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사라지고 나서 한동안 소문이 좀 안 좋긴 했거든. 거의 실종 수준의 잠적이기도 했고, 듣기로는 언질받은 사람도 하나도 없었다는 것 같아.”
“죽은 거야?”
“몰라. 아직까지 생사 확인이 안 된 상태라고는 하더라.”
“그렇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야.”
이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지형 설정 기능의 설계도가 존재하질 않는대.”
“……엥?”
혜강의 눈이 커졌다. 전투 구역은 공공사업이었고, 설계도 없이 작업을 승인받는 것은 극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지형 설정 기능은 말도 안 되는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뜬구름 잡는 수준의 구상이었을 테니 승인 없이는 작업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뭐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 그런데 아무도 그 기술의 구조를 모르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해체해서 뜯어볼 수도 없어. 개발자가 사라졌으니 괜히 건드렸다가 고장 나면 고칠 사람이 없잖아. 도시의 내로라하는 엔지니어들도 모조리 수습할 자신이 없다고 분석을 거부했어. 개발자 본인이 남긴 말로는 유지 보수가 필요 없다고 하고, 실제로 고장 난 적도 없긴 하지만…….”
“그건…… 좀 수상하네.”
“아무래도 그렇지?”
이연이 산오를 흘끗 바라보았다. 산오는 마뜩잖은 얼굴로 주변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시험장 전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이었다.
“제산오 말도 틀린 건 아니야. 개발자가 그냥 아무렇지 않게 책임을 내버리고 간 건 사실이긴 해. 정체 모를 수상한 기술인 것도 맞고.”
이연의 눈이 만들어진 시험장을 훑었다. 단단한 벽과 바닥은 오롯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획기적인 기술인 거지. 이게 변이종 대응에 도움이 되는 것도 맞긴 하잖아?”
모두가 제산오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지형 설정 기능 같은 건 쓸모없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와서 없애 봤자 초능력자 전력의 감소만 일어날 뿐이었다.
“어렵네.”
혜강이 으음, 하고 턱을 괴었다. 이연이 빙긋 웃으며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차피 이걸 쓰니 마니 하는 건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써도 된다니까 쓰는 거지.”
[오전 2차 시험의 응시자는 대기실로 와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오전 2차 시험의 응시자는 대기실로 와 주시길 바랍니다.]
“아, 가야겠다.”
복도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안내 방송을 들은 이연이 몸을 돌렸다. 커피 잘 마실게, 하고 손을 흔들고 멀어지는 모습은 평소와 똑같이 느긋한 태도였다.
“이연이 형, 왜 저렇게 변명하지?”
그러나 몇 년 동안 함께 일한 혜강이 보기에는 충분히 이상했다. 의아하게 중얼거리는 말에 산오가 이연의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며 툭 내뱉었다.
“멍청하니까.”
찬바람이 쌩쌩 불 정도로 날카로운 어조였다.
이연이 응시자 대기실로 들어섰을 때에는 이미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었다. 웅성대는 소리가 대기실을 가득 채웠다.
무궁화 2단의 경우 같이 시험을 치는 초능력자의 수는 무려 40명에서 50명 정도. 전투 구역의 널따란 크기를 감안하더라도 인구 밀도가 꽤 높은 편이다. 참고로 3단의 경우에는 한 시험장에 25명가량이, 4단의 경우 10명에서 15명이, 5단은 몇 명이 응시하든 한 시험장에서 본다.
제5구역 오전 2차 시험 총 응시자 수는 43명. 시험장 내의 대기실만 두 개나 되는 만큼 절대로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무궁화 4단 이상처럼 서로 얼굴 정도는 얼추 알 만한 소규모 집단이면 모를까, 2단은 단순히 응시 머릿수만 따져도 7만 명이 넘는다. 10만 위까지 표시되는 랭킹 페이지에 든 사람은 전체 2단의 절반 이하고. 설령 랭킹에 있어도 당연히 하위권이므로 제대로 된 정보가 나와 있지 않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머릿수가 너무 많아 저번 초전력에서 만났던 사람을 다시 만나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늘 새로운 마음으로 초전력에 임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대기실은 북적북적했지만 은근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서먹하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 사람도 몇 있긴 했으나 각자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압도적이었다. 이연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매번 초전력 상위권에 랭크되는 2단 랭커 한둘 외에는 늘 그렇듯 낯선 사람들만 가득했다.
‘응?’
이연의 시선이 구석에 앉은 독특한 복장의 여자를 발견하고 멈췄다. 검은 트레이닝복 세트에 긴 머리를 높게 올려 묶은 여자는 등에 길쭉한 물체를 메고 있었는데, 천으로 감싸여 있어 뭔지는 판별이 불가능했다. 목검인가? 하지만 그것치고도 너무 긴데…….
