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
이연이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이건 뭐야?”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재경만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이연이 마우스를 빼앗아 억지로 게시 글에서 나왔다.
“함부로 싸움 걸고 다니면 어떡해요. 고소당하게 생겼잖아요.”
“괜찮아. 설마 진짜 하겠어?”
그 인간들이면 진짜 할 것이다. 이연의 근심도 모르고 재경은 의기양양하게 지껄였다.
“원래 커뮤니티는 이렇게 하는 거야.”
커뮤니티가 이런 거라면 평생 인터넷과 친해지지 않을 것이다.
종희 씨.. 변이종지지를철회 제 지인이에요 방금 단속했어요
이연이 종희에게 보낼 메시지를 작성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냥 소박하게 시간 때울 수 있는 취미를 갖고 싶었던 것뿐이었는데, 주변에서 멀쩡한 인간 찾는 게 힘들었다.
“저녁.”
이연이 뭉치를 데리고 문을 들어서자마자 산오가 물었다.
“시켜 먹자. 뭐 먹을래?”
휴대폰을 꺼내 드는 이연의 곁으로 산오가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빠르게 주문을 마치고 티 나지 않게 떨어져 소파에 앉는데, 물음이 날아왔다.
“어디 갔다 왔지.”
“아. 재경 씨한테.”
종희 씨가 그새 일러바치진 않았겠지? 이연이 조금 긴장하며 바라보았다.
“거긴 왜.”
모르는 모양이다. 다행이었다.
“뭐, 이것저것 할 이야기가 있어서…….”
애매한 대답에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했으나, 가서 제산오 악플 쓰다가 고소당할 뻔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연이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자 산오의 눈썹이 살짝 내려앉았다.
“그놈이랑 가까이 지내지 마.”
“어?”
서로 운명처럼 싫어하고 있었다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맹한 대답 사이를 싸늘한 음성이 갈랐다.
“우선순위가 명확한 인간은 좀처럼 기준이 바뀌지 않아.”
현실이 단번에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온도였다.
“놈의 최우선 순위를 생각하면 언젠가는 뒤통수를 치겠지.”
“……그래도 바뀔 수도 있지 않나.”
“안 바뀌어.”
단호한 목소리에 어째 마음 한쪽이 뜨끔했다. 시선을 내리까는 속눈썹을 빤히 노려보던 산오가 다시 한번 말했다.
“절대 안 바뀔 거다.”
*
“나 잠깐 D.S 씨에게 다녀올게.”
한가로운 주말 낮, 이연이 현관에 서서 인사했다. 소파에 있던 산오가 슬쩍 시선을 주었다.
“요즘 밖으로 많이 나돌아.”
“애도 아닌데 나돌긴 무슨…….”
이연이 머쓱하게 중얼거렸다. 적당한 취미를 마련할 때까지 산오와 둘만 있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다닌 건 사실이지만, 이번에 D.S에게 가는 건 산오의 탓도 있었다. 연구소에서 박살 난 고글 연결잭을 수리해야 했던 것이다.
이 자식, 분명히 예쁘게 잭 뽑아서 가져올 수 있었으면서 고의로 그런 게 틀림없었다. 물론 가져와 준 것 자체는 고맙긴 했지만…….
“오늘 네가 청소 당번인데.”
“갔다 올게!”
이연이 못 들은 척 후다닥 달려 나갔다. 쾅, 하고 닫히는 현관문을 바라보는 산오의 눈이 못마땅하게 가늘어졌다.
당장이라도 산오가 청소하라고 잡아갈까 봐 걸음을 서둘렀더니 공방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별생각 없이 공방 앞 도로를 걷던 이연은 반대편에서 이쪽으로 향해 오는 낯선 차체를 발견했다. 관리가 잘된 검은 세단은 반짝반짝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지역치고는 심하게 값비싸 보이는 차였다.
“잠깐…….”
이연이 본능적으로 멈춰서 몸을 숨겼다. 얼결에 근처 자판기 기계 옆에 숨은 이연은 상황을 지켜보았다.
차에서 내린 것은 익숙한 얼굴 두 개였다.
“어. 미래…….”
다소 굳은 표정의 희수와 들떠 있는 미래가 차 문을 닫고는 비장하게 공방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약속 지키러 온 거였군. 며칠 전에 독촉한 게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야, 이거…… 타이밍 끝내준다. 이연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숨은 상태로 조금씩 조금씩 전진하는 그의 얼굴에는 어떤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쓰잘데기없이 결연한 마음이었다.
덕분에 심호흡을 한 희수가 결연하게 한 발을 내딛었을 때, 이연은 공방 외벽 옆 아주 가느다란 골목 틈에 바싹 붙어 스탠바이 할 수 있었다.
