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05. 비장의 한 수는 사용한 순간 자격 박탈
달이 휘영청한 밤하늘에 유난히 환한 별 몇 개만 고개를 내밀고 지상을 보고 있는 밤.
대부분 장사를 마감한 상가로 가득한 인근은 고요했고, 오가는 사람조차 없었다. 땅마저도 잠이 든 것 같은 평화와 정적이 거리 구석구석 내려앉아 있었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침묵을 깬 건 다급한 발소리였다.
타다닥. 작은 소리였지만 주변이 워낙 조용했던 터라 마치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좁은 골목에서 울려 퍼진 달음박질을 따라가면 다소 희귀한 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림자는 두 개였다. 선두를 달리고 있는 조그마한 것과 그 뒤를 맹렬하게 쫓는 푸른 고글의 남자.
선두의 생물은 몸체가 형광색으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생물의 정체는 정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려웠으나, 귀가 길고 꼬리가 뭉툭한 짐승 같은 생김새가 토끼와 비슷해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일반적인 토끼는 몸이 빛나지 않는다.
“진짜, 더럽게 빠르네……!”
- 조금만 더 뛰면 돼. 다음 코너에서 왼쪽으로 돌아서 오른쪽으로.
헐떡이며 짜증을 낸 이연이 속도를 높였다. 통이 넓은 소매가 세차게 펄럭였다. 이미 등과 목에 땀이 흥건했지만, 이제 와서 놓칠 수는 없었다.
8급 변이종 옥토끼는 어둠 속에서 빛이 나기 때문에 낮보다 밤에 잡는 것이 훨씬 쉬웠다. 졸음을 참아 가며 밤마다 수색을 돈 것도 벌써 나흘째, 드디어 귀한 얼굴을 발견한 참이다.
이연의 앞에서 날쌔게 뛰어가는 옥토끼는 겨우 사람 머리통만 했다. 추격전을 한 지 꽤 되었는데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여기서 놓치면 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
안 그래도 수면 부족 때문에 날이 갈수록 안색이 퀭해지는 판인데, 올빼미 생활을 며칠이나 더 늘릴 수는 없었다. 그냥 내일 쉬자. 이연은 체력 밑바닥까지 모조리 쥐어짜 냈다. 조금만 더, 조금만…….
- 고생했어.
고글 너머의 혜강이 그렇게 말한 순간, 힘이 탁 풀렸다. 휘청거리며 주저앉아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엎드린 이연이 숨넘어가기 직전의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진짜 거짓말 안 하고 딱 죽을 것 같았다. 어린 시절의 건강함이 이렇게 간절한 적이 없었는데…….
종이인형처럼 엎어지는 이연의 앞으로 옥토끼는 여전히 달려 나갔지만, 여기서부터는 이연의 소관이 아니었다. 외길을 달리는 옥토끼의 앞에 누군가가 턱 버티고 서 있었다.
“체력이 늘질 않는군.”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린 남자가 손을 휘두르자, 땅에서 솟아오르는 덩굴 같은 철사가 옥토끼의 몸을 죄었다. 옥토끼는 몇 번인가 반항하기 위해 몸을 비틀었지만, 단단한 금속을 이길 수는 없었다. 빛나는 야광 생물은 결국 포기하고 축 늘어졌다.
산오는 묶인 옥토끼를 지나쳐 엎어진 이연에게로 다가갔다. 커다란 몸집의 남자가 바로 앞에 서자, 이연의 몸이 그림자에 뒤덮였다.
- 형, 괜찮아?
“헉, 내가, 다시는, 옥토끼 같은 거…….”
고개 숙인 채로 중얼거리는 말에는 바람 소리가 절반 이상이었다. 혀를 찬 산오가 이연의 팔뚝을 잡아 들었다. 가벼운 손짓이었는데도 무 뽑히는 것처럼 단번에 일으켜 세워졌다. 늘씬한 몸은 조금 휘청이다 산오의 어깨에 머리를 갖다 박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동안 정연은 어떻게 한 거지?”
그렇게 묻는 산오의 얼굴은 진심으로 궁금한 기색이었다.
최상위 헌터인 제산오는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겠지만, D급 변이종 전담 회사의 분기 임무는 늘 이런 식이었다. 특별한 전투 능력이 없는 하급 변이종 포획은 사실 길고양이 잡기나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아니다, 고양이보다는 조금 더 위협적인…… 고라니 정도?
소형 변이종이 대다수인 하급 변이종 특성상 잡는 것보다는 발견하는 게 관건이었다. 그렇다 보니 초능력보다는 다른 능력을 쓸 일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를테면 체력과 지구력, 몰이 실력, 혜강이의 정보력, 뭐 이런 거…….
아무튼 그래서, 그동안은 그림을 잘 그리지 않아도 괜찮았다. 엉성한 작업물로도 그럭저럭 어떻게든 된 덕이다. 그림으로 감당하지 못할 만큼 복잡한 실체화를 구현해야 할 일은 거의 없었다.
원래도 그런 판인데 산오가 차금에 들어온 후부터는 더 심해졌다. 최근 이연은 초능력을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다고 봐도 무방했다. 도망치는 변이종을 찾아 뛰어서 산오의 영역 내로만 몰아넣으면 그 후로는 식은 죽 먹기였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느라 도중에 멈춰서서 어벙거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효율이었다.