초능력까지 있는 세상에 새삼스럽긴 하지만, 총기류 및 날붙이는 시험장에 반입 불가였다. 시험 취지에 너무 위배되는 도구이기도 했고……. 초능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 무기는 연습용 무기, 예를 들어 목검 같은 거라면 소지 가능했으나 저 정도로 커다란 무기를 들고 다니는 헌터는 잘 없었다. 보통 헌터들은 자신의 초능력에 자부심이 있어 그것을 갈고닦는 데 주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호기심을 가지고 살펴보기엔 여자의 얼굴이 지나치게 싸늘했다. 그녀를 흘끔대던 이연은 곧 관심을 끄고 아무 데나 앉았다. 친목 다지러 온 것도 아닌데 잡담을 나눠 봐야 뭐 하겠는가.
[15분 후 오전 2차 시험이 시작됩니다. 시험 규칙 안내 책자를 배부하오니 안내 방송과 함께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로봇이 말하는 것 같은 안내 방송이 다시 흘러나왔다. 이연이 대기실 앞에 놓여 있는 책자 하나를 집어 들어 펼쳤다. 초전력 시험은 대부분이 비슷한 규칙이었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 모든 응시자는 팔찌를 하나 받는다. 팔찌에는 착용자의 기본적인 바이오리듬 및 초능력 사용 시의 기력 방출량, 예상 획득 점수, 시험의 남은 시간 등이 표시되며, 착용자의 몸 어딘가에 세 개의 표식을 띄운다. 옷 위로 뜨는 거라 탈의 등의 절차 없이 겉으로 살펴보는 것만으로 모두 확인이 가능하다.
표식은 일정 압력에 의한 공격을 받으면 사라지는데, 보통 박수 소리가 짝 하고 울릴 정도의 세기면 된다. 이 표식이 전부 사라지면 탈락이다.
시험장 내에서는 초능력을 사용한 전투를 모두 용인한다. 응시자들은 아무런 제약 없이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으며, 필요하다면 엔지니어제 보조 도구를 사용하는 것도 허가한다.
순위 산정의 기준은 두 가지였다. 얼마나 많은 표식을 없앴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남았는지. 시험은 한 시간 반 동안 치러지며, 끝날 때까지 살아 있다면 생존 가산점이 주어진다. 단, 시험이 끝날 때까지 표식 처치점을 하나도 획득하지 못하면 0점 처리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규칙.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치명상 및 영구 손상, 혹은 그에 준하는 부상을 입혀서는 안 된다. 사고가 발생할 경우 당사자는 시험장에서 즉시 퇴장 조치 하며, 고의성을 엄중하게 따져 징계 위원회에 회부된다.
‘2단 정도의 초능력으론 그렇게 큰 상처를 입히기도 힘들지만.’
시험에 살상 무기 소지가 금지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변이종이면 모를까, 인간 상대로는 오히려 2단짜리 초능력보다 그런 게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이연은 책자를 덮고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이전 초전력과 비슷한 규칙이다.
이전의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생존 가산점을 얻는다면 표식을 몇 개 따지 않아도 무난하게 중위권 내에 들었다. 최하급 헌터라고 불리는 2단은 무시받는 만큼 인정 욕구가 강한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욕심을 부리다 자멸하는 속도 역시 빨랐다. 바닥이 무시무시하게 넓은 피라미드형 점수 분포는 2단 초전력의 특징 중 하나였다.
인원수가 많으니 초반이 힘들긴 하지만, 그래 봬도 이연은 베테랑 헌터였다. 그가 자부하기로 같은 등급 내에서 이연만큼의 전투 경험을 가진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다들 집합하세요. 시험장 입장하겠습니다. 전송 후 방송이 있을 때까지 이동하지 말고 대기하세요. 지시를 어길 시 페널티가 부여될 수 있습니다.]
이연이 방송에 따라 대기실 앞쪽으로 움직였다. 텔레포트 능력자 두 명이 팔찌 더미를 들고 줄의 맨 앞에 서 있었다. 시험장 내부의 무작위 위치로 응시자들을 전송하는 역할을 하는 도우미들이었다.
사람이 많으니 전송하는 시간도 한참이었다. 거의 줄의 끝에 있던 이연이 드디어 단정한 인상의 초능력자 앞에 서자, 텔레포트 능력자가 팔찌를 건네고는 손을 잡으며 간단한 인사를 했다. 단시간에 능력을 많이 써 지쳤을 텐데도 가볍게 웃는 얼굴은 친절했다.
“힘내세요.”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자마자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텔레포트를 할 때 일순간 생기는 무중력은 언제 겪어도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