숨어 듣는 게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인 건 알지만, 이연 역시 이 일에 일부는 엮여 있지 않은가. 자고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했다. 가정의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 주는 옛말이라고나 할까.
“계십니까?”
남의 치국과 평천하 계획까지 알아서 수립하는 민주공화국민의 야망은 희수의 떨떠름한 인사에 끊겼다.
“누구…… 아.”
언제나 뚱한 목소리가 드물게 흔들렸다. 이연의 시야는 벽에 가려져 보이는 건 희수의 뒤통수 정도였으나,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는 건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엄마!”
미래가 활기차게 외쳤다. 다다다 달려가 안기는 모습은 기쁨으로 가득했다.
“미래, 잘 지냈어?”
“놀이공원 간다고 해 놓고선!”
“미안, 바빠서 못 갔어.”
미래는 엄마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 조잘조잘 이야기를 한창 내뱉다가 엄마를 꼬옥 껴안았다. 미래를 훌쩍 안아 든 D.S가 드디어 희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여긴 웬일이야.”
“정이연 씨한테 부탁을 받아서.”
외상값을 내가 내주기로 했거든. 희수의 목소리는 일견 차분하게 들렸으나 묘하게 끝이 뭉개지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을.”
D.S가 혀를 찼다. 그러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들어가도 돼?”
“아니, 여기서 끝내.”
D.S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싸늘한 말에 희수의 얼굴이 조금 시무룩해졌다. 곧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봉투가 건네졌다.
“저기, 생활은 괜찮……”
“신경 쓰지 마.”
희수의 말을 자른 D.S가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우리 엄마한테 또 한 소리 들을라.”
그 말에 희수는 입을 다물었다.
“미래, 엄마랑 나중에 꼭 같이 놀자.”
“지금은 안 돼?”
“응. 지금은 엄마가 바빠서 안 될 것 같아. 미안해.”
“힝…….”
“착하게 기다리고 있어.”
다정한 말투에 미래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에 맞지 않는 어른스러움이었다. 엄마의 품에서 내리는 데에만 한참 걸린 조막만 한 발이 땅에 닿자, 갈게, 라는 인사와 함께 희수가 돌아섰다.
두 사람을 태운 차 소리가 잦아들고 나서야 터벅터벅 걷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와, 이 망둥아.”
소리가 멈춘 곳은 이연에게서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메마른 얼굴이 이연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커다란 그늘 안에 들어온 이연이 넉살 좋게 웃었다.
“앗……. 저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아셨어요?”
“공방 보안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했어. 범위에 사람 있으면 무조건 수신 와.”
치밀하긴……. 이연이 구겨져 있던 몸을 일으켜 공방으로 걸어가는 D.S의 뒤를 따랐다. 희수가 떠난 방향을 돌아보니 차는 벌써 보이지도 않았다.
“갑자기 웬 보안 시스템 업그레이드? 이전 것도 괜찮았잖아요.”
이연의 물음에, D.S가 인상을 조금 찡그렸다. 답지 않게 조금 난감한 얼굴이었다.
“며칠 전부터 수상한 사람이 주변에 보여서 예방용으로.”
“수상한 사람?”
이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D.S는 의뢰를 기분 내키는 대로 받는 편이었고 그중 불법적인 경로로 흘러들어 가는 장비도 있긴 했다. 아마 적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 도시에서만 성행하는 직업인 엔지니어의 네트워크는 한 다리 건너면 전부 지인인데, 실력 좋은 엔지니어를 공격하는 것만큼 멍청한 처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격한다는 건 그만큼 증오스러운 사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공방에서 좀처럼 나오지도 않는 D.S가 불법적인 사안에 그렇게 깊게 관여될 만한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짚이는 곳 있어요?”
“아니. 그냥 내 장비가 어디로 흘러들어 간 것 같은데.”
D.S가 인상을 찌푸렸다. 엔지니어는 자신의 작품 어딘가에 본인의 인장을 새겨 넣는다. 일종의 보증 표시였다. D.S는 깨끗하지 않은 경로로 의뢰를 받을 때도 있어서 최대한 인장을 안 보이는 곳에 숨겨 두는데, 누군가가 그걸 용케도 알아본 모양이라는 것이다.
“와, 인장이 있었어요? 내 거에도 안 보이던데?”
이연이 가방을 뒤적여 고글을 쥐었다. 그걸 막 꺼내 들고 살펴보려는 순간, D.S의 말이 들려왔다.
“네 고글은 연결잭에 있어. 완벽하게 은폐했지.”
“…….”
“다른 장비들도 그런 곳에 찍어서 웬만하면 못 알아볼 텐데,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르겠어.”
이연이 번개처럼 다시 고글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다행히도 D.S는 여기저기 널려 있던 공구를 정리하느라 그의 행동을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