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남자 얼굴이 다 똑같지.”
“아니, 묘하게 진 국장님하고 비슷……”
D.S가 고개를 휙 들었다. 동태 눈깔 같은 눈빛이 지긋하게 이연을 압박했다. 더 이상 나불대지 말라는 의사 표시였다.
그러나 제산오와 함께 살며 담력이 높아진 이연의 입은 만만하지 않았다.
“왜요, 뭔데요?”
D.S는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최대한 시간을 끌었지만, 영원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녀는 영 내키지 않는 얼굴로 실토했다.
“화가 많았던 시절에 만든 거야.”
다소 수상한 발언이었다.
“……뭐 하려고요?”
“뭐, 이런저런 상황을 대비해서…….”
“뭔 상황이요? 국장님 죽이는 상황?”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그냥 가벼운 실종 정도로 생각했어.”
뭐가 다른 건데?
“지금은 포기했으니까 신경 꺼.”
“포기라는 표현이 되게 불길하게 들리는 거 알아요?”
“왜,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공범 되고 싶어?”
“취미나 마저 하죠.”
이연이 잽싸게 화제를 돌렸다. D.S는 그제야 작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D.S의 취미 시간은 무난했다. 앞선 취미 체험 시간들과 비교해 봐도 압도적으로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그렇게 완성된 기계는 겉으로 보기에 이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지만, D.S가 만들었으니 성능은 의심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그러나 이 취미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한다는 거였다.
D.S의 옆에서 이연이 한 것이라곤 달라는 대로 각종 공구들과 부품들을 건네준 것뿐이다. 사실상 이연이 하나 FT-0이 하나 큰 차이 없는 활동이었다.
“이 녀석은 FT-4야.”
“4? 1에서 3도 있는 거예요?”
“걔네는 따로 주인이 있어.”
큰 도움은 안 됐지만 기계 조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다 보니 뭔지 모를 정이 붙었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검은색 로봇청소기였던 것을 바라보는데, D.S가 불쑥 말했다.
“너 가져.”
“예?”
이연이 오늘 만든 결과물을 내려다보았다. 물론 엄청나게 좋은 거겠지만, FT-0의 만행을 조금 전에 직접 겪어 보지 않았는가. 같은 시리즈의 기계가 수상하게 보이는 것이 이연의 탓은 아니었다. 심지어 붙은 넘버도 4다.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수거?”
“선물.”
단호한 얼굴에 이연이 떨떠름하게 FT-4를 집어 들었다.
“고맙습니다…….”
“그래.”
FT-4와 심리적 내외를 하느라, 이연은 대답 이후에 이어진 D.S의 조그마한 뒷말을 한 박자 늦게 알아들었다.
“……네?”
이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든 네모나게 뜨든 D.S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평소와 같은 무뚝뚝한 등을 멀거니 바라보던 이연이 피식 웃었다.
“천만에요.”
“제산오!”
“청소 탈주자가 이제야 왔군.”
“야, 나 도망간 게 아니라 청소기 구하러 간 거야. 오늘 내가 청소 당번이라고? 잘 봐. FT-4라고 기가 막히는 기계를……”
[실외에서 실내로 들어왔습니다. 의류 관리 모드를 시작합니다. 옷을 걸어 주세요.]
“어?”
멈칫한 사이 FT-4에게서 기계 팔 같은 게 튀어나와 이연의 겉옷을 강탈해 갔다.
[옷이 걸렸습니다. 소재 확인. 표준 살균 과정으로 진행합니다. 예상 시간은 120분입니다.]
“……어?”
“기가 막히는 기계가 바쁜가 본데.”
“아니…….”
진짜 기가 막혔다.
“오늘 지나기 전에 빨리 해.”
이연은 결국 직접 온 집 안을 청소해야 했다.
*
“인생이 어렵다…….”
이연이 징징대며 소파에 엎어졌다. 맞은편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혜강이 흘끗 고개를 돌렸다. 산오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둘이서 한껏 늘어져 있던 참이었다.
“왜 그래?”
“취미를 만들고 싶은데 잘 안 되네.”
주변에 있는 표본이라곤 스토커에 악플러, 기계 천재 같은 인간들뿐이니 영 수확이 없었다.
“아. 네가 하는 거 나도 가르쳐 주면 안 돼?”
이연이 벌떡 일어났다. 혜강의 취미가 번뜩 생각났던 참이다.
“뭐? 해킹?”
“아니, 게임. 너 게임 많이 하잖아.”
혜강은 게임을 좋아했다.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하루에 최소 5시간 이상 투자할 정도로 열렬한 게이머였다.
그가 이연보다 출근 시간이 늦는 것도 게임을 하느라 밤샘할 때가 많아서였다. 차금의 오전 업무가 별로 바쁘지 않아 이연과 합의 후 결정된 사안이었다.
이에 대해서 논의할 때, 이연이 게임을 저녁에 하고 제시간에 자면 안 되는 거냐고 물어봤었다. 그러자 혜강은 내가 밤을 새고 싶어서 새는 게 아니라 모든 재미있는 일이 새벽에 일어나서 그렇다는 알 수 없는 대답을 했다. 새벽에는 다들 자는데 어떻게 재미있는 일이 일어난다는 거지? 이연은 이해하지 못했으나 아무튼 시간대가 중요한 것 같아서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끝냈다.
