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저런 걸 그릴 줄 안다고?”
산오가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소화기에 파리채. 삐뚤한 선은 여전했지만 평소 그림과 비교하면 천지개벽 수준이었다. 혜강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릴 줄 아는 게 아니라…… 저거 대고 그린 거잖아요. 몰랐어요?”
“뭐?”
“왜 그렇게 놀라요? 이연이 형 평소에도 가방에 저런 거 몇 개 가지고 다닐 텐데. 기억 안 나요? 청호랑 싸울 때 확성기 쓰던 거.”
그렇게 복잡한 걸 이연이 형이 즉석에서 그릴 수 있었겠어요? 미리 그려 둔 거 쓴 거죠. 태연한 덧붙임에 산오의 눈이 어이없다는 듯 가늘어졌다.
“전투 무기를 실체화하는 걸 본 적은 없는데.”
그렇게 사용하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면 훨씬 편하게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 다칠 일도 없었을 텐데, 왜…….
“그런 건 안 그리니까 그렇죠. 하급 변이종 임무에 전투 무기가 왜 필요하겠어요?”
혜강이 음료 빨대를 쪽 빨고는 중얼거렸다.
“솔직히 요즘이 이상한 거예요. 그간 이연이 형이 맡은 임무나 의뢰 중에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심각한 건 거의 없었거든요.”
평소에 이연이 주로 하는 임무는 하급 변이종, 그것도 포획에 관련된 것이었으므로, 대단한 살상 능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시민들이 오가는 거리에서 흉악하게 생긴 무기를 턱턱 꺼내 사용하는 건 부적절하기도 했고.
덕분에 초전력이 아닐 때 이연이 들고 다니는 예비용 그림이라곤 사무실에서 심심풀이로 그린 마이크나 손전등, 두루말이 휴지처럼 전투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도 쓰고 나면 채워 넣는 개념이 아니다 보니 어떤 것은 몇 달 내내 가방 안에 구겨져 있기도 했고, 가방 안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몇 주 동안 지속될 때도 있었다.
“…….”
“안 쓰니까 안 그리는 거죠. 닭 잡는 데에 소 잡는 칼을 준비하지는 않잖아요.”
혜강의 말은 그럴듯했으나, 산오의 찌푸린 인상은 펴지지 않았다.
“그놈은 칼이 아니라 맨손으로 닭을 잡으려 들어.”
안 그래도 번거로운 능력을 쓰는 주제에……. 안전 불감증도 이런 안전 불감증이 없었다.
“그거야 그렇죠. 의뢰 하다 배에 칼 맞은 건 좀 심하긴 해요……. 물론 칼로 찌른 놈이 잘못하긴 했지만, 그래도 평소에도 호신용품 정도는 그려서 가지고 다니라고 해야지.”
조잘거린 혜강이 시험장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이연에게 기세 좋게 달려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아직 메인은 나오지도 않았어요.”
“메인?”
자유로워진 이연이 막 주택가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혜강이 악동처럼 씨익 웃었다. 늘상 무덤덤하던 얼굴에 드문 웃음이었다.
“이연이 형 특기는 백병전이 아니거든요.”
이연이 가볍게 남자 하나를 탈락시키자, 남자의 팔찌에서 낭랑한 안내 음성이 울렸다.
[무궁화 2단 김민호. 표식을 모두 잃어 탈락하셨습니다. 즉시 시험장에서 퇴장하십시오. 지금부터 이탈 외의 모든 행동은 부정행위로 간주하며, 퇴장에 시간이 지체될 경우 강제 연행 될 수 있습니다.]
시험이 시작된 지 1분도 안 되어 벌어진 일이었다. 이연을 향해 달려오던 다른 사람들이 주춤했다. 마저 달려들어야 하는지 마는지에 대해 판단이 서질 않는 듯했다.
솔직히 초능력자를 인상 보고 판단하는 게 말이 되냐? 지들이 점쟁이야, 뭐야? 거기서부터 경험이 없다는 티가 났다.
덕분에 이연이 파리채를 쥐고 느긋하게 움직여도 사람들은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고, 그는 무사히 고수부지를 건너 주택가로 들어설 수 있었다. 조용한 주변과 달리 멀리서는 희미한 타격음 같은 것이 계속 들려왔다. 각지에서 신나게 전투 중인 듯했다.
담벼락을 돌자 시야가 탁 트인 고수부지와 하천이 가려졌다. 저쪽의 시야에서도 이연이 가려졌을 터였다. 눈치를 보아하니 쫓아올 만한 사람도 없는 것 같고. 일단은 한숨 돌렸다.
주택 골목으로 들어와서도 이연은 멈추지 않았다. 주택가에도 분명히 몇 명이 전송되었을 테고, 이연처럼 엄폐물이 많은 곳으로 숨어들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방심할 틈은 없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심층부 쪽으로 슬그머니 걸음을 옮기는데, 건너편에서 골목으로 막 들어온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긴 머리를 질끈 묶고 편한 트레이닝복을 입은 여자. 아까 대기실에서 봤던 그 여자였다.
