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제5구역 시험장의 스탠드는 한산했다.
같은 시간에 치러지는 무궁화 3단의 시험이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제6구역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당연했다. 3단 시험들이 우수수 쏟아지는 가운데 굳이 2단 시험을 구경 올 만한 사람이라면 응시자의 지인 정도였다. 덕분에 혜강과 산오 정도의 얼굴이 등장해도 큰 주목을 받지 않는다는 점은 편했지만.
휑한 계단식 스탠드에 아무렇게나 앉은 두 사람의 시선이 곧바로 향한 곳은 콜로세움처럼 관중석 아래 지대에 위치한 너른 시험장이었다.
시험장은 지형 설정 기능을 이용한 랜덤 지형이 설정된다. 관전자는 물론이고 응시자조차도 시험 직전까지 어떤 곳에서 전투를 하는지 사전 정보가 주어지지 않았다. 모두가 처음 보는 곳에서 전투를 시작하는 것이다. 혜강은 직업병처럼 시험장 내부의 맵을 체크하며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 별로인데.”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하천이었다.
깊이가 제법 되는 것 같은 하천이 시험장의 정중앙에 흐르고 있었고, 그 위에 2차선 다리가 놓여 있었다. 다리가 잇고 있는 너른 고수부지와 그 너머의 주택가. 도시와 시골의 애매한 경계에 있는 지형이다.
혜강의 혼잣말에 산오가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알아챈 혜강이 설명했다.
“이연 형은 그림을 그려야 하잖아요. 종이랑 물이랑은 상극이죠.”
재수 없게 물에 빠져서 종이가 죄다 젖어 버리는 상황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이연은 최대한 주택가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았다. 혜강이 오퍼레이터로 보조하는 상황이었어도 비슷하게 유도했을 것이다. 그래도 이연의 평소 전투 성향을 생각한다면 골목이 오밀조밀하게 나 있는 주택가는 나름대로 이점이 있는 지형이긴 했다.
정시가 가까워질수록 시험장 안에 응시자가 하나둘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텔레포트 능력을 이용한 전송이었다. 혜강이 연신 시험장을 살폈다. 평소와 비슷하게 무덤덤한 표정이었지만, 눈만큼은 기대로 반짝반짝했다.
“어, 형이다.”
혜강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향했다. 가방을 메고 고글을 목에 건 익숙한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거리가 워낙 멀어 마치 조그마한 레고 인형 같기도 했다.
이연이 전송된 곳은 고수부지 근처 길에 놓인 전봇대 옆이었다.
“위치 진짜…….”
혜강이 혀를 찼다. 주변에 몸을 숨길 엄폐물이 하나도 없었다. 이연의 주변을 둘러보자 근처에 전송된 몇몇을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응시자 전송은 일정 거리를 두고 하는 것이 규칙이라 아주 근접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시작하자마자 공격받을 정도는 되는 거리였다.
“뭐, 그래도 초반만 버티면 무난하겠네요.”
혜강의 평에 산오가 눈썹 한쪽을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
“믿음이 강하군.”
“형이 금방 탈락할 것 같아요?”
장난스러운 물음에 산오는 시험장을 다시 바라보았다. 하얗고 마른 몸집은 옆에 선 전봇대보다 약해 보였다.
“그 녀석은 제 능력을 제대로 쓰지도 않아.”
몇 주도 넘게 함께 다녔지만, 이연이 그럴듯하게 초능력을 쓰는 꼴을 본 것은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체력이 좋은 것도 아니고……. 이전 초전력 성적이 좋았다고 해도 쉽게 믿기는 어려웠다.
산오의 말에 혜강이 가볍게 긍정했다.
“이연이 형 능력이 여러모로 써먹기는 좀 별로긴 하죠.”
얼핏 봤을 때 그림 실체화는 전투 능력이 있다고 판단한 게 용하다 싶을 정도로 정적인 능력이었다. 달리면서 쓸 수 있는 기술은 확실히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이연이 형 초전력 성적 좋은 편이에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어떤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기록은 거짓말 안 해요.”
“위치 진짜…….”
멀리 있는 누구와 똑같은 소리를 투덜거린 이연이 팔찌를 착용하고 제 몸에 뜬 표식을 살폈다. 왼쪽 팔뚝, 옆구리 뒤, 오른쪽 발등.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위치였다.
허벅지 안쪽 같은 곳이 괜찮은데. 이연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가방에서 펜을 꺼내 쥐었다. 늘 하던 초전력인데 혜강과 산오가 지켜보고 있다고 하니 이상하게 조금 긴장이 됐다.
이왕이면 지인들에게 잘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은 게 또 사람 욕심 아니겠는가. 이연이 피식 웃으며 긴장을 덜기 위해 가볍게 제자리 뜀뛰기를 했다. 몸에 피가 조금 빠르게 도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지금부터 초능력자 전투 능력 평가 시험 제5구역 오전 2차 시험을 시작합니다.]
