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40화 (40/250)

#40

연구소를 부순 지도 벌써 이 주일이 다 되어 가는데, 김 박사는 눈치를 보고 있는지 도통 움직이질 않았다.

그가 포탈로 이동한 곳은 재경과 달리 이연의 동네가 있는 남구가 아니었다. 포탈이 하나가 아니었다는 건 차치하고, 김 박사가 향한 곳은 초호시 서구 외곽의 세민가로. 뒷골목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구역이었다. 그 근방에서 허름한 숙박을 전전하며 숨어 있는 듯했다.

희수 역시 단시간에 끝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므로 시간이 걸리는 것에 대한 질책은 없었다. 당시에 보여 준 김 박사의 야심을 생각하면 평생 처박혀 지내지는 않을 거고, 그렇다면 언젠가는 움직인다. 그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공교롭게도 이연이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는 숨죽이고 웅크리고 있는 거였다.

“김 박사 외의 다른 실마리는 찾지 못했습니까?”

“아직은요.”

클럽 연구소가 혜강의 눈에 바로 띌 수 있었던 것은 규모가 커서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으니 아무리 출입 인원을 관리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게 정말 멍청한 짓이었다는 것을 김 박사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대대적으로 청소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런 게 나오는 건지 모르겠군요.”

“그러게요.”

시간이 흘러 위기감도 옅어졌겠다, 정신 못 차리고 그늘에서 기어 나오려는 꼬락서니가 기도 안 찼다. 이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제 외상은 잘 처리됐나요?”

“…….”

별안간 못 들은 척하는 희수를 이연이 빤히 바라보았다. 한참의 침묵 끝에야 희수가 더듬대며 입을 열었다.

“그게, 일이…….”

“저기요.”

하나 부탁했는데 그 하나를 못 하는 게 말이 됩니까? 제가 뭐, 초능력 관리청을 부수라고 한 것도 아니고 딸이랑 엄마 좀 만나게 해 달라는 건데. 예? 지금 국장씩이나 돼서 의뢰비 먹튀하시는 건가요? 신고 넣는 수가 있어요. 이연이 줄줄 잔소리를 늘어놓을수록 희수의 낯은 창백해졌다.

“엄마?”

미래가 반짝 고개를 들었다.

“엄마 만나러 가?”

“으응. 삼촌이 데려다주시기로 했어.”

“삼춘! 진짜? 언제?”

반짝거리는 어린아이 눈망울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제산오 정도였다. 희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곧 갈 거야. 곧 갈 겁니다. 약속을 어기지는 않습니다. 다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서…….”

“와! 삼춘 최고!”

“진짜죠. 나중에 미래한테 물어볼 거예요.”

“알겠습니다…….”

미래에게 윙크를 보낸 이연이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사무실을 나왔다. 브이로그라……. 뭘 찍으면 좋을까.

“뭐 하는 거지.”

“브이로그라고 알아?”

대체적으로 상식 수준에 대해 무시당하는 게 일상인 산오가 짜증스레 이연을 노려보았다. 사나운 눈빛에도 굴하지 않은 이연이 산오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다.

“자, 제산오 씨. 한마디 해 보세요.”

“죽고 싶나?”

“아, 그런 거 말고.”

자기소개 같은 거 있잖아. 그러나 타박에도 산오는 별 대답을 하지 않았고, 결국 이연이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정이연이고 이쪽은 제산오입니다.”

딱딱한 말투가 어색하게 카메라에 담겼다.

“그리고 이쪽은 뭉치.”

제 이름을 알아들은 뭉치가 잽싸게 이연 쪽으로 다가와 품에 파고들었다. 까만 등을 능숙하게 두어 번 쓸어 준 이연이 셋 다 렌즈 안에 들어오게 각도를 조절했다.

“이렇게 셋이서 살고 있어요. 저는 원래 혼자 살았는데, 갑자기 룸메이트가 둘이나 생겼어요.”

이연이 흠흠, 하고 헛기침으로 쑥스러움을 감추며 주절댔다.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는데 이제는 좀 적응돼서 아무렇지도 않아요. 비록 방도 뺏기고 침대도 뺏겼지만.”

“자업자득이야.”

“그러고 보니 내 이전 침대는 어쨌어? 진짜 부순 거야?”

“봤잖아.”

“야! 내가 얼마나 고심하면서 산 건데. 그거 얼마짜린지 알아?”

“324,000원.”

“……어떻게 알았어?”

천원 단위까지 알고 있다니. 이연이 엉덩이 걸음으로 산오에게서 조금 멀어졌지만, 산오는 조용히 입꼬리만 끌어 올렸다. 오지게 성격 나빠 보이는 웃음이었다.

“모르는 게 나을 텐데.”

애매한 대답 덕에 펼쳐지려던 상상의 나래를 간신히 잡아 누른 이연이 어색하게 녹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오, 오늘의 브이로그는 이걸로 끝~.”

인터넷에 올리면 종찬과 종희에게 고소장이 날아올 수도 있으니 개인 소장으로만 남겨 둘 계획이었다. 휴대폰을 내려놓은 이연이 뭉치를 안고 소파 등받이에 기댔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태만한 자세에 산오의 눈썹이 아주 살짝 들렸다.

“막상 일상을 담으려니까 할 게 없네.”

