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이연이 어설프게 시야를 움직여 필드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그가 있는 초보자 필드에는 다른 캐릭터도 몇 명 있었지만, 이연이 노리던 몬스터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범인이 가문의영광굴비와 같은 직업인 마법사인 듯했다.
[일반]가문의영광굴비: 누구세요?
채팅을 쳐 봤으나 답변이 없었다. 이연이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그 후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침묵의 대접전이 벌어졌다. 하다 보니 오기가 생겨 옆의 혜강에게는 말하지도 않았다.
몸만 틀어 놓고 반대편에 있는 몬스터를 타겟팅하기도 하고, 캐스팅하는 척하다가 타겟팅을 재빨리 바꾸기도 하고, 룰렛 돌리듯이 연속으로 여러 마리를 타겟팅하기도 하면서 의도치 않게 이연의 게임 컨트롤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상대가 잠깐 방심한 틈을 타, 드디어 가문의영광굴비가 리프 한 마리를 죽이는 데에 성공했다.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창이 떴다.
“와.”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기쁜 건지 모르겠다. 묘한 성취감에 이연이 벅차오르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자 혜강이 옆을 돌아보았다.
“왜 그래? 어, 아직 레벨 4야?”
“많은 일이 있었어.”
“응?”
어리둥절해하는 혜강에게 이제까지의 대모험을 읊어 주자, 혜강이 알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뉴비 농락하는 새끼가 아직도 있어?”
“뉴비?”
“형 같은 초보들 말하는 거야. 잠시만.”
잠시 후, 가문의영광굴비 옆으로 휘황찬란한 옷을 걸친 캐릭터가 다가왔다.
“제아?”
“나야.”
머리 위에 ‘제아’라는 닉네임이 떠 있는 늘씬한 여성 캐릭터는 반짝반짝 윤기가 흐르는 비단옷을 걸치고 뒤에는 커다란 대검을 지고 있었다. 허름하고 칙칙한 초록색 천을 대충 두르고 있는 가문의영광굴비와는 종족이 달라 보일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뭐야? 나도 저런 옷 입고 싶어.”
“이거 다 돈이야.”
“비싸?”
“응.”
그렇다면 뭐……. 이연이 빠르게 포기하자, 혜강이 설명해 주었다.
“가끔 형이 당한 것처럼 초보들 놀리는 사람 있어. 보통 장난으로 그러는데, 어디…… 어?”
필드 유저 정보 창을 연 혜강의 말이 뚝 끊겼다. 조금 당황한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곽철식이네?”
“아는 사람이야?”
“아니, 어……. 안다면 아는 사람이긴 해. 곽철식이라고 성격 나쁜 양아치로 유명한데, 서버 랭킹 최상위권이라 웬만하면 못 건드려. 온 장비에 다 돈을 처발라서 스펙도 좋거든. 여기, 보이지?”
혜강이 손가락을 짚은 곳에는 ‘곽철식’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이상하네, 여기 있는 만렙이라곤 저놈뿐인데 이런 데에서 노닥거리는 인간은 아니라…….”
“그래? 심심했나?”
게임 생태를 잘 모르는 이연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혜강이 카메라 시점을 휙휙 돌리다 멈추었다.
“여기 있네, 곽철식.”
게임 화면에 기다란 지팡이를 쥐고 검은색과 붉은색이 섞인 천 옷을 걸친 캐릭터가 나무 뒤에 교묘하게 숨어 있었다. 머리 위에 곽철식이라는 글씨가 얼핏 보였다.
“이런 곳에 있었구나…….”
못 찾은 이유가 있었다. 이연이 곽철식의 캐릭터를 보려고 고개를 기웃거리는 동안 혜강이 제아를 조작했다. 제아는 짧게 움직이나 싶더니 난데없이 맹렬하게 돌진했다.
대검으로 후려친 것은 곽철식의 머리통이었다.
“뭐, 뭐 해?”
물 흐르듯 난타가 이어졌다. 순식간에 나무 밖으로 튕겨 나간 곽철식이 넘어지고 닉네임 아래에 있는 초록색 바가 미친 듯이 짧아지기 시작했다.
“이게 어디서 우리 소중한 뉴비를 건드려?”
가만 보니 혜강의 얼굴이 살벌했다. 아니, 깔짝거리긴 했지만 그 사람이 날 죽인 것도 아닌데……. 이연이 놀라서 그를 말렸다.
“왜 그래? 그 사람 세다며?”
“나도 세. 월급 존나 꼴아박았어.”
자랑이다.
“어디 재벌인지 강화 속도를 도저히 못 따라가서 스펙 차이가 좀 있긴 한데…….”
삐딱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린 혜강이 손가락을 움직이자 제아의 움직임이 한층 더 현란해졌다.
“이 정도야 손으로 커버되지.”
뭔지는 모르지만 멋있었다.
경직된 상태로 공격을 계속 맞던 곽철식은 단거리 순간 이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제아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이어 곽철식이 쥐고 있던 커다란 지팡이에서 붉은빛이 돌기 시작하더니, 레이저가 연달아 쏘아져 나왔다. 강력한 공격이었는지 제아의 체력이 크게 닳았다.