방송과 동시에 90:00라고 적힌 팔찌의 패널이 89:59로 바뀌었다.
[모두 바라는 성적이 나길 바랍니다.]
담담한 기원과 함께, 사람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요란한 파괴음이 각지에서 터졌다. 이연은 일단 전봇대 근처에서 움직이지 않고 사람들의 동향을 확인했다.
시험이 시작된 직후에는 다들 주변을 경계하느라 크게 움직이는 사람이 있으면 그쪽으로 시선이 쏠릴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싸우는 틈을 타 움직이는 것이 안전했다.
안타까운 것은 건물 옆이나 벤치 등에 전송된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전봇대 옆은 너무도 휑했다는 점이다.
“아, 진짜 너무하네.”
방송이 나오자마자 이연 쪽으로 쇄도하는 사람만 셋이었다. 몸집도 호리호리하고 적당히 약해 보이겠다, 일단 하나 없애서 점수를 따고 시작할 요량인 것 같았다.
아무리 2단에 불과한 하급 초능력자라고는 해도 하급 변이종을 상대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임기응변의 한계나 신체 능력의 격차, 주변의 시선 같은…….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는 대충 다니던 이연도 초전력에서만큼은 어느 정도 준비를 하고 오곤 했다.
처음부터 눈에 띄는 전략이 좋은 선택은 아니었지만, 이왕 이런 상황이 되었으니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도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게 임팩트를 주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이연은 개중 가장 가까운 사람을 확인했다. 짧게 머리를 자른 남자. 속전속결로 끝내 버릴 셈인지 달려오는 움직임에 거침이 없었다.
강하게 주먹을 쥔 손등에 약한 스파크가 튀는 것이 보였다. 화염? 번개? 아무튼 불꽃 계열이다. 초능력을 추측하는 동시에 뒷걸음질 치며 가방 안에 쌓인 종이를 뒤적이자, 헤집어지는 종이가 바스락대며 조금씩 구겨졌다. 하나, 둘, 셋……. 미리 순서를 외워 둔 페이지를 꺼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연의 눈동자가 재빠르게 굴렀다. 시야에 들어오는 동그란 표식은 두 개였다.
‘어깨 위랑 배꼽 옆. 나머지 하나는 어디 있지?’
남자는 금세 지척까지 파고들어 왔다. 푸른 불꽃이 타닥 소리를 내며 양 주먹을 감싸고 타오르고 있었다. 이 정도면 2단 중에서도 꽤 강한 수준이었다.
달리는 가속도까지 더한 오른쪽 어깨가 뒤로 한껏 당겨졌다. 다부진 주먹이 그대로 이연을 향해 커다란 호선을 그리려는 그 순간.
이연이 속삭였다.
“가까이서 뿌려서 미안합니다.”
종이를 강하게 우그러트리자, 주먹 안에서 무언가 쭈욱 튀어나왔다. 기다란 호스에 붉은 원통형 몸체. 정체를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소화기였다.
자신에게로 정조준된 분사구를 발견한 남자가 일순 멈칫한 찰나, 이연은 호스를 단단히 쥐고 정면에 그대로 분사했다.
치이이이익!
한 호흡보다도 길게 뿜어진 소화제가 하얗게 남자의 상체를 덮었다. 탕! 소화기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할 일을 다한 도구는 곧 수많은 알갱이로 변해 사라졌다.
허우적거리며 시야를 차단한 가스를 걷어 내려는 남자의 앞에서 허리를 숙여 뒤로 돌아간 이연이 마지막 표식 한 개를 확인했다. 오른쪽 날개뼈.
가방에서 새롭게 꺼낸 종이에서 나온 것은 몸통이 짧은 파리채였다.
다들 체력이 약하다고 하면 어련히 다른 신체 능력도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연은 엄밀히 따지면 신체 능력이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동체 시력이나 반사 신경 같은 것은 평균 이상이었다. 단지 근력과 체력이 너무 허접이라 눈에 잘 띄지 않을 뿐이다.
짝!
표식을 없애는 데에는 특별한 괴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제 등짝을 내리치는 가벼운 타격에 남자가 움칠 떨며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순진한 움직임을 보니 전투에 익숙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가느다랗게 뜬 눈은 이물질을 걷어 내느라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마도 첫 초전력. 잘해 봤자 두 번째.
뭐든 간에 알아서 먹잇감을 대령해 주면 이쪽은 고맙지. 이연이 빙긋 웃었다.
짝! 짝!
이연이 하는 준비란 간단했다.
초전력에서 사용할 전략에 필요한 도구를 집에서 미리 그려 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