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병원은.”
요즘 이연만 봤다 하면 어김없이 저 소리였다.
“이제 진짜 안 와도 된대.”
자신만만한 이연의 선언에 산오가 슥 다가왔다. 훌쩍 다가온 몸이 너무 가까워 이연이 움찔한 찰나 커다란 손이 그의 상의를 훌렁 들어 올렸다. 서늘한 공기에 맨살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야, 뭐 하는……!”
“조금 좋아졌네.”
상대가 기겁하든 말든 상처 부분만 꼼꼼히 확인한 산오가 손을 놓았다.
“조금이라니? 완전 완치거든?”
이연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같은 의미의 단어를 두 번이나 사용하며 소파에 파묻히듯 털썩 주저앉았다. 난데없이 바쁜 척 휴대폰을 꺼내 이리저리 터치하는 이마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오늘은 안 나가는군.”
산오가 놀리듯이 물었다. 그때까지도 시선을 피하며 휴대폰을 열심히 만지작대던 이연이 투덜거렸다.
“됐어. 이제 그냥 집에 있으려고.”
“뭉치 산책은.”
“산책의 시옷도 꺼내지 마.”
격렬한 질색에 산오가 눈썹 한쪽을 삐죽 들어 올리다 말았다. 이연은 잠시간 얌전하게 있는 듯했으나, 이내 투정 부리듯 중얼거렸다.
“넌 취미 있냐?”
결국 제산오에게까지 물어보다니, 짧은 인맥의 한계다. 시비를 거는 것 같은 말투에도 웬일로 산오는 얌전했다.
“왜.”
“취미가 만들고 싶어서.”
하도 여러 사람한테 설명하고 다녔더니 길게 말하는 것도 귀찮았다. 산오의 취미라면 소시민은 감히 흉내도 못 낼 가능성이 높았고. 철 뽑아다가 축소 에펠탑 만들기 이런 거면 어떡해. 기대도 엄두도 안 났다.
“좋아하는 건 찾았고?”
“……어?”
“취미가 그런 거잖아.”
산오가 몸을 조금 일으켜 세웠다. 소파 가죽이 약하게 눌리며 상체가 반듯하게 앉았다.
“네가 좋아하는 게 뭔데.”
그런 거 하나 없냐고 말하는 것 같은 건방진 얼굴에 대고 이연은 아무렇게나 지껄일 수 있었다. 적당히 대답해서 상황을 모면할 수도 있었지만.
“없어.”
결국 나온 것은 시무룩한 대답이었다.
“다들 좋아하는 게 있던데, 나는 없더라고.”
성격이 어떻든, 사정이 어떻든, 모두가 좋아하는 게 있었다. 취미 같은 게 없는 사람은 세상에 이연 혼자뿐인 것 같았다.
“내가 이상한 건가 봐.”
그런 기분이 폐 안쪽에 스밀 때면, 이연은 괜히 호흡을 들이켜곤 했다. 그러나 아무리 숨을 마셔 봤자 차오르는 건 없었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는 공간인 것처럼.
“청승이군.”
우울한 정수리에 낮은 음성이 닿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거만하고 재수 없는 톤이었다.
“그런 게 없는 사람은 없어.”
그런데 정말 묘한 일이다. 그 한결같은 목소리를 듣는 것이.
“이제부터 찾아도 안 늦어.”
이상하게 위안이 됐다.
기운을 얻은 이연이 활기차게 물었다.
“뭐부터 하면 좋을까?”
“그림.”
산오의 대답은 미리 정해 두기라도 한 것처럼 단호했다.
“그림 실력이 그따위인 이상 네 능력은 글렀다.”
취미 찾으라더니 자기 계발을 추천하고 앉았다.
“……그건 좋아하는 게 아니잖아.”
“어차피 아직 못 찾았잖아.”
“…….”
“하다 보면 그게 취미가 될지도 모르지.”
이 자식……. 이게 목적이었나? 이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미심쩍어하는 사이 이연의 가방까지 거실에 소환한 산오가 주문했다.
“가장 자신 있는 걸 그려 봐.”
펜을 쥔 이연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사실 전투에 쓰지는 않지만, 낙서로 자주 그리는 게 있거든. 예전에 나 어릴 때 자주 먹었던 사탕에 있던 마스코트 캐릭터인데…….”
이연이 A4용지에 작화를 시작했다. 꽤 자주 그려 본 건지 손길이 거침없었다.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눈 두 개, 활짝 웃는 입, 관자놀이에 붙어 있는 귀 같은 세모 도형과, 위에 쓴 왕관 같은 것. 자주 그린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확실히 평소 이연이 그리던 바들바들한 선보다는 힘이 있었으나…… 점점 기묘해지는 산오의 얼굴을 눈치채지 못한 이연이 손을 탁탁 털고 펜을 내려놓았다.
