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38화 (38/250)

#38

“취미이?”

실내에서도 꿋꿋하게 쓰고 있는 까만 선글라스가 불량하게 번뜩였다.

“지금 산오 님 카드 내역에 대해 말하고 있잖아. 말 돌리지 마세요.”

“쩨쩨하게 단속하기예요? 알아서 써도 된다면서요.”

심드렁한 대답에 종찬이 포효했다.

“그것도 적당히 써야 할 거 아냐! 우리 산오 님 통장을 거덜 낼 셈이야!”

“종찬 씨.”

이연의 얼굴이 엄숙하게 변했다.

“제산오 재산이 고작, 제가 몇 달 쓴다고 바닥나는 그런 허접한 수준입니까?”

“……그건 아니지.”

“그럼 됐네요.”

산뜻한 결론에 종찬이 다시 발끈했다.

“되긴 뭐가…….”

“이연 씨.”

종찬의 말을 끊은 것은 종희였다. 차분한 목소리가 분위기를 식혔다.

“갑자기 취미에 대해 물어보시는 연유가 있을까요?”

“아니, 뭐……. 저도 취미 하나 가져 볼까 하고.”

“취미도 없어? 요?”

내킬 때만 요상한 존댓말을 구사하는 종찬이 뻐기는 투로 말했다. 이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다른 분들 취미를 좀 따라 해 볼까 하고요.”

“산오 님의 룸메이트가 그런 것도 없으면 안 되지.”

종찬이 따라오라는 듯 벌떡 일어섰다. 선글라스 너머로 번뜩이는 눈빛이 퍽 의기양양했다.

“꽤 잘 어울리네요.”

“감사합니다.”

이연은 정장 브랜드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때깔이나 맵시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종찬과 종희가 데려온 가게는 제 돈 주고는 절대 올 일 없는 곳일 테다.

사락거리는 옷감이 몸에 닿는 느낌이 어색해, 이연은 괜히 정장 여기저기를 들춰 보았다. 어디선가 종희가 구해 온 검은 선글라스까지 장착하고 나자 세 사람은 완전히 같은 일행으로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정장은 왜 맞춰 주시는 건가요?”

“취미 생활에 필요합니다.”

맞춰 준다는 말에 따로 반박하지 않는 걸 보니 사 주는 모양이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정장을 입어야 할 수 있는 취미라니, 대체 무슨 종류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열심히 추측하려고 노력했으나 상상력의 한계로 실패했다. 정장이 필요한 자리라면 경조사 정도인데, 설마 그런 게 취미일 리는 없지 않겠는가.

가게를 나온 셋은 검은 세단을 타고 이동했다. 종찬이 운전하는 동안, 종희가 이연에게 태블릿을 하나 건네주었다.

“가는 동안 이것을 적어 주십시오.”

언뜻 보니 어떤 표 같았다. 의아하게 태블릿을 받아 든 얼굴은 화면의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싸늘해졌다.

“제산오 기상 시간을 왜 물어보는 거죠?”

“건강 검진의 일종입니다.”

“아침 메뉴도요?”

“네.”

종희의 얼굴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에, 이연은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다.

“길거리 캐스팅 얼마나 받았는지는 왜 물어보는 건데요?”

그러나 속지는 않았다.

“취미 물어봤더니 스토킹 일지를 보여 주면 어떡해요? 제산오는 댁들이 이러는 거 압니까?”

수상한 문서는 그 외에도 황당한 항목이 넘쳐났다. 산오의 하루 물 섭취량, 헌팅당한 횟수, 수면 자세, 최근 가장 기분 좋았을 때 상황……. 체질량 지수는 알 게 뭐란 말인가? 이연은 본인 몸무게도 몰랐다.

“스토킹이라니.”

종찬이 덩달아 정색했다.

“산오 님을 보필하기 위한 기본적 체크다.”

“뭘 보필하는데? 제산오는 똥이 강철이어도 문제없는 인간이에요.”

“뭐!”

대경실색해서 고개를 돌리려는 종찬의 머리통을 재빨리 붙잡아 전방으로 고정한 종희가 대신 이연을 돌아보았다.

“산오 님이…… 혹시 변비 기운이 있습니까?”

“…….”

“어떤 증상인지 정확히 말씀을 해 주시면…….”

피곤해졌다. 집에 가고 싶었다.

“저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짧은 시간 새에 초췌해진 이연이 뒷좌석에 늘어졌다. 슬라임처럼 흐물텅한 자세로 아무렇게나 스토킹 일지를 채워 넣는 손길은 맥아리라곤 하나도 없었다.

“저희 취미는 산오 님 보필입니다.”

저 대답은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그러니 산오 님을 뵈러 갑니다.”

“예?”

제산오 생각 안 하려고 이러고 있는 건데 취미 탐문을 시작하자마자 당사자와 초고속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산오를 만나도 문제였다. 비서들한테 취미를 물어봤는데 네 스토킹이라더라. 그런데 나도 같은 옷을 입고 있어. 그럼 이 스토커들하고 자신도 같은 취급을 받을 게 아닌가? 상상만 했는데 최악이었다.

지금이라도 내려 달라고 할까? 이연이 눈치를 보며 막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다 왔습니다. 내리시죠.”