여자의 손에는 길쭉한 봉이 들려 있었다. 등에 메고 있던 게 저거군. 어두운색의 나무 봉을 쥐는 폼이 자연스러운 걸 보니 기본적인 무술 실력이 있는 듯했다.
‘전투 경험도 좀 있나?’
시선을 떼지 않으며 이연이 가방으로 손을 넣자, 여자 역시 전투태세를 취했다.
여자는 허리를 숙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앞으로 슬라이딩했다.
미끄러지듯이 달려오는 게 아니었다. 여자는 바닥에서 발을 떼지 않았고, 그 상태에서 그대로 빠르게 접근했다. 자세히 보니 여자가 밟는 길의 앞이 새하얗게 얼어붙는 것이 보였다. 빙결 능력이었다.
마찰력을 최소화하고 가속도까지 붙은 속력이 무시무시했다. 여자는 순식간에 이연의 눈앞으로 다가와 봉을 휘둘렀다.
부웅!
잽싸게 허리를 숙인 덕에 아슬아슬하게 궤도를 피한 이연이 그대로 옆으로 굴렀다. 몸이 거칠게 뒤집히면서 가방에 있던 종이가 몇 장 삐져나왔다.
공기를 가르는 바람 소리가 어마어마했다. 이거 맞았으면 멍으로 안 끝났다. 이연의 뒷덜미에서 식은땀이 솟았다. 손목 운동을 하듯 가볍게 봉을 돌린 여자가 다시 자세를 잡는 것이 보였다.
빙결이 유용한 능력이긴 하지만, 그래 봐야 2단 수준이니 세기가 대단치는 않을 것이다. 이연은 여자가 방금 얼렸던 땅이 금세 젖어 들며 녹는 것을 확인했다. 능력을 없애기도 전에 자연적으로 풀려 버리다니. 그렇다면 빙결은 주무기가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가령 지금처럼 이동에만 쓴다든가…….’
여자의 주무기는 아마도 얼음에 미끄러지는 스피드를 이용한 봉 공격. 독립적인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근거리 전투 보조 도구를 허가하는 초전력 규칙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쉽게 말해 얼음은 거들 뿐이고, 봉으로 두들겨 패는 것이 그녀의 스타일이라는 이야기다.
하위급 초능력 싸움은 아이러니하게도 초능력 외의 요소로 결과가 판가름 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초능력만으로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이 몇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마침 나쁘지 않은 능력이다. 이연의 뇌가 빠르게 굴러갔다.
고민은 짧았다.
“타임, 타임!”
이연이 별안간 두 손을 번쩍 들고 외치자 여자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를 향한 경계 태세는 놓치지 않은 채였다.
“뭐지?”
여자가 위협적으로 봉을 내밀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휘두를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도 이연은 느긋하게 웃었다. 어차피 시험은 지금 막 시작했다. 앞으로도 한 시간 이상 버텨야 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지금 하려는 제의가 여자에게도 나쁘지 않은 종류일 터였다.
“우리, 동맹을 맺을까요?”
“몰려다니는군.”
산오의 말에 혜강이 시험장 전체를 둘러보았다. 시험이 시작된 지 10분, 확실히 극초반부에 비해 삼삼오오 모여 있는 인원이 눈에 띄었다. 그래도 이번 시험은 경험자들이 제법 있는 모양이다.
“아, 산오 형은 2단 시험 보는 게 처음이니까 잘 모르겠네요.”
이연의 생각과는 달리, 혜강은 초전력이라는 시스템에 관심이 많았다. 적어도 이연의 시험 영상 외에도 종종 초전력 영상을 찾아 볼 정도는 됐다. 덕분에 2단 시험이 대략적으로 어떤 양상을 보이는지에 대해 빠삭했다.
“5단이야 사람이 적어서 상관없겠지만, 2단은 응시자가 많잖아요. 그래서 초반부에 간을 좀 보다가 실력이 괜찮은 것 같은 사람끼리 동맹을 맺는 게 유리해요.”
당연한 말이지만 한 명보다는 두 명이, 두 명보다는 세 명이 더 생존 확률이 높아진다. 굳이 시험장 안의 모든 사람을 탈락시킬 필요는 없었다. 통계적으로 봤을 때 매 시험의 최종 생존자는 7명 안팎.
최종 생존 그룹을 노리고 동맹을 결성하는 것은 초전력을 한 번이라도 해 봤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첫 번째로 생각하는 방향이다.
그러나 일타 강사 혜강의 설명을 일대일로 수강했음에도 불구하고 산오 학생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말이야 번지르르하지만, 그 동맹이라는 건 한 가지 맹점이 있었다. 개인 서바이벌이 가지는 아주 당연하고도 커다란 구멍.
“중간에 배신하면?”
신뢰.
“그거야, 뭐…….”
혜강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겠어요. 보는 눈 없는 본인을 탓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