미래에게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만 해도 쉬울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어려웠다. 원래 일상이라는 게 늘 똑같고 시시하지 않은가. 휘황찬란한 의뢰를 맡는 것도 아니고, 호화로운 삶을 사는 것도 아닌데.

“심심한 인생이네.”

이연이 희미하게 웃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늘상 맹하게 힘이 풀려 있는 낯짝을 흘끗 본 산오가 일어섰다.

“옷 입어.”

“응?”

“일상 담는다며.”

거침없이 거실을 가로지른 산오가 작은 방에 잠깐 들어갔다. 잠시 후 나온 그는 간단한 운동복 차림이었다.

“없으면 만들어.”

“……야, 일상의 뜻은 알고 있지?”

“나와.”

산오가 고개를 까딱였다. 이런 식으로 끌어내는 건 처음이다. 뭔지 모를 공포를 느낀 이연이 저도 모르게 뭉치를 끌어안고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뭐, 뭐 할 건데?”

현관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는 등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뭉치 산책.”

이연이 이 공원에 와 보는 것은 두 번째였다. 첫 번째 기억도 별로였는데, 두 번째 기억도 좋지 않게 생겼다. 앞서 걷는 산오를 미적미적 따라가느라 속도가 늦어지자 바닥에서 뭔가가 이연을 끌어당겨 산오의 옆으로 갖다 놓았다.

난데없는 축지법에 이연 근처에서 걷던 뭉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아니, 지가 좀 기다려 주면 될 걸 가지고……. 이연이 괜히 투덜대며 산오를 흘겼다.

이제 막 노을이 지는 저녁 시간이었다. 날씨도 적당히 선선했다. 뭉치는 흔치 않은 경험에 신났는지 산책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냄새를 맡았다. 진짜 동물이 아니니 산책 같은 건 의미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다.

“뭉치, 좋아?”

이연이 허리를 숙이고 묻자, 뭉치가 대답하듯 꼬리를 흔들었다. 떠밀려 나오긴 했지만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잘 나왔다 싶었다. 이연이 피식 웃었다.

여기까지는 딱 좋았는데.

비극은 돌아다니던 뭉치가 갑자기 속력을 내서 산오와 이연을 한참 추월하면서 시작되었다.

“어, 뭉치야?”

이연이 의아하게 불렀으나, 뭉치는 오히려 저 멀리서 따라오라는 듯 펄쩍펄쩍 뛰었다. 아무래도 마음껏 달리고 싶은 듯했다. 그래, 달리고 와라……. 그런 생각으로 손을 흔드는데, 옆에서 산오가 중얼거렸다.

“2급 변이종을 일반인 다니는 공원에 그냥 풀어놓을 셈인가.”

“……아니, 뭉치는 괜찮잖아.”

소심하게 반박했지만 산오는 어림없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주인 된 도리로 같이 뛰어.”

이 자식, 설마 처음부터 이럴 셈으로……. 이연의 얼굴이 배신감으로 얼룩졌지만 산오는 굳건했다.

이연의 근육량을 늘리려는 의지로 빛나는 눈이었다.

“헉…….”

정확히 3분 후, 이연이 쓰러지듯 벤치에 널브러졌다.

저 멀리 달리던 뭉치가 금세 되돌아와 벤치에 두 발을 올리고 이연을 요리조리 살펴봤다. 전혀 지치지 않은 기색이었다.

한발 늦게 산오가 산책이라도 하듯 느긋하게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얼굴에 업신여김이 가득했다.

“그게 최선인가?”

“헉, 너, 진짜, 허윽, 조용, 안, 헉…….”

애잔한 체력의 소유자가 하는 삿대질 따위는 산오에게 전혀 타격이 가지 않았다. 그 와중에 괜히 말하려고 들다가 힘이 더 빠진 이연은 침을 잘못 삼켜 사레가 들렸다. 쿨럭거리는 기침 소리가 요란했다.

이연이 따라오자 뭉치는 술래잡기라도 하는 줄 알았는지 절대 뒤를 잡히지 않을 속도를 유지했다. 변이종 페이스메이커와 함께 공원을 두 바퀴쯤 뛰고 나니 빈사 상태가 되는 건 금방이었다.

“헉, 하…….”

벤치에 쓰러져 거칠게 숨을 내쉬는 이연의 머리 옆에 산오가 앉았다. 뭉치 역시 사뿐하게 뛰어올라 이연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그러나 억울했다. 이연의 체력이 평균보다 낮은 건 인정하지만, 무궁화 5단이랑 2급 변이종씩이나 되면서 지들이 평균인 줄 알고 남을 종이인형 보듯 하는 게 문제 아닌가? 본인들의 괴물 같은 체력을 감안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체력을 모조리 빨리다 못해 인성까지 빨리기 시작한 이연이 불량스러운 시선으로 둘을 째려보았다.

그 시선을 알아챈 산오가 허리를 숙이고 이연에게 손을 뻗었다.

“뭐…….”

흠칫 놀란 이연이 몸을 물리려고 했지만 본의 아니게 뭉치가 막고 있었다. 산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연의 주머니를 더듬어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카메라 렌즈를 들이댔다.

“산책 1일차.”

“…….”

“브이로그.”

다시는 제산오 앞에서 브이로그의 V도 꺼내지 않을 것이다. 이연은 굳게 결심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