쾌속 운전 덕에 도망칠 틈도 없었다. 이연은 죽상으로 차에서 내렸다.

“저기, 제산오한테 저는 그냥 지나가다 들른 거라고 말 좀…….”

“예?”

종희가 의아하다는 듯 이연을 보았다. 손에는 어느새 캠코더가 들려 있었다.

“저희는 산오 님을 직접 대면하지 않습니다.”

“네?”

“근처에 다가가면 위험할 수 있거든요. 멀리서 보기만 할 겁니다.”

그제야 이연은 도착한 곳을 둘러보았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 깎아지른 폭포가 흐르는 계곡을 감싼 인적 없는 숲속.

그 안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쿠르릉, 하는 울음이 메아리를 타고 나지막하게 울렸다. 마치 깊은 곳에서 땅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이연은 지대가 높은 숲 한쪽 언저리가 작게 진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대한 힘은 그들이 있는 곳까지는 닿지 않았지만, 마치 재해를 목도하는 것처럼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덕이 움직였다.

아니, 아니. 언덕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거대한 몸체의 일부였다. 둥글고 매끄러운 어떤 생물이 지면을 유영하고 있었다. 축축한 진흙을 두른 것은 뱀 같기도 하고, 구렁이 같기도 하고.

용 같기도 했다.

느리게 움직이는 진흙 용은 마치 숲의 신을 연상케 했다. 거리가 충분히 있었는데도 위압감이 엄청났다. 피부에 찌릿찌릿한 긴장감이 닿아서, 저도 모르게 이연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4급 변이종 도호.”

어느새 곁에 다가온 종찬이 말했다. 선글라스 너머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전방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히 놔두면 땅에 숨어서 지나가는 사람을 생매장하는 놈이야.”

“혼자 싸워요?”

“산오 님은 늘 혼자 싸워.”

가장 높은 나무 위, 레고처럼 보일 정도로 작은 인영이 있었다. 바람에 펄럭이는 검은 코트 자락이 햇빛에 둔하게 빛나고 있었다. 익숙한 착장의 주인은 자세히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산오는 별다른 준비 동작도 없이, 그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도호의 주변에 거대한 벽이 쌓이기 시작했다. 둥근 몸체처럼 둥글게 말아 올린 벽은 얼핏 보면 도호의 몸체 표면에 붙은 진흙과 색이 비슷했다.

순식간에 파도가 덮치는 것처럼 도호의 위로 그늘이 졌다. 어찌나 빠른 속도였는지, 도호는 제 몸이 다 덮일 정도가 되어서야 이물질의 존재를 알아챘다.

끼이이……!

소름 끼치는 울음이 울려 퍼지려는 그 순간, 벽은 도호를 완전히 감쌌다.

그리고 강하게 우그러들었다.

고요하게 짓누르는 힘은 소리조차 삼켰다. 안쪽에서 도호가 반항하며 벽이 조금씩 흔들렸지만, 감히 깨지는 일은 없었다.

압축되는 벽은 느릴지언정 결코 멈추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또 조금씩. 끝내 도호가 뒤흔들던 땅이 원상 복구 될 때까지.

정적이 흘렀다.

조용해진 숲을 무심하게 훑은 산오는 이내 빼곡하게 검은 비늘이 돋아난 손을 내렸다. 그리고는 나무에서 뛰어내려 모습을 감추었다.

그게 끝이었다.

“…….”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 이연은 할 말을 잃었다.

제산오가 나라의 미래는 자기라고 뻐길 땐 그냥 재수 없기만 했는데, 실제로 보니 왜 그딴 소리를 하고 다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도 재수 없긴 매한가지긴 하지만 아무튼…….

저 능력대로라면 청호를 상대하던 건 완전히 장난이었다. 진짜 고양이 놀아 주듯 놀아 준 것에 가까웠다. 상식을 초월하는 능력.

정말 강하구나.

정보가 인지의 한계를 넘어서고 나니 그런 단편적인 생각밖에 안 들었다.

“저희도 철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종희의 말에 이연의 시선이 그녀가 쥐고 있던 캠코더에게로 옮겨 갔다.

“그건…….”

“이건 대외용입니다.”

“대외용?”

“화질을 떨어트려서 인터넷에 가끔 올려 줘야 하거든요.”

“아니, 그게 댁들이 한 거였어요?”

지나가던 일반인이 아니었다니. 하긴, 요즘 같은 시대에 지나치게 열화된 화질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산오 님은 언론 활동을 하지 않으시니까.”

일종의 환기였다. 최소한의 노출로 제산오의 존재를 과시하는 동시에 영향력을 유지하는 방법.

“산오 님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셨으면 합니다.”

“이미 그러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러기 위해서 저희가 있는 겁니다.”

산오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든 말든, 얼굴이 보이든 말든.

하지만 신상이 드러날수록 선택지는 적어진다. 아무리 본인이 개의치 않는다고 해도, 이 사회의 구성원인 이상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종찬과 종희가 나서기로 했다.

둘은 뒤에서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를 구속하는 건 아무것도 없도록, 동시에 존재감이 사라지지도 않도록.

유능한 두 비서 덕에 최강의 초능력자는 도시의 영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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