“아니, 잠깐만.”
이연이 퍼뜩 산오를 바라보았다.
“내가 뛸 필요 없이, 그냥 네가 나 있는 곳으로 오면 되는 거 아니야?”
산오라면 이연이 뛰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빠르게 땅을 타고 움직일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연이 평소 혜강과 둘이 임무 하던 것보다 움직이는 게 훨씬 적어야 하는데, 산오와 함께 임무를 다니면서 오히려 운동량이 늘었다.
방금도 옥토끼를 발견한 건 이연이 먼저긴 했지만, 그가 발견하자마자 산오가 이쪽으로 왔으면 되는 거 아닌가. 왜 내가 제산오 있는 곳까지 죽어라 몰아넣었어야 했던 거지? 뒤늦게 거대한 진실을 깨닫고 혼란에 가득 찬 시선이 산오를 향하자,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넌 운동이 필요해.”
“너 무슨 운동하고 원수졌어? 이혜강, 너라도 효율적으로 지시를 내려 줬어야지!”
- 아, 뭐……. 형이 평소에 안 움직이긴 하니까.
“야! 그게 네가 할 말이냐!”
하루 종일 컴퓨터만 들여다보는 너보다는 현장직인 내가 더 낫다며 이연이 방방 날뛰었다. 언제 나 빼고 둘이 편을 먹은 거냐는 배신감 가득 찬 시선으로 째려봤지만 산오에게 먹힐 리가 없었다.
“혼자서 임무 수행이 가능하긴 한 건가.”
“제산오 씨, 자기 할 말만 하시나요? 내 말은 안 들리시나요?”
“그따위 초능력이나 고르고.”
심술궂은 눈동자를 마주한 이연이 움찔했다.
“……고르긴 무슨, 초능력을 내가 어떻게 골라.”
“그림도 못 그리면서.”
“너 자꾸 나 기죽일래?”
이연은 산오의 감독하에 종종 그림 연습을 했지만 아직까지 유의미한 성과는 내지 못했다. 근본적인 재능도 없긴 했으나, 이연의 태도에 열의가 없는 탓이 더 컸다. 원래 못하면 흥미 생기기도 어렵다.
- 자자, 일단 오늘 임무는 끝났으니까 다들 해산. 옥토끼는 내일 초관청에 내러 가는 걸로.
상황을 중재한 것은 혜강이었다. 요 며칠 내내 심야 작업 하느라 게임 접속도 제대로 못 했다며 근황을 조잘거린 혜강은 빠르게 인사하고 통신을 끊었다. 조용해진 고글을 목으로 끌어 내린 이연이 기지개를 켰다.
“피곤해 죽겠네. 빨리 가서 자자.”
산오는 여전히 마뜩잖은 얼굴이었지만, 순순히 걸음을 뗐다.
“씻고 자라.”
“왜 그런 오해할 말을 하지? 원래 씻고 자거든? 나 청결하거든?”
*
다음 날, 초능력 관리청에 들러 옥토끼를 내고 사무실에 출근하니 평소보다 늦은 시간이었다. 미리 와 있던 혜강이 산오와 함께 들어서는 이연에게 우편물을 흔들어 보였다.
“형, 우편 왔어.”
“무슨 우편?”
“여기.”
이연은 온몸을 강타한 근육통을 이기지 못하고 흐늘흐늘 소파에 드러누워 내용물을 확인했다. 초능력자 전투 능력 평가 시험 안내서. 발신인은 초능력 관리청이었다.
“초전력 안내서네.”
“시간 참 빨라.”
초능력자 전투 능력 평가 시험. 줄여서 초전력은 반년에 한 번씩 진행하는 초능력 관리청 관할의 대형 행사였다.
초전력의 내용은 간단하다면 간단했다. 초능력 응용력을 기르고 전투 경험을 쌓게 한다는 취지로, 헌터 임무를 수행하는 초능력자들을 대상으로 모의 전투를 시행하는 것이다.
시험에서 두각을 나타낼 경우 초능력자 등급 재심사 등의 메리트가 있는 건 물론이고, 시험 영상은 소속 회사로 전달되어 고과에 반영되기 때문에 헌터들도 자발적으로 많이 참가하는 분위기였다. 또한, 변이종 전담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헌터들의 최소 참가 비율이 회사마다 일정 수치를 넘어야 하므로 회사에서도 참가를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험 응시자의 대부분이 2단 이상의 초능력자였다.
헌터 시험이 아니라 초능력자 시험인 만큼 1단이 참여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사실상 무의미하기는 했다. 참가해 봤자 활약할 수가 없으니 이득도 없을뿐더러, 어쨌든 몸을 움직이는 모의 전투 형식이다 보니 부상 위험까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1단은 어쩌다 참여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제대로 그룹을 짤 수 없을 정도로 적은 수라, 2단과 함께 섞여 시험을 치르곤 했다. 이래저래 불공평한 등급이 아닐 수 없다.
차금의 초능력자는 총 세 명. 그중 산오는 정식 소속이 아니니 참가하든 말든 회사와 별 상관이 없었고, 혜강은 전투 인원이 아니니 제외되었다. 남는 건 이연 하나.
참가율 0%를 만들 수는 없으니 사실상 선택지가 없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