있는 공간을 보고서야 발을 내딛었다. 이제까지 기이할 정도로 누구와도 마주치지 못했다. 시험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판에 벌써 한 명도 없을 리는 없는데…….
바삭.
“……?”
발밑에서 나는 소리에 남자가 의아하게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운동화를 떼니 동그랗게 뭉쳐진 종이 쓰레기가 버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그가 들어선 담벼락 아래에 그런 종이 쓰레기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에만 집중하느라 근처에 뭐가 있는지는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러나 한번 인식하고 나니 수상쩍기 그지없는 소품이었다.
지형 설정 기능으로 만들어진 공간은 실제 상황과 최대한 비슷한 느낌을 주기 위해 현실성을 고려하긴 하지만, 디테일에 신경 쓰지는 않았다. 일례로 주택가에 있는 주택들 안에는 아무런 가구가 없다. 남의 주택에 무단침입해 가며 싸울 일이 극히 드물뿐더러, 만약 실수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빠르게 나오는 것이 상식이지 않은가.
그런 판인데, 거리에 널린 사소한 쓰레기까지 구현을 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남자가 밟은 종이 쓰레기는 구현된 것이 아니라…….
“혼자 아니죠?”
“헉!”
대뜸 앞에서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란 남자가 팔을 휘저었다. 아무렇게나 내두르는 움직임에 따라 공중에 맺힌 주먹만 한 물방울이 전방에 쏘아졌다. 기세가 제법 매서웠다.
“아, 물 피해서 왔더니 또 물이잖아.”
가벼운 목소리는 투덜거렸지만, 두 사람의 사이에 있던 전봇대에 몸을 잽싸게 숨겨 물줄기 공격에 맞지는 않았다. 두꺼운 엄폐물 옆으로 머리를 빼꼼 내민 목소리의 주인은 푸른 고글을 쓰고 있었다.
“진정해요. 저도 공격 안 하고 있잖아요.”
이연의 말에 남자가 멈칫했다. 짙은 경계가 어린 눈을 안심시키듯 이연이 맹하게 웃어 보였다.
“보아하니 희생양인 것 같은데 설마 본의는 아닐 거고. 복수하고 싶지 않아요?”
남자와 이연은 잠시 말없이 대치했다. 꿀꺽. 남자의 목울대로 침이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