“이렇게 싸워도 괜찮은 거야?”
“어차피 저기 길드랑 우리 길드랑 사이 안 좋거든. 얼마 전에 저 새끼들이 우리 엿 먹인 거 생각하면 잘됐어.”
게임에서도 엄청 치고받고 싸우는구나. 어느새 두 손까지 놓고 구경하던 이연은 맵 멀리서 누군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가문의영광굴비보다는 제아나 곽철식에 가까운 차림새였다.
아니나 다를까, 새로운 캐릭터가 냅다 들이받은 것은 제아였다.
“아니, 이 새끼들이!”
혜강이 버럭 소리 지르며 타자를 다다다 쳤다. 이렇게 격렬하게 화내는 혜강은 처음 본 이연이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거친 타자 소리는 지원 요청이었는지 곧 몇 명이 필드에 또 나타났다. 거기에 대항하듯 곽철식의 길드원도 필드에 등장하고, 제아의 길드원이 추가로 더 등장하고…….
정신 차리고 보니 상황은 대규모 패싸움으로 번져 있었다.
“어…….”
가문의영광굴비는 고작 레벨 4였으나, 튜토리얼을 끝내지 않은 탓에 다른 플레이어를 공격할 수 있는 PvP 기능이 활성화되지 않아 난데없이 벌어진 전쟁통에서도 혼자 멀뚱히 서 있을 수 있었다. 주변이 번쩍번쩍하는 스킬 이펙트로 가득 찼고, 누가 누군지도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는 늘 그렇듯 채팅 어그로도 성행한다.
[일반]두두리: 그나이처먹고 뉴비나 공격하고 부끄럽지도 않냐 철식아 ㅋㅋ
[일반]시크릿주댕: 저기요 남의 일에 왤케 신경이세요 ㅋ 그따위 랭으로 오만가지에 다 머리 들이밀구 넌 욜로하면 잘맞겟다 ㅎㅎ
[일반]pomo: 주댕님은 템이 그모양인데 손이 븅1신이라 주댕이만 털잔아요 ㅎㅎ
[일반]시크릿주댕: 퍼클 못해본 새1끼는 빠져
[일반]소르베: 그놈의 퍼클부심 지겹다지겨와 ㅠㅠ 템으로 밀어먹은 퍼클이 머가 자랑스럽다구
[일반]제주홍돼지: 꼬우면 너네도 퍼클해 ㅎㅎ 아 돈없어서 못하나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한 마디씩만 해도 채팅이 금방금방 올라갔다. 게임하려면 욕도 잘해야 되나 보다……. 갈등의 근원인 뉴페이스가 이상한 편견을 배우고 있는 줄도 모르고 두 길드는 박 터지게 싸웠다.
십 분이 지나도 상황은 진정될 기미는커녕 더 과열되어만 갔다.
[일반]소르베: 저희 뉴비한테 먼저 선빵갈겨놓고 왜 지랄이신지 ㅋㅋ 양아치들 격이 다르네
[일반]제아: 내 작고 귀여운 뉴비한테 왜 ㅈ1랄이세요 ㅠ
이혜강……. 말투가 제법 인터넷 불량배 같았다.
[일반]제주홍돼지: 대체 누가 뭘 쳤다는거야 ㅅㅂ 걍 솔직하게 싸우고싶었다고 말해
[일반]두두리: 뭔솔임 댁네 철식이한테 물어보세요
그때, 처음으로 곽철식의 채팅이 올라왔다.
[일반]곽철식: 건드렸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일반]곽철식: 왤케 ㅈ1랄들인지
곽철식…….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근데 왜 아까 내가 물을 때는 가만 있었던 거지? 이연이 뒤늦게 억울함에 가득 찼다.
[일반]시크릿주댕: ㅋㅋㅋㅋ 들었냐? 다들 대가리 숙이고 사과해라
[일반]시크릿주댕: 생사람 지렸죠
[일반]제아: ㅋㅋㅋ???? 저 말을 믿어? 사기 조심하세요
[일반]곽철식: 굴비님아
[일반]곽철식: 님이 말해보셈
[일반]곽철식: 제가 님 때림? 아니 근처에라도 갔음?
곽철식의 지목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이 자식이 질문을 교묘하게……. 형, 그냥 무시해도 돼. 괜히 꼬투리 잡아서 싸우려는 거야.”
“싸움? 이 사람 지금 나한테 싸움 건 거야?”
“비슷해.”
혜강의 말에 이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자를 치는 손놀림이 차분했다. 잠시 후, 필드 한복판에 덩그러니 서 있던 가문의영광굴비의 채팅이 올라왔다.
[일반]가문의영광굴비: 레벨 4랑 몹 잡기 하다가 져놓고 언제까지 만렙 올려치기 할건지 ㅎㅎ
[일반]곽철식: ?
[일반]곽철식: 지금 뭐라 한?
[일반]가문의영광굴비: 척봐도 찌끄레기가 열폭지리죠?
[일반]곽철식: 미1친놈인가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