“게임? 나야 좋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 혜강의 눈이 반짝반짝했다. 이연은 몰랐지만, 그건 틀림없이 뉴비를 찾아 헤매는 고인물의 눈동자였다.
“갓겜 있거든.”
“갓……?”
그러고 나서 정신을 차려 보니 PC방 안이었다.
사무실에서 여기까지 이동한 기억이 이상하게 희미했다. 이연이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어두컴컴하게 조성된 널찍한 공간은 각종 요란한 효과음과 욕설로 떠들썩했다. 낯선 분위기였다.
“일단 여기 회원 가입 하고 게임 실행해 봐.”
이연이 처음 와 본 공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도 혜강은 신이 난 기색이 역력했다. 이연의 자리로 몸을 기울여 이것저것 설명해 준 혜강은 게임이 실행되는 동안 간단하게 소개해 주었다.
“<나이트 사가>라고 캐릭터 키워서 레벨 업하고 던전 돌고 장비 맞추는 RPG게임이야. 오베한 지 좀 돼서 예전 같은 위상은 아닌데, 아무튼 할 만할 거야.”
딱 두 마디 했는데 못 알아듣는 말이 반이었다. 이연이 뭣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이자, 혜강이 실행된 게임 화면에서 뭘 눌렀다. 캐릭터 생성 화면이 떴다.
“나 뉴비 케어 개잘해. 내가 잘 키워 줄게. 일단 캐릭터 만들어.”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닉네임과 직업, 외형 커스텀이 필요했다. 직업 목록을 훑어본 이연은 마법사를 선택했다. 가까이서 싸우는 건 아파 보이니까 멀리서 공격할 수 있는 게 좋겠지. 단순한 생각이었다.
외형 설정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랜덤을 돌렸더니, 조금 마음에 들지 않게 나왔다. 조금만 고치면 될 것 같은데……. 상세 설정 창에서 수치를 이리저리 조절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갔다. 기다리다 지친 혜강이 몸을 슬쩍 기울여 이연의 모니터를 들여다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왜 이렇게 예뻐?”
“응?”
“와, 형 커마 진짜 잘한다.”
“그래?”
이연이 쑥스럽게 대답했다. 완성된 캐릭터는 섬세하고 화려하게 생긴 금발의 남자로, 속눈썹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은 미인상이었다. 따지자면 산오처럼 선명하고 단단한 선이라기보다는 혜강같이 부드러운 계열이라고나 할까. 게임을 하면서 다양한 캐릭터를 접했을 혜강이 감탄할 정도면 괜찮게 한 것 같은 모양이다. 의외의 곳에서 재능을 찾았다.
남은 건 닉네임이었다. 닉네임…… 뭐 하지. 이연은 대강 생각나는 단어들을 쳐 보았지만 모두 이미 있는 닉네임이라고 떴다. 금세 성질난 이연은 의식의 흐름에 따라 아무 말이나 입력했다. 놀랍게도 생성되었다.
“만들었어? 닉네임이 뭐, 야…….”
이연의 모니터를 흘끗 바라본 혜강의 목소리가 필드 정중앙에 덩그러니 서 있는 ’가문의영광굴비’를 보고 흐려졌다.
“이제 뭐 하면 돼?”
“어어……. 레벨 5까지는 튜토리얼 진행해야 되거든. 그거 하고 있어.”
혜강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혜강 역시 같은 게임에 접속한 상태였는데, 어딘지 휘황찬란한 곳에 들어가 진지하게 타자를 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뭔가 심각한 일이라도 생긴 것 같았다.
이연은 성실하게 안내에 따라 조작법을 익혀 갔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멈칫거리던 가문의영광굴비의 움직임은 점점 부드러워졌다.
게임은 배경도 예뻤고, 캐릭터의 액션도 멋있었다. 튜토리얼 역시 복잡하지 않았다. 처음 해 보는 사람이 흥미를 느끼기엔 충분했다. 간단한 퀘스트들이 릴레이처럼 이어지는 사이 가문의영광굴비의 레벨은 벌써 3이 되어 있었다.
금방 튜토리얼이 끝나겠는데. 이연은 어쩐지 조금 신난 마음이 되어 새 퀘스트를 받았다. 마을 바로 앞 필드의 몬스터, 리프를 한 마리 잡으라는 퀘스트였다. 마을을 나선 가문의영광굴비가 막 근처에 있던 조그마한 식물 몬스터, <리프>를 타겟팅해 캐스팅할 때였다.
갑자기 리프가 쓰러지며 캐스팅이 취소되었다.
“어.”
누군가 먼저 죽인 것이다. 어리둥절하게 죽은 리프를 바라보던 가문의영광굴비는 조금 이동해 다른 리프를 타겟팅했다. 그러나 조금 전과 똑같이, 리프는 가문의영광굴비가 캐스팅을 마치기 전에 죽었다.
같은 시도를 몇 번 더 해 본 후에야 확신이 섰다. 이건 고의다. 필드의 다른 몬스터에는 손 하나 대지 않고 이연의 캐릭터가 타겟팅하는 몬스터만 집요하게 공격하는 사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