두 손을 종이에 갖다 대자, 펜 선에서 가볍게 빛이 나며 종이에 그린 모양 그대로 생긴 생명체가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머리통만 한 캐릭터는 이연의 주변을 돌아다니며 존재감을 과시했는데, 해맑은 얼굴은 너무 멍청해 보이는 나머지 사람의 화를 건드리는 부분이 있었다.
식탁 아래에 드러누워 있던 뭉치가 풍선 같은 캐릭터를 발견하고 신나게 달려왔다. 둥실둥실 떠다니는 마스코트 캐릭터를 잡기 위해 펄쩍펄쩍 뛰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웬 괴생명체를 창조한 이연이 뭘 잘했다고 자신 있는 표정으로 산오를 돌아보았다. 반응을 갈구하는 눈에 산오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그게 뭐지?”
“……고양이?”
등급위원회의 판단 능력은 정확했다. 2단은 2단인 이유가 있다.
산오는 방법을 바꾸었다. 자유 주제는 이연에게 너무 일렀다.
“축구공 그려 봐.”
“참나……. 알았어.”
귀엽지 않나? 입을 삐죽인 이연이 휴대폰으로 검색한 축구공 이미지를 보고 더듬더듬 그리기 시작했다. 손길이 제법 신중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빈 종이가 가득 찼다.
“다 됐다.”
뿌듯하게 중얼거림과 함께 이연이 허리를 폈다. 그새 휴대폰으로 딴짓하던 산오가 이연의 말에 시선을 돌렸다. 이연의 그림을 확인한 산오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날 놀리는 건가?”
그렇게 말하는 얼굴에는 놀라운 빛이 만연했다.
이연이 잔뜩 끄적댄 하얀 종이에는 삐뚜름한 동그라미와 바들바들 떨리는 선이 이어지지도 못하고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축구공을 그렸다고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는 그림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철 수세미였다.
“괜찮지 않아?”
산오가 너는 눈이 어디 달렸냐는 표정으로 이연을 꼬나보았다. 엄격한 표정에 이연이 시무룩하게 그림을 확인했다. 역작이었는데.
“구르긴 하고?”
이연이 철 수세미를 실체화했다. 어지럽게 엉킨 선이 퉁퉁 튕겨 나오는 것까지는 성공하였으나, 바들대던 철 수세미는 이내 축 늘어졌다. 바닥을 나뒹구는 철 수세미에게 두 쌍의 시선이 모였다.
“…….”
“아니, 축구공은 처음 그려 봐서…….”
이연이 머쓱하게 중얼거렸다. 산오는 축구공이 뭔지 전혀 모르는 듯한 룸메이트를 쳐다보다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광석신의 자비 덕에 가엾은 철수세미는 자연으로 회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파트너가 이 정도로 미적 감각이 바닥인 무능력자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던 산오는 멍청하게 웃는 얼굴을 노려보며 다시 종이를 가리켰다.
“헬리콥터.”
주전자가 나왔다.
“패러글라이더.”
사각형 가족이 나왔다.
“열기구.”
조개 달린 화살표가 나왔다.
이제 시킬 것도 없었다. 일부러 이렇게 그리려고 해도 못 그릴 것 같은 수준이다. 산오가 드디어 이연의 실력을 인정하며 못마땅한 눈으로 난장판이 된 거실을 노려보았다.
이연의 주변에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마스코트 캐릭터가 뭉치를 피해 날아다니고, 바닥에는 주문할 때마다 허접한 무언가들이 추가되어 뒹굴었다. 실체화된 것들은 전부 쿠션처럼 폭신해 쓸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중에서 그를 가장 열받게 하는 것은 그림을 그리고 나서 자랑스럽게 망한 결과물을 보여 주는 이연의 얼굴이었다.
산오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펑! 거실 바닥에서 튀어나온 철 가시가 순식간에 마스코트를 꿰뚫었다. 풍선 터지듯 박살 나서 조각조각 떨어지는 마스코트였던 것을 이연과 뭉치가 충격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렇게 귀엽게 생긴 애를……. 역시 제산오. 손속이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잘도 이런 걸로 살아왔군.”
“아니, 뭐…….”
진심으로 의문을 가지는 산오의 시선을 피하며 이연이 말끝을 흐렸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거실 창문 사이로 노을빛이 비쳐 들어 와글와글해진 집 안이 붉게 빛났다. 소파에 뚱하게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산오는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연의 창조물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드디어 펜을 손에서 놓은 이연이 소파에 앉자, 산오의 시선이 뺨에 흘끗 붙었다 떨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제산오와 이러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웃음이 나왔다. 사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넌 취미 없어?”
“난 그런 거 필요 없어.”
이연이 그를 돌아보았다. 노을을 받아 노란빛이 나는 눈동자에 웃는 얼굴이 넘치게 담겼다.
“나중에 나한테 취미가 생기면.”
“…….”
“같이 해 줘.”
피차 취미 없는 사이에 상부상조하자고. 장난스레 속삭인 말은 이연이 하는 대부분의 말처럼 논리라곤 없었지만, 개중에 가장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희미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린 입술이 대답했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